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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중국 동북지방 고구려 성곽방어체계

영양대왕 2008. 4. 22. 20:08

중국 동북지방 고구려 성곽 방어체계

- 요동지역 군사방어체계를 중심으로 -

 

 

  

- 목 차 -

Ⅰ.

서론 ………………………………………………………………

1

Ⅱ.

고구려의 요동확보 과정 …………………………………··

4

1.

후한왕조와의 대립 ………………………………………………

4

2.

공손정권 · 위왕조와의 대립 ……………………………………

5

3.

모용선비와의 대립 ………………………………………………

6

Ⅲ.

지형에 따른 고구려 성곽 방어체계 …………………·

9

1.

혼하 · 태자하 중상류의 산간지대 ……………………………

9

2.

요하 하류~천산산맥과 요동평원 ……………………………··

11

3.

요하 중상류~길림합달령산맥 …………………………………

13

Ⅳ.

결론 ………………………………………………………………

15

참고문헌 …………………………………………………………………

18

 

 

Ⅰ. 서론

 

‘高句麗’라는 국호는 본래 ‘句麗’(句驪, 駒驪)라는 말에서 유래하였다. '구려'는 고구려어에서 성이나 고을을 뜻하는 ‘溝漊’, 성을 의미하는 ‘忽’의 음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이인영 2006: 171-173). 이후 여기에 ‘高’字를 붙여 생겨난 것이 고구려라는 국호인데 아마 ‘높은 나라’, ‘큰 나라’, ‘高大한 나라’, ‘高貴’한 나라‘ 정도의 뜻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박용운 2004: 46). 이를 통해 보면 고구려를 건국한 주민집단은 일찍부터 ‘성’을 축조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문헌에서 ‘구려’라는 명칭은 기원전 107년 전한이 현도군을 설치하는 과정에서 처음 등장한다. 이로 보아 고구려를 건국한 압록강 중류 일대의 주민집단은 늦어도 기원전 2세기 무렵에는 각지에 성을 축조하였을 가능성을 상정할 수 있다(남일룡 1995; 리순진 1995; 이송래 1993: 210).

 

실제 환인 오녀산성에서는 燕 계통의 선철제 주조도끼가 출토되었는데 이는 자연적인 요새지인 경우, 이른 시기부터 방어시설로 이용되었음을 반영한다. 또한 압록강 중류일대와 이웃한 渾河 상류유역에서는 방어를 고려하여 산지에 자리 잡은 신석기시대 말기~청동기시대의 취락유적이 다수 존재하는데 취락유적의 입지조건이 고구려 초기 산성과 매우 유사하여 주목된다(余昊奎 1999a: 14). 이처럼 압록강 중류 일대에는 상당히 이른 시기부터 산지에 방어용 취락이 들어서고 더 나아가 ‘구루’라고 불렸던 성이 축조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성을 중심으로 성장한 고구려는 이후 점령지역마다 성을 축조하여 지배력을 공고히 하였다. 특히 고구려가 지속적으로 영토를 확장한 지역은 요하유역인데 이곳은 단순한 鐵産地로서의 의미뿐만 아니라(李龍範 1966) 고구려를 포함한 중국왕조 및 북방민족의 군사적 진출을 위한 시험장 내지는 최후 결전장이었다. 그러므로 고구려의 산성은 요동지방에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신형식 2000a: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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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동과 요서를 나누는 요하는 예로부터 중국 6대 하천의 하나로 지목될 정도로 큰 하천이다. 요하는 크게 상류지역과 중하류지역으로 나뉘며 상류지역은 발원지에 따라 서요하와 동요하로 양분된다(劉威 1998). 서요하는 역사적으로 유목민족의 활동무대로서 고구려와 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으며 동요하 일대는 대부분 광활한 동북대평원을 가로지르는 구간으로서 아직까지 고구려 성이 발견된 바가 없다.

 

요하 중하류지역 역시 서쪽과 동쪽의 자연지형이 확연히 구별된다. 서쪽 지역에는 동서 방향의 과이심사막이나 동북~서남 방향의 의무려산 등이 요하 서안까지 뻗어있기 때문에 지류가 크게 발달하지 않은 편이다. 이에 비해 동쪽 지역은 상류에서 하류로 내려가면서 대흑산맥, 길림합달령산맥, 용강산맥, 천산산맥 등에서 발원한 지류들이 많이 발달되어 있다. 이들 지류 연안에는 하천의 범람으로 인한 비옥한 충적평지가 넓게 형성되어 있을 뿐 아니라 연평균 강수량 600㎜ 이상, 연평균 기온 23~24℃로서 농사짓기에 충분하다(劉明光 1998). 특히 각 지류 연안에 펼쳐진 충적평지는 폭 1~2㎞, 길이 수십㎞로서 지형조건상 압록강 중류 연안과 유사하다.

 

이처럼 요하 중하류 가운데 동쪽지역이 서쪽지역보다 농경에 더 적합하며, 지류 연안에는 고구려 발상지인 압록강 중류연안과 유사한 河谷平地가 발달해 있다. 그리하여 고구려는 일찍부터 요하 동쪽의 지류 연안으로 진출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요동평원의 중국세력이나 서요하 · 대릉하 방면의 유목민족과 끊임없이 충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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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고구려가 요동지역을 확보하는 과정을 간략하게 살펴본 다음, 요동지역에 축조된 각 성들이 어떠한 군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확인해 보도록 하겠다. 특히 지형에 따라 성의 규모나 성격 등이 다르다는 점에 주목하여 고구려가 일관된 군사전략에 맞춰 각지에 축성 사업을 벌였음을 검토하겠다.

