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용글들

유중광. 그를 기억하며.

영양대왕 2008. 1. 5. 11:57

홍하상 이란 분이 쓴 글인데, 일본관련 전문가 인듯하다.

 네이버에 블러그에서 퍼왔다. 내가 찾는 유중광에 대한 자료라서 인용해왔다.

 

 

<가업 1400년, 금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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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읽기 전에

 

제1장:일본, 백제인의 나라

 

1. 상인의 도시, 오사카

2. ‘사천왕사 왔소이’ 축제를 보다.

3. 사천왕사 주지와의 만남

4. 금강조를 찾아가다

5. 금강조 사장 금강리융씨와의 첫만남

6. 5년간의 연하장

7. 금강조의 초대를 받다.

 

제 2장 49년간의 불교 전쟁

 

1. 불제자, 성덕태자

2. 백제계 소가집안과 가야계 모노노베 집안의 전쟁

3. 승군사의 승리.

4. 백제에서 불상 2구가 건너오다

1) 매림사 2)세토내해

5. 향원사의 화염

6. 백제 기술자, 네사람

7. 사천왕사가 완공되다

1) 사천왕사의 모델은 부여의 정림사

2) 눕힐 것은 눕히고 세울 것은 세워라

3) 바른 쌓기와 들여쌓기

4) 기와입힘은 잔물결이 치는 것처럼.

5) 좋은 기와를 쓰면 반드시 좋은 작품으로 보답한다.

(부처님이 사실 집이다. 천년, 만년이 지나도 문제가 없어야한다,

좋은 집을 지어라.)

6) 나무를 3년간 말리다. 연기를 쐬라.

(3년간 말리면 톱이 들어가지 않는다)

7) 찬곳에서 자란 나무.

-보이는 곳보다 보이지 않는 곳에 더 신경을 써라.

8) 마지메(진면목)와 키조멘

 

8. 법륭사로 간 세사람의 기술자

 

 

제3장 금강조에서 보낸 16일

 

1. 섣달 그믐날의 오사카

2. 설날의 일본풍경

3. 궁대공과의 신년의식

4. 신년하례식

5. 사천왕사의 져나시키

6. 사카이시의 가토 구미

7. 금강조가 흔들리면 일본이 흔들린다.

 

1)금강조의 건축기술

2)아키이시의 계광원

3)평등원은 일본 건축의 모델.

4)금강조 건축현장의 방문

 

 

제4장 금강조 집안 39대의 역사

 

 

1.1대에서 39대까지

2.중일전쟁-관을 짜서 팔다.

3.37대 금강치일대의 자결

4.금강치일의 부인의 소복.

5.금강조의 재건

6.40대 금강정화씨

7.요즘의 금강조.

8.금강집안과의 이별

 

제5장 금강조와 일본의 노포

 

1.일본의 기술중시정신

2.일본의 노포 50곳

 

 

<본문>

 

가업 1400년, <금강조>

 

<금강조와의 만남>

 

한 해도 다 저무는 12월의 마지막날, 출장이 걸렸다.

해외 출장이 빈번한 직업이긴 하지만, 한해를 마감하는 마지막 날에 출장을 떠나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출장지는 일본 오사카. 일정은 15박16일이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짐을 꾸렸다.

양말 하나, 팬티와 런닝셔츠가 각각 하나, 작업복 한벌, 취재용 노트 한권을 넣고, 벨트에 손아귀에 들어오는 작은 카메라를 찼다.

짐은 가급적이면 가볍게, 카메라는 언제든지 속사권총처럼 꺼내서 찍을 수 있는 위치에 있어야한다. 가방을 들고 집을 나섰다.

방학이 되면 제 아빠와 한바탕 놀아보리라는 기대에 잔뜩 부풀어 있는 늦동이 초등학교 1학년짜리 아들이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오늘 떠나면 해가 바뀌어 돌아오게 되리라.

낮 12시49분. 00000000000000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현해탄이라는 작은 개울을 건너, 단숨에 오사카 시내로 들어갔다.

