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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⑤백제사, `비밀의 문` 열린다

영양대왕 2009. 5. 22. 14:59

전북일보

[전주 재발견 현장답사]

 

⑤백제사, '비밀의 문' 열린다

백제 최대 사찰 미륵사 누가 지었나…무왕과 선화공주의 천년사랑 '미궁속으로'

도휘정(hjcastle@jjan.kr)

전주 재발견 현장답사 참가자들이 부여 궁남지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미륵사지에서 발견된 사리봉안기.

 

백제사에 재미를 더하다.

 

최근 백제사는 마치 시청율이 차츰 올라가는 드라마처럼 극적 흥미를 더해가고 있다. 물론 시청율도 드라마에 흥미를 느끼는 사람에게만 관심이 있듯이, 새로이 발견되고 있는 유물에 대한 흥미도 백제사에 관심을 느끼고 있는 사람들에게만 한정되어 있다. 백제사를 공부하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백제사에 관심을 가져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최근 열기를 더해가는 백제사를 주제로 답사를 진행한다.

 

올해 1월 14일에 미륵사지에서는 삼국유사 무왕조에 실려있는 서동과 선화공주와의 영원한 로맨스를 사실에서 창작 이야기로 강등시키는 사리봉안기가 발견되었다. 서동설화에서는 선화공주가 미륵삼존상을 친견한 사실을 기념하기 위하여 미륵사 건립을 제창했다고 한다. 그런데 사리봉안기에서는 좌평 사탁적덕의 딸인 왕비가 국왕과 왕비의 건강과 영생을 빌기 위하여 사찰을 건립했다고 한다. 삼국유사 기록보다는 당시의 기록인 사리봉안기가 훨씬 사료에 대한 신뢰가 가기 때문에 선화공주는 잠시 신기루처럼 저 멀리 사라지는 듯했다. 이를 방어하기 위한 힘든 노력도 행해지고 있다. 3원 3탑 구조인 미륵사이기 때문에 사리봉안기가 발견된 서탑 이외의 중원 목탑과 동원 석탑에서도 사리봉안기가 있었을 것이다. 아무래도 중원 목탑이 중앙에 위치해있기 때문에 사찰의 중심탑으로서 그 곳에 봉안된 사리기에는 선화공주가 존재해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현재 국립전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왕궁리 5층석탑에서 발견된 사리병과 일본 청련원에서 발견된 관세음응험기에 의하면 7개의 사리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미륵사 사리호에서 발견된 사리는 처음에는 12개로 공식 발표되었다가 며칠 후 다시 사리는 1개로 수정 발표되었다. 비록 현존하지는 않고 기록에만 전해지지만 왕궁리 5층석탑의 7개에 비하면 미륵사의 사리 1개는 터무니없이 적은 편이다. 아무래도 3탑 각각에 사리가 봉안되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사리봉안기에 선화공주의 실존을 증명해줄 기록이 남아있다고 추측할 뿐이다.

 

흥미로운 점은 얼마든지 있다. 사리호에 새겨진 돼지꼬리 문양은 독특하면서도 사리호의 장엄함에 동적인 느낌을 살려주고 있다. 또 은제관식이라고 불리우는 유물 2점이 나왔다. 이 중 하나는 부러진 것을 다시 이어 붙인 것이다. 즉 새것이 아닌 헌 것을 공양물로 바친 것이다. 이는 즉석에서 공양이 이루어진 것으로 판단되고 있다.

 