 

  

Ⅱ. 고구려의 요동확보 과정

 

1. 후한왕조와의 대립

 

일반적으로 고구려의 요동진출은 4세기 모용선비와의 대립에서 그 기원을 찾곤 한다(孔錫龜 1998: 23; 李基東 2005: 292). 하지만 고구려는 유리명왕 11년(B.C 9)에 이미 선비 滿離集團을 예하집단으로 거느렸고(노태돈 1999: 60-61), 33년(14)에는 현도군의 고구려현을 습격하여 탈취하는 등 이 지역에 대한 진출 의도를 강하게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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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도군은 기원전 107년에 설치되었다가 고조선의 유민에 의해 기원전 75년 서쪽으로 쫓겨 가게 된다. 이후 혼하 상류에 제2현도군이 설치되는데 중심지역에 설치된 고구려현, 상은대, 서개마 3개 현 중 고구려현을 고구려가 탈취함으로써 고구려의 서북 변경은 1세기 초에 혼하 상류까지 이르게 된다(서병국 1997: 83).

 

뒤이어 모본왕 2년(49)에는 한나라의 우북평, 어양, 상곡, 태원 등지를 습격하였으며 태조대왕 3년(55)에는 요수 서쪽에 10개의 성을 쌓아 한의 침략에 대비하기도 하였다. 또한 2세기 전반에는 선비족과 연합하여 한군현을 여러 차례 공격하였는데 이를 통해 봤을 때 고구려는 요하 하류의 요동 평원으로 진출하기 이전에 이미 요하 중류를 통해 요하 상류 나아가 서요하 일대의 유목민족과 통교하면서 이 지역에 대한 지배권 확보를 위해 노력했음을 알 수 있다(余昊奎 1999a: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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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 고구려는 새롭게 차지한 동옥저 지역 등을 개발하면서 농업, 철생산 등 경제의 안정적 기반을 구축한 이후에 요동지역으로 진출하려고 하였기 때문에(朴性鳳 1995: 15-17)상대적으로 요하유역에 대한 군사작전을 지속적으로 수행할 수 없었다고 생각한다. 고로 모본왕의 후한 동북군현 습격도 기습에 의존한 약탈전 성격이 강했으며, 태조대왕대 쌓은 요서 10성 또한 장기간 주변 지역을 장악하기보다는 적을 공격하는데 있어 전초기지적인 성격으로 활용되었을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다.

 

2. 공손정권 · 위왕조와의 대립

 

190년, 동탁을 토벌하기 위해 전국에서 군웅들이 군사를 일으키는 등 혼란스러워지자 요동에서는 公孫度이라는 인물이 자립하기에 이른다. 그는 요동군을 셋으로 나눠 요동, 중요, 요서 3군으로 만들고 남쪽으로 바다 건너 동래의 여러 현을 점령하여 영주를 설치하는 등 영토를 크게 확장했다. 그 외에 현도군과 낙랑군까지 휘하에 두고 육지와 바다를 통해 중국 내지에서 피난민을 받아들이니 13만의 인구는 단기간에 40만까지 증가하였다.

 

197년 고국천왕이 죽고 둘째 동생 연우가 산상왕으로 즉위하자 첫째 동생 발기는 이것에 반발하여 소노가와 3만여 구를 이끌고 반란을 일으켜 공손도에게 군대를 빌려 고구려를 침공한다. 비록 발기의 군대가 고구려군에게 패했다고는 하지만 고구려측에서 봤을 때 공손정권은 상당히 위험한 적국임에 틀림없었다. 그렇게 요동에서 공손정권이 세를 확장하자 고구려는 요동진출의 장애가 되는 공손정권을 제거하기 위해서 오와의 관계를 끊고 위와의 국교관계를 강화한다(徐榮洙 1987).

 

이후 고구려는 238년 위가 공손정권을 공격하자 양평성 전투때 천여 명의 군사를 파견해 위를 도와준다. 이는 요동에서의 기득권을 차지하기 위함이었지만 공손정권이 차지하고 있던 영토와 인구를 위가 전부 차지하면서 양국의 관계는 불편하게 된다. 이듬해부터 위는 요동군의 관리와 백성들을 산동반도로 이주시키기 시작하는데 이는 아마도 고구려의 압력에 대한 불안감이 고조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실제 242년 서안평을 공격한 고구려는 위와 정면으로 충돌하게 된다(吳舜濟 1998). 245년 위는 유주자사 관구검을 파견하여 고구려를 공격하게 하는데 2차례의 승리에 도취된 동천왕의 착오로 인해 고구려는 결국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고 도성은 파괴된다. 이후 중천왕대에 왕의 아우들이 반역을 도모했다가 처형당하고 관나부인이 왕후를 참소하며 왕의 권위에 도전했다가 역시 목숨을 잃은 점 등을 보면 관구검에게 도성이 파괴된 이후, 내부적으로 혼란스러운 정국이 지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에 고구려는 요동 지역에 대한 끊임없는 진출을 모색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는데 결정적인 원인으로는 동천왕과 고구려 군사정책 입안자들의 판단착오가 가장 컸다고 할 수 있다.