 

일본 출장은 이번까지 줄잡아 23회. 오사카 또한 자주 다니던 곳이었다. 한창 시절 오사카에 자주 올 때는 한달 걸러 건너와 보름씩 체류하다간 빠져 나가곤 했었다. 그러나 최근 4년 동안은 오사카에 오질 못�다.

유럽 쪽에 출장이 자주 걸려 그쪽으로 한 번 발을 디뎌 놓다보니 모든 출장이 이상하게도 그쪽으로만 연결되었다.

오사카는 4년만이다. 94년 11월 오사카 최대의 축제 <사천왕사 왔소이> 마쓰리 취재 이후엔 처음이다.

오후 6시반, 오사카 시내 중심가인 천왕사구의 긴테쯔(近鐵)호텔 커피�.

약속시간이 되자 정확하게 주식회사 금강조(金剛組)의 요시가와(吉川.62)차장이 나타났다.

160센티가 될까말까한 작은 키, 성실과 근면으로 무장한 이 노익장과는 4년만의 만남이다.

요시가와씨가 한눈에 나를 알아보고 다가왔다.

불과 4년만인데, 요시가와 차장은 참 많이 늙었다. 주름살과 흰머리가 이전보다 부쩍 늘었다.

근황을 물어보니 작년에 차장으로 정년 퇴직했고, 지금은 계약직 사원으로 1년마다 계약을 연장하고 있다고 했다.

대학 졸업 후 금강조를 첫 직장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해 36년간 일하다가 차장으로 정년퇴직한 요시가와 씨.

그의 흰머리가 부쩍 늘고, 주름살이 많아진 이유가 거기에 있다고 나름대로 생각했다.

그를 만난 건 4년전인 1994년 11월이었다.

당시 나는 사천왕사를 취재하다가 그곳의 주지스님으로부터 아주 신기한 얘기를 하나 듣게 되었다.

사천왕사가 지어지기 시작한 것은 서기 593년부터인데, 그 당시 일본에는 절을 지을만한 기술자가 없어 일본의 성덕태자(574-622)가 백제로부터 기술자를 초청했다는 것이었다. 사실 이런 얘기야 수도 없이 들어온 터라 신기할 것도 없었지만 그 다음 얘기가 귀를 솔깃하게 했다.그때 건너온 기술자 중에 금강중광(金剛重光)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집안이 오늘날까지도 사천왕사의 건축물을 보수관리한다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사천왕사가 지어진 후 14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금강집안은 사천왕사를 위해 일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당시 금강중광에게 사천왕사가 세세천년 영구히 불법을 떨칠 수있도록 명령한 사람은 성덕태자였다. 금강중광은 그 약속을 성실하게 지켰고 그것은 세세천년 그 자손에게 계승되어 오늘날까지 사천왕사의 건물을 보수관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놀라운 일이다.

현대를 신용사회라고 얘기하지만, 어제 한 약속과 오늘 한 약속이 다른 일이 비일비재한 판에 무려 1400년간 그 약속을 지키고 있다는 것은 전 세계 어디에서도 그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것이었다.

주지스님에게 지금 금강집안이 어디에 살고 있느냐고 물었다.주지는 금강집안은 오늘날 사원건축 전문회사가 되었고 그 명칭도 <금강조>라고 바뀌었다고 가르쳐주었다. 주식회사 금강조는 사천왕사 서문에서 단 50미터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대로변에 있는 5층짜리 자그마한 빌딩.

그때 그 회사를 찾아가서 제일 먼저 만난 사람이 바로 요시가와차장이었다. 그에게 사장을 인터뷰하고 싶으니 면담을 할 수있도록 주선해달라고 부탁했었다. 요시가와 차장은 내 얘기를 면밀히 들은 후 면담의 목적, 동기, 질문 내용 등을 자세히 물어왔다. 손님에 대한 예의를 지키면서도 냉정하고 객관적인 입장에서 용건의 진의를 묻는 것이었다.