그런데 백제사에 흥미를 더해주는 요소는 미륵사지 발견 유물만은 아니다. 왕흥사지에서도 사리기가 발견되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는 왕흥사는 법왕이 600년에 건립하기 시작하여 무왕이 오랜 세월에 걸쳐 완공하였다고 되어 있다. 삼국사기에서는 무왕 35년인 634년에 완공되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대략 35년만에 왕흥사가 완공된 셈이다. 왕흥사 발굴로 발견된 사리기에 의하면 왕흥사는 577년인 위덕왕에 의해 죽은 왕자를 기리기 위해 창건되었다고 한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기록된 왕흥사의 창건과 완공 연대에 대해 어느 누구도 의심을 하지 않았다. 왕흥사 발굴로 드러난 사리기에 위덕왕이 577년에 건립했다고 하니 백제사 연구자들은 당황스럽고, 이를 지켜보는 독자들은 흥미로운 것이다. 소극적으로나마 연구자들의 반론이 이어졌다. 탑의 준공시기가 577년이지, 금당의 완공시기는 아마도 무왕대인 630년대가 아닐까 하는 희망이 피력되었다. 계속 발굴이 진행되면서 희망은 여지없이 무너졌다. 금당의 준공시기도 탑의 준공시기와 그리 멀지않은 거의 동시기에 완공되었다는 것이다. 발굴결과와 문헌기록을 합치시키위해서는 고려되어야 할 몇가지 요소가 있다. 먼저 왕흥사는 문자 그대로 왕실의 번영을 기원하는 사찰이다. 그런데 왕흥사가 죽은 왕자를 위해 건립되었다고 하니 사찰 건립목적과 명칭이 맞지 않는 셈이다. 그리고 왕흥사의 중요성은 인근의 호암사와 관련성이 있다는 점이다. 기록상으로는 호암사에는 신라의 화백회의와 같은 귀족회의가 열렸던 정사암이 있었다고 한다. 바로 이점에서 호암사의 발굴이 기대되는 이유이다.

 

그리고 최근 백제지역 발굴에서는 심심치 않게 목간이 발견되고 있다. 목간은 종이대신 기록을 남기기 위하여 사용한 나무조각을 말한다. 발견된 목간에서는 백제시대의 생생한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부여 쌍북리에서 발견된 <좌관대식기>묵서의 목간에서는 쌀을 빌려주고 이자를 더해 상환하는 모습이 오늘날의 장부 형태로 적혀있다. 비록 9명의 인물에 한정된 기록이지만, 연리 50%에 육박하는 이자와 원금을 제대로 갚지 못하고 있는 당시 농민생활의 한 측면을 여실히 재생해주고 있다. 또한 약을 조제하고 처방하는 사람에게 지급한 일당이 기록된 목간도 발견되었다. 대략 9일 동안 지급된 쌀을 날짜별로 기록하고 있다. 또한 왕성으로 출입하는 성문에서 행해지고 있던 노제에서 사용되었던 목간도 발견되었다. 이 목간은 생김새부터 남근 형상을 지니고 있어 예사롭지 않다. 묵서의 내용도 "길의 신이여 일어서라, 일어서라, 일어서라"라고 하면서 남근을 세워두는 형식으로 못된 기운이 성문 출입을 막는 역할을 담당했다고 하니 흥미롭다고 하겠다.

 

먹고 배설하는 이상 인간에게 중요한 일이 또 있겠는가. 목간에서는 주로 먹는 일이 적혀 있었다면 배설의 기쁨 또한 찾아지지 않을 수 없다. 우리 고장 왕궁리에서 20여년 이상 발굴이 지속되고 있다. 왕궁리에서는 우리 고대사 사상 최초로 화장실이 발굴되었다. 뒤처리용 막대가 처음으로 발견되었을 때는 웃지 못할 헤프닝도 있었다. 일정한 크기의 막대기가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이것은 백제시대에 사용된 길이를 재는 자로 오인되기도 했던 것이다. 이어 큰 웅덩이 형식의 수세식 화장실이 발견되어 이것이 뒤처리용으로 사용된 막대기인 것을 알 수 있었다. 화장실은 당시 백제 사람들이 무엇을 먹었으며, 어떤 기생충에 감염되었으며, 그들의 건강상태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케 해준다고 한다.

 

새로운 자료의 발견으로 상층부의 정치사에 관한 이야기로 한정될 수밖에 없었던 백제사가 이제는 개인의 생활사로, 개인간의 사회사로 그 영역을 넓혀가면서 더욱 흥미를 더해가고 있다고 하겠다. 백제인들의 비석이 하루빨리 우리 앞으로 모습을 드러내기를 기대하면서, 백제사가 더욱 풍부해질 그 날을 상상해 보면서 전주문화사랑회의 답사도 계속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김주성 전주교육대학교 교수

 

※ 이번 답사는 '백제∂후백제의 꿈을 찾아'(안내 김주성 전주교대 교수) 23일 오전 9시 전주역사박물관 출발

왕궁리 → 제적사지 → 쌍릉 → 미륵사지 → 연동리석불 → 태봉사석조삼존불 → 견훤묘 → 왕흥사지

※ 다음 답사는 6월 13일 '남고산성에 어린 역사와 문화'(안내 하태규 전북대 교수)

※ 답사신청은 전주문화사랑회(www.okjeonj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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