 

고구려로서는 주적이자 시급한 격퇴 대상인 공손정권을 공격하는 것이 당시 적절한 선택이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공손정권은 전력적으로 고구려가 맞대응할 수 있는 상태였고 지정학적으로 화북의 통일정권인 위왕조와의 사이에서 완충 역할을 할 수 있었다. 반면 위왕조의 입장에서는 공손정권을 멸망시킬 경우, 2차적 과제는 당연히 고구려 제압이었다(윤명철 2003: 96). 그런 상황에서 장차 국경을 마주하게 될 위왕조에 대해 충분한 대안책을 고려하지 못한 것은 큰 실책이었으며 관구검 침입시, 2차례의 승리에 고무되어 경솔하게 소규모 부대만 이끌고 관구검과 정면대결을 펼쳐 격파당한 것 역시 큰 실책이었다.

 

그 결과, 고구려는 이전에 진출했던 혼하 상류유역에서 더 진출하지 못 한 채 다시금 기회를 엿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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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모용선비와의 대립

 

3세기 말까지만 해도 고구려의 서북 변경은 위왕조와 모용선비의 침입으로 불안했으나 4세기로 접어들면서 서북 변경의 정세는 고구려에 매우 유리하게 전개되기 시작했다. 4세기 초 중국에서는 ‘8왕의 난’이 일어나 서진이 망하고 이후 남북조시대라고 불리게 될 300년간의 혼란기가 찾아오게 된다. 그 사이 고구려는 311년 요동군 서안평을 점령하고 313~314년에는 낙랑군과 대방군까지 차지하였다. 또한 315년에는 요하와 혼하 사이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제3현도군까지 차지함으로써 고구려의 서변은 요하 유역까지 이르렀다(서병국 1997: 87-88).

 

이 무렵, 모용선비의 수장 모용외는 서진이 멸망하는 316년을 전후하여 유민 수만 명을 받아들여 대릉하 상류지역과 산해관 지역 일대에 4개 군을 신설함으로써 막강한 세력을 형성하였다(池培善 1986: 44; 千寬宇 1989: 105). 당시 중국 대륙에는 330년 수립된 후조가 황하 유역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으며, 그 북쪽에 위치한 모용선비의 전연과 유구 북방에서 대치하는 형세였다. 미천왕은 이 같은 양대 세력의 대립 상황을 전략적으로 이용하여 후조가 전연을 견제하는 동안 요동지역으로 세력을 확산시키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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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 따라 신성을 새로운 군사거점으로 삼아 군사력 확충에 박차를 가했으며 고국원왕 역시 신성을 중요하게 여겼다. 하지만 338년 후조를 제압한 전연은 고구려를 공격하였고 341년에는 요동반도 서쪽 해안지역의 평곽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천산산맥 이서의 평곽을 전연이 장악함으로써 고구려의 요동 진출은 번번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으며, 결국 모용황은 대군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침공하게 된다.

 

고국원왕 12년(342) 모용황이 정병 4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쳐들어 왔을 때, 고구려는 적군의 예상 침입로를 잘못 판단하여 참패를 당한 끝에 왕은 단기로 피신해야 했고 환도성은 함락되기까지 했다. 이때 왕모와 왕비를 비롯하여 5만여 명의 백성이 전연으로 끌려가고 고국원왕의 아버지인 미천왕의 무덤까지 파헤쳐졌다. 고구려는 작전의 융통성을 확보하지 못함으로써 연군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은 병력이 시간만 허비하는 遊兵化 현상을 초래했던 것이다(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05: 100).

 

이후 370년 전연은 새로 등장한 전진에게 멸망당하고 2년 뒤 전진과 고구려는 사절과 승려를 교환하면서 우호적인 관계를 맺는다. 하지만 384년 전진이 무너진 뒤 모용선비 정권인 후연이 등장하고 화북의 혼란을 피해 유주 · 기주 지방의 유민이 다수 고구려로 유입되기 시작한다. 고국양왕은 일단 385년 6월 4만군을 파견해 요동군과 현도군을 함락하지만 11월 모용농이 이끄는 대군에게 다시 요동군과 현도군을 빼앗긴다. 당시 백제를 상대로 예성강 일대에서 전쟁을 치루고 있던 고구려였기에 2개의 전선을 유지하기는 무리였을 것이다(李基東 2005: 293).

 

하지만 광개토태왕비를 보면 광개토태왕이 395년 비려를 정벌하고 말머리를 돌려 양평도를 지나 북풍 등지를 시찰했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북풍은 요동군 여덟현 중 하나로 이는 395년 이전에 고구려가 요동군을 차지했다는 반증이 될 것이다. 실제 405년 후연왕 모용희가고구려 요동성을 공격했다가 패퇴하는데 이를 통해 봤을 때 고구려가 요동군을 차지한 시기는 385~395년 사이로 보인다. 이처럼 405년 모용희의 요동성 공격을 격퇴하고, 406년에는 목저성 공격마저 격퇴함으로써 고구려는 요동지역을 완전하게 장악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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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가 건국된 지 400여 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요동지역은 고구려의 소유가 되었고, 이후 고구려는 요하 이서 지역까지 군사작전범위를 넓혀(김용만 2003: 350~354) 훗날 수 · 당이라고 하는 강력한 적의 침입에 맞설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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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지형에 따른 고구려 성곽 방어체계