당시 요시가와씨의 보고로 나는 그로부터 사흘 후에 금강조의 39대 사장인 금강리륭(당시 70세)씨를 만날 수 있었고 그로부터 3시간 동안 금강조 집안에 대한 얘기를 들을 수있었다. 면담 말미에 나는 앞으로 금강조 집안에 관한 책을 한 권 쓰고 싶은 데 허락해 줄 수 있냐고 물었다.

금강리융 사장은 그 문제는 그때가서 얘기하자며 즉답을 피했다.

그로부터 4년간 나는 금강리융사장에게 연하장을 띄웠다. 물론 요시가와씨에게도 연하장을 보냈다. 때로는 아주 장문의 편지로 그들과의 관계가 끊어지지 않도록 나름대로 관심을 환기시켰다.

이번에 출장을 오게 된 배경은 금강조 집안에서 취재를 허락한다는 결정이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헌데 그 시기가 연말연시로 잡히게 된 것은 그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즉 해마다 년초가 되면 금강조 집안에서는 1400년간 해 오던 전통의식이 있었고, 그것을 취재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그들 나름대로의 배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요시가와씨와 나는 아사히 생맥주를 한잔씩 마시면서 스케쥴을 하나하나씩 검토해나기 시작했다.

그와의 협의가 끝나자 어느새 창밖은 캄캄한 어둠이 깔려 있었다. 그는 내일 보자며 집으로 돌아갔다. 나는 그를 현관까지 배웅해주고 방으로 돌아갔다. 샤워를 마치고 나는 일본 사람이 목욕 후에 입는 유카다를 걸친 채 침대에 벌렁 누웠다. 그리고 4년 전 사천왕사의 주지가 들려준 이야기를 떠올렸다.

 

 

<천하의 부엌, 오사카>

 

오사카를 ‘천하의 부엌’이라고 한다.없는 물건이 없고 일본의 모든 물산이 오사카로 집하되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오사카가 천하의 부엌이 된 것은 1590년대 이후이다. 즉, 임진왜란을 일으킨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천하를 평정한 후 일본의 경제력을 장악하기 위해 전국에서 생산되는 쌀, 생선, 채소를 모두 오사카에 끌어모았기 때문이다.

“먹다가 망한다.”

라는 말은 오사카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표현이다. 음식의 종류도 다양하거니와 천하의 물산이 모이다 보니 그만큼 음식의 가지수도 많았다는 말이 된다. 오사카 사람들은 먹다가 망할 정도로 먹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천하의 부엌이란 별명이 붙여졌다.

오사카의 역사는 길다. 대체로 추정컨대 AD 2-3세기경부터 오사카라는 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바로 그 시기에 오사카에 건너온 사람들은 백제의 이주민들이었다. 오사카에 백제의 이주민이 거주하기 시작했다는 기록이 역사적으로 나오기 시작한 것은 AD 4-5세기 경부터이다. 그무렵부터 백제인들의 일본 내의 이주가 활발해졌다. 백제의 무령대왕이 일본에서 태어난 일본에서 청년시절까지 보낸 후 다시 백제로 돌아와 왕에 즉위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왜 그가 태어나서부터 20살이 될 때까지 일본에 살았는지는 아직도 역사의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오사카에 백제인들이 많이 살게 된 것은 오사카에서 전철로 불과 1시간 정도 떨어진 오늘날 나라시의 아스카라는 마을이 바로 백제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살기 시작했던 마을이기 �문이다. 백제인들은 부여에서 백마강을 따라 내려가 무안 앞바다를 지나 전라남도 다도해 해안을 끼고 다도해 해협을 건넜으며, 일본 큐슈와 시모노세끼 사이의 해협을 통과하여 세토내해로 들어갔다. 세토내해의 200여킬로에 이르는 긴 항해가 끝나면 그 종착역이 바로 오사카 항이다. 그들은 오사카 항에서 배에서 내려 도보로 나라현의 아스카 마을로 걸어갔다. 이것이 고대 일본 국도 1호이다.

오사카 항은 바로 그 무렵부터 번성하기 시작한다. 오늘날 오사카에 대표적인 마쓰리(축제)인 “사천왕사 왔소이”라는 행사는 바로 그 무렵 백제인들이 부여를 출발, 오사카에 도착한 것을 환영하기 위한 행사를 재현한 것이다.