 

요하 중하류일대는 길림합달령산맥 서남단을 기준으로 두 지역으로 세분된다. 길림합달령산맥 서남단 위쪽의 요하 중류지역에는 대흑산맥과 길림합달령산맥에서 발원한 구하, 청하 등이 동북~서남으로 흐르다가 동북대평원을 가로질러 요하로 유입된다. 이 지역에는 길림합달령산맥의 지맥이 요하 동안에 근접할 정도로 뻗어있기 때문에 각 지류는 대부분 동북대평원보다 길림합달령산맥 구간을 흐르게 된다. 특히 이 구간의 요하 본류는 철령을 중심으로 활처럼 휘어져 흐르고 있으며, 길림합달령산맥도 철령 부근에서는 요하 직전까지 뻗어있다. 이로 인해 철령일대는 요하 동안의 동북대평원 가운데 병목 구간으로서 요하 하류의 요동평원과 그 북쪽의 자연경계를 이루게 되었으며, 역사적으로도 자연적인 경계선으로 인식되어 왔다(孫進己·馮永謙 1989).

 

이 지역은 소지류와 야트막한 구릉을 통해 다른 지류 연안의 충적평지와 종횡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리하여 각 지류를 잇는 교통로를 비롯하여 길림합달령산맥을 가로질러 송화강이나 혼하를 거쳐 압록강 유역으로 나아가는 교통로가 많이 발달하였다. 특히 이 지역은 고구려발상지인 압록강 중류일대에서 요동평원을 거치지 않고 요하 상류 일대나 요서 지역으로 곧바로 진출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이기도 하다. 그리고 요서지역의 유목민족이나 요동평원의 중국세력이 송화강 유역으로 나아가는 중간지대이기도 하다.

 

길림합달령산맥 서남단 아래쪽의 하류지역의 경우 요하 중류지역과 뚜렷이 구별된다. 즉 혼하 · 태자하 중상류는 해발 500~1,000m의 산악지대로서 비교적 험준하기 때문에 하천 연안의 충적평지가 계속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분지를 이루며 단층적으로 발달되어 있다. 태자하 중상류의 경우, 상류에만 하곡평지가 발달되어 있고 중류는 하안단구로서 접근조차 힘든 형편이다. 반면 혼하 · 태자하의 하류구간은 비교적 긴 편으로서 동북대평원 가운데 요동평원이라는 대평원이 형성되어 있다.

 

즉, 요하 하류지역은 지형상 요동평원과 동부산간지대로 뚜렷이 구분된다. 이에 따라 요동평원에서 압록강 중류일대로 향하는 교통로나 천산산맥을 넘어 한반도로 나아가는 교통로는 아주 제한적으로 발달하였으며 요하 하류일대의 이러한 지형조건은 훗날 고구려의 성장에 큰 영향을 미쳤다.

 

현재 요하 유역의 고구려 성은 중하류의 동쪽 지역에서 주로 발견되고 있으며, 대평원지대보다 지류 연안의 하곡평지에 주로 분포되어 있다. 그 가운데 혼하와 태자하 유역에 가장 조밀하게 분포되어 있으며, 다른 지류 연안에는 대평원에서 하곡평지로 진입하는 길목 곧 대평원과 산간지대의 접경지역에 자리 잡고 있다. 이러한 분포현황은 고구려사의 전개과정 특히 군사방어체계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余昊奎 1999a: 15-17).

 

1. 혼하 · 태자하 중상류의 산간지대

 

이 지역에서는 현재까지 평지성을 포함하여 20기가 넘는 고구려 성이 확인되었는데 소형성보를 제외하면 대체로 하천 연안로를 따라 축조되어 있다.

 

요동평원과 압록강 중류일대를 왕래하던 주요 교통로였던 혼하~태자하 연안로를 살펴보면, 하류방면에서 요동평원과의 접경지역인 무순에 고이산성, 소자하 · 혼하 합류지점으로 소자하로 진입하는 길목에는 철배산성, 소자하 · 혼하 합류지점~목기진 사이의 전략적 요충지인 득승보댐 일대에는 오룡산성, 소자하 하류 방면의 양안이 협소해지는 목기진 일대에는 하서촌고성, 환인 동북로와 서북로가 갈라지는 영릉진 일대에는 영릉진고성과 이도하자구노성 등이 각각 자리 잡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태자하 중상류에서도 나타난다. 즉, 태자하 양안의 연안로를 따라 하류방면에서부터 유관산성→하보산성→태자성→채송산성 등의 순으로 위치해 있다(田中俊明 1997: 35-37).

 

이 지역의 고구려 성이 하천 연안로를 따라 분포한 것은 지역특징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혼하~소자하 연안로는 고구려 초 이래 압록강 중류 일대와 요동지역을 잇던 가장 중요한 교통로였는데, 고구려는 현도군 등 중국 세력과 각축을 벌이면서 이 일대로 진출하였다. 1세기 말~2세기 초경에는 혼하 방면의 제2현도군을 몰아냈으며, 3세기 후반부터는 혼하 일대 진출을 적극적으로 실시하여 요동평원과의 접경지대인 무순 일대를 장악하였다. 그렇지만 4세기에도 여전히 전연과 요동지역을 놓고 치열한 각축전을 벌였으며, 342년에는 혼하~소자하로를 통해 진공한 전연군에게 수도를 함락당하기도 했다(余昊奎 1995; 田中俊明, 金希燦(역) 1999).

 

이에 고구려는 신성을 비롯하여 남소성, 목저성 등을 축조하고 지배력을 공고히 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성은 기본적으로 전연 등의 침공을 방어하고 요동으로 진출하기 위한 전초기지, 곧 군사거점의 성격이 강하였다. 그리하여 이 일대의 성은 혼하~소자하 연안로의 전략적 요충지에 축조되었고, 군사방어 기능이 우선시됨에 따라 철배산성과 같은 산정식산성, 포곡식산성이라도 오룡산성처럼 산간형 또는 고이산성처럼 산간형 · 돌출형의 과도기 형태인 산줄기형이 축조되었다.

 

이러한 산성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군사방어 기능에만 치중했던 압록강 중류일대의 산성식산성들과 달리 점차 포곡식으로 전환되었다. 태자성 내성과 외성이 성돌 · 옹성구조 등에서 뚜렷이 구별되며 상이한 시기에 축조되었다는 견해(無順市博物館 1992: 322-323)는 이러한 점에서 유의할 필요가 있다. 태자성 내성은 산정식이며, 외성은 포곡식이다. 따라서 내성과 외성이 다른 시기에 축조되었다면 이는 성의 기능 변화와 관련될 가능성이 높다. 즉, 산 정상부에 군사방어시설로 내성을 축조하였다가 지방통치조직이 정비되면서 계곡과 완만한 경사지를 포괄하여 지역지배를 위한 거점성으로서 외성을 축조하였다고 추정된다(林起煥 1998: 94-95).

 

이 지역의 성들은 石城이 비교적 많은 편인데, 석성은 대체로 낭떠러지나 절벽을 끼고 있어 지세가 험준하며 이를 천연성벽으로 이용하기도 한다. 즉, 지형이 험준하면서 석재를 구할 수 있는 지역이면 어느 곳이든 석성을 구축했음을 알 수 있다. 석성이 토성이나 토석혼축성보다 일찍 출현하였고, 특히 토축성벽은 4세기 이후(辛占山 1994: 34-37) 또는 요동평원 진출 이후(李殿福 1994: 220-222)에 비로소 축조하였다고 보기 때문에 시기적으로 이 지역의 성들이 이른 시기에 축조되었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이 혼하 · 태자하 중상류 일대의 산성은 기본적으로 국내성을 중심으로 하는 압록강 중류일대를 방어하기 위한 목적에서 축조되었다. 이들은 혼강 우안의 흑구산성, 마안산성 등과 상호 연계되어 4세기 전반 국경지대에서 수도에 이르는 입체적 군사방어체계를 구성하였다(余昊奎 1998). 그리고 645년 국내성과 신성의 군사 4만을 동원하여 요동성 구원에 나선 것이나 666년 남생이 당에 투항할 때 당군이 남소성을 비롯하여 목저성, 창암성 등을 차례로 격파한 다음 국내성에 웅거하고 있던 남생과 회합한 것을 보면 혼하~소자하 연안로의 군사방어체계는 고구려 멸망시까지 유지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혼하 · 태자하 중상류 일대에는 소형성보가 많이 분포되어 있다. 이러한 소형성보는 소자하 연안의 경우 영릉진고성 · 이도하자구노성, 혼하 연안의 경우에는 노동공원고성 · 고이산성을 중심으로 분포되어 있다. 이를 통해 봤을 때 혼하~소자하 일대에서 가장 중요한 요충지인 영릉진과 무순 일대에 지역거점성을 중심으로 하는 위성방어체계가 구축되었음을 의미한다. 667년 당의 이적이 신성을 함락시킨 다음 주변의 16성을 한꺼번에 격파하였다는 것은 이러한 위성방어체계를 반영하는 기록이라 하겠다(권오중 2005: 38).

 

2. 요하 하류~천산산맥과 요동평원

 

이 지역에는 10기 가량의 성이 분포하고 있다. 고구려가 요동평원을 완전히 장악한 것은 대체로 4세기 말~5세기 초이기 때문에 이 지역의 성들은 고구려가 요동지역을 완전히 장악한 5세기 대에 구축되었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盧泰敦 1996). 문헌자료상 이 지역의 성은 주로 7세기 전반 고-수, 고-당 전쟁에 등장하지만 백암성은 547년 신성을 수축할 때 함께 개축하였으며 551년에는 돌궐의 공격을 받기도 했다. 이는 백암성이 6세기 중반 이전에 축조되었음을 보여주며 안시성으로 비정되는 영성자산성에서는 5세기 중후반으로 편년되는 적갈색 연운문와당편이 출토되기도 하였다(林植樹 1994: 55).