백제인들이 목숨을 걸고 보름 간에 걸친 긴 항해를 마치고 오사카항에 들어오면 미리 와서 살고 있던 백제의 선주민들이 거리에 나가 그들을 환영했다.

거친 바다의 풍랑을 이기고 일본의 오사카까지 건너온 백제 사람들은 육지에 도착한 기쁨을 “왔소이, 왔소이”라고 외치며 표현했다. 배에서 내린 백제인의 행렬이 “왔소이, 왔소이”라고 외치면서 거리를 지나갈 무렵, 백제의 선주민들은 그들을 소리를 지르며 환호해주었다.

그렇게 시작된 백제와 오사카의 역사는 서기 660년 백제가 패망할 때까지 이어진다.

<지명은 역사의 화석>이라는 말처럼 오늘날 오사카 시내 곳곳에 남아있는 지명에는 백제인의 흔적이 지금도 여전히 존재한다.

백제강, 백제교. 백제소학교, 백제역 등.

오사카 시내에는 백제라는 수식어가 붙는 강과 다리, 기차역, 학교 등의 명칭이 있다. 그 옛날 백제인들은 나라현의 아스카 군에 주로 모여 살았지만, 오사카 시내의 히라노(平野町)와 같은 곳에도 많이 모여 살았다.

그만큼 고대 백제와 일본의 관계는 깊다. 아니 깊은 것이 아니라, 극단적으로 말하면 과거의 오사카, 나라현은 백제의 분국 혹은 식민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가 <사천왕사 왔소이> 축제를 처음 본 것은 1994년 11월 3일이다. 그날 대가람 사천왕사 경내에는 거대한 무대가 설치되고 휘황찬란한 조명이 대낮처럼 불을 밝히고 있었다. 무대 위에서는 한국, 일본, 인도네시아, 아프리카 등에서 초청된 타악기 주자들이 연주를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창을 하는 지성자 여사가 장고를 들고나와 강강수월래를 불렀다. 지성자의 유장한 강강수월래. 지성자는 장고채로 장고를 치면서 강강수월래를 불러나갔다. 밤하늘에 그녀의 창소리가 퍼져나갔다. 지성자는 점차 빠르게 강강수월래의 템포를 높였고, 수천명의 관객은 그 광경을 숨소리도 내지 못하고 넋이 나간 채 바라보고 있었다.

한국과 일본에서 참가한 단원들이 백제의 왕과 귀족으로 분장을 하고 가마를 탄 채 장장 2킬로미터에 달하는 행렬이 되어 오사카 시내를 활보하고 있었다. <사천왕사 왔소이>축제는 고대 백제의 행렬이 선진 문물을 싣고 백제에서 건너와 사천왕사로 들어갔던 것을 재현한 것이다. 그만큼 사천왕사와 고대 백제의 관계는 깊다.

 

 

오늘날 포항 지방의 속담에

“왜 가는 배갔다.”

라는 말이 있다. 때로 몰려다닌다는 표현이다. 그 말 뜻은 과거 1,2천년 전에는 일본으로 배를 보낼 때 배와 배 사이를 밧줄로 연결하여 10척 20척 씩 한꺼번에 건너갔다는 것이다. 당시 조선 기술은 매우 열악하였으므로 불과 3-40톤 짜리의 목선으로 거친 풍랑을 헤치고 일본까지 도달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3-40톤 규모의 목선을 밧줄과 밧줄로 연결하여 1-20척씩 한꺼번에 일본에 건너갔던 것이다. 미루어 짐작컨데 이러한 도회방법은 비단 경상도, 즉 신라에만 있었던 사실 같지는 않다. 백제 역시 신라보다 선박 건조 기술이 압도적으로 우세했다고 볼 수 없으므로 백제 사람들도 도한 그러한 방식을 취했을 것이다. 따라서 30톤 정도 규모의 목선에 10명 정도의 인원이 약간의 짐을 가지고 승선했다고 하면 1회 도회시의 총인원은 100명에서 200명 사이가 된다고 볼 수 있다.