 

둘레 2.5㎞인 영성자산성은 5㎞에 이르는 고려성산성(건안성으로 추정)에 비해 규모상 작을 뿐 아니라 지방제도상으로도 한 단계 아래였다. 그러므로 고려성산성을 비롯한 이 지역의 주요 산성은 늦어도 영성자산성이 축조되는 시기에는 축조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고구려의 요동진출 시기, 영성자산성의 축성시기 등을 고려한다면 이 지역의 대체로 5세기 중반을 전후하여 동시에 축조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는 이 지역의 성이 일정한 계획 아래 구축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들 성은 요하 도하로 및 요동평원에서 천산산맥을 넘어 압록강 일대로 향하는 교통로와 밀접한 연관관계가 있다. 요하 도하로는 세 갈래가 있는데(王綿厚·李建才 1990: 140-152) 북로를 통해 요하를 도하한 다음 번양을 거쳐 천산산맥으로 나아가는 길목에는 심양 탑산산성과 본계 변우산성이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중로를 도하한 다음 천산산맥으로 진입할 경우에는 북쪽의 요양이나 남쪽의 해성을 통과하는 두 루트가 있는데, 북쪽에는 요동성, 백암성, 고수산성이 남쪽에는 영성자산성이 있다. 그리고 남로를 도하하여 천산산맥으로 나아가는 루트에는 영성자산성을 비롯하여 마권자산성, 고려성산성 등이 위치하였다.

 

또한 이들 성은 요동평원에서 천산산맥을 넘어 압록강 일대로 향하는 교통로와도 밀접한 연관관계가 있다. 먼저 본계~봉성로의 북쪽 진입로인 심양~본계로에는 탑산산성과 변우산성, 요양~본계로에는 요동성, 백암성, 고수산성이 각각 위치하고 있다. 그리고 해성~수암로의 길목에는 영성자산성, 개주~장하로의 길목에는 고려성산성이 각각 위치하였으며 대청하에서 수암으로 나아가는 산간로 입구에는 마권자산성이 위치하고 있다.

 

이처럼 이 지역의 성은 요하를 건너 요동평원을 거쳐 천산산맥을 횡단하여 압록강 일대로 나아가는 각 교통로의 전략적 요충지에 위치하였다. 고구려는 5세기 이후 요하와 요동평원에서 중후기 수도인 평양성으로 향하는 교통로에 튼튼한 요새를 구축하였던 것이다. 요하하류~천산산맥 구간의 고구려 성은 기본적으로 중후기 수도인 평양성을 방어하기 위해 축조된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이들 성을 고구려 서북방어체계의 전연방어성으로 파악한 북한학계의 견해는 경청할 만하다(사회과학원 력사연구소 1979: 122-130).

 

천산산맥 횡단로에는 진입로 입구뿐 아니라 초하연안(본계~봉성로), 대양하연안(해성~수암로), 벽류하연안(개주~장하로) 등 동남방면에도 성곽이 조밀하게 분포되어 있다. 이는 전연방어성과 종심방어성이 유기적으로 연관되어 국경지대에서 수도에 이르는 지역에 입체적 군사방어체계를 구축하였음을 의미한다. 즉, 요하하류~천산산맥의 성은 국경지대에서 중후기 수도인 평양성에 이르는 입체적 군사방어체계의 일부로 구축되었으며, 그 가운데 전연방어성의 기능을 지녔던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따라서 요하하류~천산산맥의 성은 전연방어성 상호간에, 또 후방의 종심방어성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입체적 군사방어체계를 구성하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실제 645년 당 태종이 백암성을 함락하고 안시성을 공격하기에 앞서 이적에게 군사 방어력이 견고한 안시성보다 미약한 건안성을 먼저 공격할 의사를 비추자 이적은 안시성을 건너뛰어 곧바로 남쪽의 건안성을 공격했다가 북쪽의 요동성과의 보급로가 끊기게 될 것을 우려해 반대했다. 또한 당에 투항한 고연수 · 고혜진이 오골성을 거쳐 곧바로 평양성으로 진격하자고 건의하자 장손무기는 오골성으로 곧바로 향하면 건안성, 신성의 고구려군이 배후를 공격할 것을 우려하여 역시 반대하였다.

 

645년 고구려를 침공하였던 당군이 각 성을 차례로 함락시키지 않고 당 태종의 말처럼 어느 성을 건너뛰어 다른 성을 공격하거나 고연수 · 고혜진의 건의처럼 진입로 입구에 위치한 성을 함락시키지 않고 곧바로 압록강 일대로 진격할 경우에는 보급로를 차단당하거나 배후에서 기습공격당할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그리하여 당군은 세 갈래의 요하 도하로를 통해 요동평원으로 진공한 다음, 이적이나 장손무기의 말처럼 개모성 → 마미성 → 요동성 → 백암성 → 안시성 등 위쪽 루트에 위치한 성부터 차례로 함락시킨 다음 압록강 일대로 진격하는 전술을 구사하였다(余昊奎 1999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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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 지역의 성들은 대부분 충적평지 방향으로 뻗어 나온 산줄기의 끝자락에 위치한 돌출형 포곡식산성이다. 산성 내부에는 평탄한 대지가 비교적 넓은 편이며 성벽 안쪽의 산비탈에는 계단식 대지를 많이 조성하였다. 영성자산성의 경우 둘레 2.5㎞로서 비교적 대형 산성에 속하는데 산성 내부에는 골짜기를 따라 평탄한 대지가 넓게 자리 잡고 있으며, 산등성이 안쪽의 완만한 경사면에는 계단상 대지를 조성하여 주거용 공간을 최대한 확보하려고 노력하하였다. 개주 고려성산성도 총둘레 5㎞를 넘는 초대형 산성이면서 내부에는 아주 넓은 평지가 펼쳐져 있다.