사천왕사로 금강중광, 다문, 도자, 중천 등 4인의 기술자가 건너갔다고 기록에 나왔지만, 단 4 사람을 위해서 배를 띄웠다고 볼 수 없으므로 최소한 100명에서 200명 정도의 기술자 및 선원이 동시에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사천왕사에 도착했던 기술자는 금강중광 등 공사 감독관 4인 외에 최소한 1-200명의 중간 기술자들이 있었다는 판단이다. 아울러 그 배에는 사람외에 건축 현장에서 반드시 필요한 각종 공사기구들이 실려져 있었을 것이다.

 

 

<불교의 전래>

 

서기 538년, 10월의 어느날 일본의 흠명천황은 대신인 소아도목과 대련인 물부미여와 함께 앉아있었다. 그의 곁에는 백제의 성왕이 보내온 석불 1구와 금동불 1구 그리고 반계경전, 경론이 옆에 쌓여져 있었다. 그 불상과 불교 경전들은 백제의 성왕이 달솔인 노리사치개를 보내 일본에 전달한 것이었다.

백제 서부 지역에 살았던 희(姬)씨로서 벼슬은 달솔이었다.

백제의 벼슬아치 중 한 사람.

노리사치개가 불상과 불경을 가지고 오자 긴메이천왕은

“외국의 신은 금색이고 아주 아름답다.”

라며 춤을 추었다.

 

흠명천황이 당대의 실권자인 두 신하를 앞에 두고 이렇게 말했다.

“짐이 옛부터 이제까지 아직 이렇게 미묘한 법을 들은 일이 없다. 그러나 짐이 혼자서는 결정하지 아니할 것이다. 서쪽 나라에서 보낸 불의 얼굴은 단엄하다. 일찍이 본 일이 없다. 예배할 것인가, 말 것인가.”

라면서 두 신하의 안색을 살폈다.

서기 538년 경에는 일본 천황이라해도 대단한 권력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흠명천황의 궁은 나라현의 사꾸라이현 근처에 있었다. 그의 궁은 기성구금자궁으로 불리웠다. 그러나 말이 궁이지 이 당시 천황의 집은 2-30년이면 썩을 정도의 목재와 나무껍질로 지붕을 덮은 오막살이 수준이었다.

천황의 사정이 이러하니 커다란 실권이 있을리 없었다. 반면에 흠명천황 앞에 앉았던 두 대신은 수 백명의 군사를 거느린 일본의 호족들이었다.

소아도목대신으로 말하면 이미 일본 내에서는 상당한 자리를 잡은 명문집안이었다. 소아도목은 흠명천황의 왕비인 견염희, 소성희의 아버지였다. 견남희는 용명찬황과 추고천황을 출산했고 소성희는 숭준천황을 출산했다. 말하자면 천황의 장인인 것이다. 그것도 딸 하나만 천황에게 보낸 것이 아니라 두 딸을 동시에 천황에게 시집 보냄으로써 겹사돈의 관계를 맺고 있었다.

 

 

<소아 집안의 내력>

 

 

목만치는 일본 검도계의 원조이다. 그를 가리켜 일본의 검술계에서는 지금까지 그를 본국검(本國劍)의 달인이라고 한다. 본국검이란 한민족 고유의 무술로 훗날 신라인들에게 전해져 화랑들에 의해 무예로 승화된 무술이다.

닭, 호랑이, 기러기, 뱀, 표범, 용, 원숭이, 소 등의 짐승과 새의 움직임을 면밀히 관찰하여 검술에 응용한 것이 바로 본국검이다. 본국검은 새처럼 날며 뱀처럼 기며, 원숭이처럼 구르며 호랑이처럼 빠르며 표범처럼 덤비며, 용처럼 비틀고 소처럼 끈질긴 검법을 말한다. 바로 그 본국검의 달인이 목만치였다.