 

따라서 이 지역의 산성은 군사방어뿐 아니라 지방 지배를 위한 거점성으로서 지류 연안의 충적평지 일대를 관활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더욱이 건안성의 전신인 평곽에는 한대에 ‘鹽官’과 ‘鐵官’이 설치되었다고 하는데, 고려성산성 앞쪽에 요동만이 있다는 점을 상기하면 고구려 때에도 주변 일대의 소금과 철을 총괄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3. 요하 중상류~길림합달령산맥

 

이 지역에서도 10여기의 성이 확인된다. 성은 대부분 포곡식 산성으로 하천연안의 충적평지로 뻗은 산줄기의 끝자락에 위치한 돌출형의 비중이 높다. 이 지역의 성은 대략 세 지역으로 나누어진다. 먼저 동북대평원에서 범하, 구하 등 지류연안으로 진입하는 길목에 위치한 석대자산성, 최진보산성, 청룡산고성, 마가채산성, 용담사산성 등이다. 다음으로 길림합달령산맥 방면으로 40~50㎞ 정도 들어온 지점의 개원 고성자산성과 서풍 성자산산성 등이 있고 마지막으로 동요하의 발원지인 요원지구의 용수산성, 공농산성, 성자산산성 등을 들 수 있다.

 

그런데 특이하게 이들 각 성의 입지조건이나 축성방식이 지역마다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어 주목된다. 먼저 서풍 성자산산성의 경우 토축 혹은 토석혼축이 아닌 석성이며 자연절벽을 천연성벽으로 삼기도 했다. 입지상으로도 돌출형이 아닌 산간형인데 이는 압록강 중류일대의 초기 산성에서 많이 확인된다. 특히 서문의 어긋문식 옹성은 국내성이나 오녀산성에서 확인되는 초기 옹성으로 분류되며, 남벽의 방형구멍도 초기 산성에서 주로 확인된다.

 

더욱이 이 지역의 산성이 충적평지에서 곧바로 산성으로 진입할 수 있는 반면, 성산자산성은 골짜기를 따라 깊숙이 들어온 다음 진입해야 한다. 또한 다른 산성은 둘레가 1~2㎞의 중형 산성임에도 불구하고 내부에 평탄한 대지가 비교적 넓고 산비탈에 계단상 대지를 많이 조성한 반면, 성자산산성은 둘레 4㎞의 초대형산성임에도 평지가 협소하고 산비탈도 가파르다. 이에 산성 서쪽의 골짜기에 둘레 5㎞에 달하는 외위성을 축조하였는데 토성으로서 본성보다 늦은 시기에 축조되었다.

 

이러한 사실들은 성자산산성이 상대적으로 이른 시기에 군사 방어적 목적에서 축조되었다가 지방 지배를 위한 거점성의 기능을 강화하였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현상은 철령 최진보산성에서도 유사하게 확인되는데 이를 통해 봤을 때 최진보산성 역시 상대적으로 이른 시기에 축조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하겠다.

 

특히 성자산산성과 최진보산성은 지리위치상으로도 유사한 측면이 발견된다. 성자산산성은 연반하 상류를 따라 길림합달령을 횡단한 다음 휘발하를 통해, 최진보산성도 범하 상류를 따라 길림합달령을 횡단한 다음 혼하-소자하를 거쳐 각각 압록강 중류일대로 진입할 수 있다. 성자산산성과 최진보산성은 압록강 중류일대에서 요동평원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요하 중상류일대로 진출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에 위치한 것이다. 즉, 요하 중상류일대의 산성이 대체로 지류 연안으로 진입하는 길목을 방어하기 위해 구축된 반면, 이들은 압록강 중류일대에서 휘발하나 혼하를 거쳐 요하 상류로 나아가는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해 축조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성자산산성과 최진보산성은 고구려가 요하 중상류 일대로 진출한 초기에 축조된 것으로 짐작된다. 다만 1세기 중반에 선비족의 일부를 복속시켰고, 2세기 전반에는 선비족과 연합하여 한군현을 공격한 것으로 보아 선비족의 본거지인 서요하 일대로 나아가는 중간지대인 이 지역과 일찍부터 관련을 맺었다고 파악된다. 특히 333~336년경 전연의 내분을 틈타 길림방면의 부여지역을 점령하였고, 346년에는 옛 부여지역으로 침공한 전연군을 물리친 것을 보면 4세기 중반에는 북류 송화강 일대와 함께 요하 중상류 일대를 장악하였다고 추정된다. 따라서 성자산상성과 최진보산성은 고구려가 요하 중상류일대로 진출하던 초기에 군사방어성으로 축조하였다고 추정할 수 있다.

 

이처럼 산간형 · 산줄기형 포곡식산성인 성자산산성과 최진보산성이 이른 시기에 축조되었다면 지류 연안의 진입로에 위치한 돌출형 포곡식산성은 이 일대에 대한 지배권을 어느 정도 확보한 다음에 축조된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그리고 축성법, 입지조건, 공간구성, 분포양상 등이 요하하류 천산산맥과 요동평원 일대의 산성과 유사하다는 점에서 비슷한 시기에 유사한 목적에 의해 축조되었을 가능성도 높다. 즉, 지류 연안으로 진입하는 길목을 봉쇄하는 군사방어적 성격과 아울러 지류연안 일대를 지배 · 관할하는 거점성의 기능을 지녔던 것이다. 더욱이 요하 하류보다 중상류의 지류 연안에 충적평지가 더 많이 발달되어 있다는 점에서 지방지배를 위한 성격이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Ⅳ. 결론

 

위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요동지역의 방어체계는 지역별로 다양한 양상을 보인다. 혼하 · 태자하 일대의 방어체계가 전기 수도인 국내성을 중심으로 구축되었다면 요하하류~천산산맥의 방어체계는 중후기 수도인 평양성을 중심으로 구축되었다. 그리고 요하 중상류~길림합달령산맥의 방어체계는 양자가 복합되어 있음을 확인하였다.

 

더욱이 요하 중상류에서 압록강 중류 일대로 향하는 길목에 위치한 성자산산성이나 최진보산성은 혼하 중상류의 성과 하나의 방어체계를 구축하고 있으며, 중상류의 각 지류연안으로 진입하는 길목에 위치한 산성은 요하~천산산맥의 성들과 함께 대흑산맥에서 천산산맥 서남단에 이르는 산성방어선을 이루고 있다. 요하 유역의 고구려 성은 동북대평원에서 대흑산맥~천산산맥의 지류연안을 통해 고구려 중심부로 나아가는 모든 진입로를 차단하면서 입체적인 군사방어체계를 구축하고 있는 것이다.

 

고구려가 입체적 군사방어체계를 운용하던 양상은 7세기 전반 고-수, 고-당 전쟁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특히 645년 당군이 세 갈래의 도하로를 통해 요하를 건넌 다음 천산산맥 횡단로의 입구를 위에서부터 차례로 공략하던 전황은 요하~천산산맥 일대의 교통로 상에 구축된 고구려의 입체적 군사방어체계가 어떻게 작동하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또한 648년 당군이 해로를 통해 압록강 하구를 침공하자 오골성, 안시성의 군사를 동원하여 구원한 사실은 전연방어성과 종심방어성과의 유기적 연관관계를 잘 보여준다.

 

특히 650년 이후 당군은 신성을 집중적으로 공격하였으며, 666~668년 당군의 최종 군사작전시에는 신성이 함락되자 각 방면의 성들이 순식간에 함락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는 신성이 요동지역 군사방어체계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어떠한지를 잘 알려주는 일이라 하겠다. 요하 하류와 요하 중상류, 그리고 동북대평원과 동부 산간지대 등의 접경지역에 위치한 신성은 요하 유역의 군사방어체계를 유기적으로 연관시키는 핵심 연결고리였던 것이다. 그리고 신성은 시기적으로도 요동평원과의 접경지역에 축조된 최초의 산성으로서 초기 방어체계를 중후기 방어체계로 전환시켜주는 매개고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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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고구려 후기 성곽 방어체계를 논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바로 천리장성의 존재일 것이다. 631년부터 16년간 당왕조와의 전쟁에 대비해 쌓았다고 알려져 있는 천리장성은 그간 만리장성과 같은 방벽의 개념으로 이해되어 왔다(여호규 2000: 184-191, 신형식 2000b: 71). 하지만 천리장성은 정작 고-당 전쟁시 그 존재가 확인되지 않는다. 이에 대해 천리장성이 방벽의 개념이 아닌 보축 작업한 여러 성들이 유기적인 입체적 군사방어체계를 형성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어 주목된다(김용만 2003: 57-68). 실제로 고구려 내부에서는 고-수 전쟁 이후 천산산맥을 횡단하는 교통로를 강화할 필요성을 느꼈으며, 당왕조가 고구려의 전승기념물인 경관을 헐어버리자 곧바로 위협을 느끼고 천리장성을 축조하기 시작한다.

 

이후 이러한 고구려의 성곽 방어체계는 당군의 세 차례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아냈다. 3차 고-당 전쟁 때 동원된 당군의 규모는 무려 100만에 육박했으며 부여성 및 주변의 40여성이 함락되고, 신성 및 주변의 16개성이 함락됐음에도 고구려군 15만은 여전히 요동성, 안시성, 건안성에서 당군의 공격을 막아내고 있었다. 만약 천리장성이 만리장성과 같은 방벽으로 이뤄졌다면 이런 식의 저항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고구려 멸망 후에도 당왕조에 항복하지 않은 성들이 존재한 것 역시 천리장성이 여러 성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된 입체적 군사방어체계였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고구려가 요하유역으로 끊임없이 진출하면서 점령지역에 축조하기 시작한 성들은 고구려가 요동지역을 안정적으로 차지한 이후에는 일관된 입체적 군사방어체계에 맞게끔 보축되기도 하고 증축되기도 하는 등 지속적인 변화가 있었다. 고-수 전쟁 이후 16년이라는 오랜 기간에 걸쳐 천리장성이 완성되면서 고구려의 성곽 방어체계는 완비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여러 차례 승전으로 인한 고구려 군사정책 입안자들의 경직된 전략 판단은 당군의 새로운 전략에 발 빠르게 대응하지 못 하는 결과를 가져왔고, 결국 총체적인 국력 저하로 고구려는 멸망했다고 할 수 있다(김용만 2003: 318-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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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뿌리아름역사동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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