목만치의 고향은 대목악성으로 오늘날의 충남 청원군 목천면이 그곳이다. 목씨들은 백제의 8대 명문 집안의 하나로 주로 대목악성에서 집성촌을 이루며 살고 있었다. 목만치는 그곳에서 아버지 목라근자(木羅斤資)와 신라 출생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가 신라를 정벌하러 갔다가 거기서 부인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가 일본으로 망명하게 된 이유는 분명하다. 그러나

일본서기 응신 25년(서기 416년)조에 보면 그가 일본으로 망명하지 않으면 안된 일말의 사정으로 추정되는 구절이 나온다.

 

<백제의 직지왕이 훙하였다. 그 아들 구이신이 왕이 되었다. 왕은 나이가 어렸다. 목리만치가 국정을 잡았다. 왕모와 간음하여 무례한 일이 많았다. 백제기에 말하기를 목리만치는 목라근자가 신라를 칠 때 그 나라의 부인을 얻어서 나았다. 그 아비의 공이 있으므로 임나의 일을 도맡아 보았다. 우리나라에 오고 귀국에 왕래하였다. 제도를 천조에서 배우고 우리나라의 정사를 집행하였다. 권세가 강하였다. 그런데 그 천조가 포악한 것을 듣고 불렀다. >

 

일본 서기에 보면 이 사람은 백제 문주왕을 도와 고구려와 전쟁을 벌이다가 패퇘하여 일본으로 망명한 인물로 되어 있다.

 

목리만치

그는 본시 백제의 장수였던 것이다. 싸움터마다 왕이 데리고 다닐정도로 검술이 뛰어난 당대의 검객이었다. 목리만치는 백제가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지자 일본으로 망명한다. 일본으로 건너온 목리만치는 대단한 권력을 누렸다. 검술 솜씨가 천하의 달인이었으므로 곧바로 대신이라는 직위를 받았다. 요즘으로 치면 장관급에 해당하는 벼슬이다. 이때 목만치는 목씨 성을 버리고 소아라는 성을 갖는다.

 

일본 서기 536년 2월 1일조에 보면

소아도목 숙미를 ‘관례’대로 대신으로 삼았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소아도목은 소마만치 즉 목만치의 증손자이다. 관례대로 라는 말은 옛부터 그렇게 했다는 말이 된다. 말하자면 목만치가 일본에 건너왔을 때 자자손손 대신의 대접을 받기로 천왕과 어떤 약속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소아집안은 대신이라는 벼슬을 년년세세 계승하게 된다. 그 집안의 가계는 이렇다.

목라근자(백제 거주)-소아만치(목만치, 도일 제 1대) - 소아한자(도일 제 2대) - 소아 고려(도일 제 3대) - 소아도목(도일 제 4대) - 소아마자(도일 제 5대) - 소아하이(도일 제 6대) - 소아입록(도일 제 7대)이다.

그의 집안은 도일 제 7대 째인 소아입록 때에서 완전히 멸문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그 7대에 걸친 150년 동안 이 집안은 줄곧 대신의 벼슬을 유지하면서 일본의 정치를 좌지우지했다.

 

 

소아도목의 집안은 그의 할아버지때인 소아만치로부터 시작된다.

소아만치는 본래 백제인 목만치로 목만치는 당대의 검술의 1인자였다. 목만치는 백제의 개로왕과 더불어 전쟁에 나갔다가 개로왕이 고구려군에 의해 전사하는 바람에 일본으로 망명했다는 전설적인 검객이다. 목만치는 일본으로 건너와 나라시의 소아천 근처에 살았다고 전해진다. 그는 백제에 있었을 때부터 상당한 권력자였고 일본에 건너와서도 상당한 권력을 누렸다. 그는 일본에서 그의 아들 소아한자를 낳는다. 바로 그 소아한자의 아들이 소아도목이다. 훗날 소아도목은 흠명천황(제 29대 539-571)의 손자인 용명천황(제 31대 585-587)에게도 자신의 딸인 석촌명을 시집보내 그의 장인이 되기도 한다. 또한 용명천황의 아들인 숭준천황(제 32대 582-592)에게도 또 딸을 보내 그의 장인이 되는 등 약 3대에 걸쳐 천황의 장인이 된 인물이다. 그만큼 당대의 실권자였다. 그의 관직인 대신이라는 것은 고성씨, 평군씨, 거세씨 등과 더불어 일본의 정계를 좌지우지할 수 있을만큼의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 집안은 천황가로부터 한 번도 정벌당한 역사를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는 천황과도 대등한 입장에 있었다. 반면에 물부씨는 대련의 계급을 가진 대신 다음의 신하로서 대반씨, 중신씨 등과 더불어 천황가의 관리였다. 소아씨가 천황가에 자신의 딸들을 왕비로 보내 사돈관계를 형성할 수 있었던 데 비해 대련들은 자신의 딸들을 청황의 딸로 할 수 없었다. 말하자면 신분의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물부미여는 비록 대련의 신분이었지만, 그는 강력한 군사를 가지고 있는 상당한 실권자였다.

상황이 그러하니 천황이 소아도목의 눈치를 본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소아도목이 말문을 열었다.

“서쪽의 여러 나라가 다같이 경배하고 있습니다. 일본이 어찌 혼자 배반할 수 있겠습니까?”

그는 불교를 받아들이자는 입장이다. 그 자신의 뿌리가 백제국에 있었기 때문이다. 소아도목의 말이 끝나자 물부미여가 입을 열었다.

“우리나라가 천하의 왕노릇을 하게 된 것은 항상 천지사직의 180신을 춘하추동에 제사 지내는 것을 해왔기 때문입니다. 지금 그것을 고쳐서 불상을 경배한다면 국신의 노여움을 살 것입니다.”

라고 천황의 안색을 살피며 말했다.

소아는 찬성, 물부는 분명한 반대의 입장을 취했다. 흠명천황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그 불상과 경전을 보내온 사람이 백제의 성왕이었다.

백제의 성왕(523-554)은 백제의 제 26대 왕으로 무령대왕의 아들이다. 성왕의 시대에 백제는 고구려와 여러번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5세기 후반 이후 백제는 고구려의 남진정책으로 인해 상당한 타격을 입고 있었다. 서기 475년 고구려의 장수왕은 백제의 수도 한산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을 뿐 아니라 이때 계루왕도 살해했다. 왕이 죽을 정도로 백제는 크게 패했다. 이에따라 계루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즉위한 문주왕은 수도를 웅진으로 옮긴다. 한산성의 함락은 고구려와 백제가 군사적으로 대등한 관계에서 일방적으로 몰리는 관계로 바뀌는 계기가 된다. 이후 고구려의 백제 침공은 계속되었고 백제는 번번이 싸움에서 패퇴하여 밀리고 있었다.

또한 신라도 서기 532년, 낙동강 하구에 위치한 금관가야를 병합하면서 신라의 세력도 또한 팽창되고 있었다. 고구려와 신라의 팽창 정책으로인해 백제는 풍전등화 국가의 운명이 바람 앞에 촛불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538년이 되면 성왕은 수도를 웅진(공주)에서 다시 사비(부여)로 옮긴다. 한층 더 남쪽으로 수도를 옮긴 것이다. 백제의 강토가 사정없이 줄어들던 시절이다.

 

 

<관산성 전투>

 

 

백제의 성왕은 무령왕의 아들이다. 무령왕 자신이 상당히 유능했던 왕이었는데, 그의 아들인 성왕도 그에 못지 않았다. 성왕은 여러 가지 일을 하였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수도의 천도였다. 즉 수도였던 공주에서 부여로 천도한 것이다. 부여로 천도한 이후 그는 해외 교류와 불교 진흥에 앞장섰다. 그가 교류한 국가는 중국의 양나라 및 일본 그리고 인도였다. 중국 양나라로부터는 모시박사(학자), 공장(기술자), 화사(화가) 등을 초빙하는 한 편 열반경 등 불경을 수입하여 백제 문화를 한층 높이는 데 힘썼다. 또한 인도로부터는 인도의 중 겸익을 초청하여 그로부터 범어로 쓰여진 오부률을 받아 그 경전들을 번역시켜 불교를 장려하였다.

또한 백제의 달솔, 노리사치개 등에게 석가불금동상 1구, 번개(불교의 깃발), 경론 등을 보내어 일본에 불교를 전파하기도 하였으며, 의박사, 역박사 등 학자와 건축기술자들을 파견하여 일본에 선진문물을 전파하였다.

아울러 그는 관제정비에도 힘써 지배체제를 정비하였다. 즉, 중앙관제로서 1품인 좌평으로부터 16품인 급우에 이르는 16관등제를 만들었고 궁궐 내에는 전내부를 두어 내관 12부와 외관 10부로 된 22부제의 행정시스템을 확립하였다. 또 수도였던 부여를 상부, 전부, 중부, 하부, 후부 등 5부로 구획하여 그 5부 밑에는 5항을 두어 5부 5항제를 만들었다. 또 지방 통치 조직으로서는 기존의 담로제를 개편하여 전국을 동서남북중방 등 5방으로 나누고 그 밑에 7-10개의 군을 두어 이른바 5방 군성제도를 정비하였다.

아울러 외교와 국방 면에서도 힘을 썼다. 과거로부터 유지되어왔던 신라와의 동맹관계를 그대로 지속하면서 고구려의 남진정책에 맞섰다. 또한 중국의 양나라 및 왜나라와도 좋은 외교관계를 유지하면서 상호 무역을 통한 문화교류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백제의 국제적 지위를 향상시켰다.

그러나 이처럼 많은 일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성왕 자신에게는 커다란 숙제가 있었다. 그것은 고구려에게 빼앗긴 한강 유역을 뺏는 일이었다. 서기 551년 성왕은 백제군을 중심으로한 신라군과 가야군과 연합하여 고구려의 남평양(현재의 서울)을 공격하였다. 이 전쟁에서 고구려는 성왕에게 패퇴하여 북으로 물러났다. 백제는 숙원이었던 한강 하류의 6군을 회복하였으며 연합군이었던 신라는 한강 상류의 상당부분을 차지하게 된다.

고구려는 물러났으나 새로운 적이 나타난다. 그것은 바로 신라의 진흥왕이었다. 역사적으로 보면 백제의 성왕과 신라의 진흥왕은 라이벌 관계이다. 신라의 진흥왕은 땅이 비옥한 한강 하류에 눈독을 들였다. 진흥왕은 백제와 신라 간에 맺어진 불가침조약인 나제동맹을 깨뜨리고 서기 553년 군사를 일으켜 백제를 공격하였다. 이 전쟁에서 백제는 한강 유역을 신라에 빼앗기게 된다.

숙원이었던 한강 하류를 고구려로부터 어렵게 찾았으나 이번에는 다시 신라에 뺏긴 셈이 된 것이다. 신라의 배반과 공격에 분노한 성왕은 이번에는 다시 신라와의 전쟁에 나선다. 백제의 성왕은 3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충청북도 옥천 지역에 있는 관산성으로 향했다. 관산성은 한강의 하류를 지키는 신라군의 최대 요새였다. 관산성에 다다른 백제 성왕의 군대는 초기에 우세를 보였다. 그러나 난공불락의 요새인 관산성을 쉽게 빼앗을 수가 없었다. 백제의 성왕은 관산성 입구에 있는 구진벼루를 향해 3만 명의 군대와 함께 진격했다.

그 무렵 성왕의 아들인 여창은 관산성 입구에 노고성을 쌓다가 과로로 쓰러지게 된다. 성왕은 구진벼루에 올라 아들이 있는 노고성을 향하고 있었다. 구진벼루와 노고성 사이는 협곡이다. 신라군은 백제의 성왕이 그 협곡을 통과한다는 정보를 미리 입수했다. 그리고 그 협곡의 양쪽에 포진했다. 드디어 성왕이 이끄는 3만 명의 군대가 협곡을 통과할 즈음, 신라군은 협곡의 위에서 돌을 떨어뜨리고 굴려 백제군을 오도가도 못하게 만들었다. 그리고는 백제군을 향해 수만 발의 화살을 쏟아부었다. 매복에 걸린 백제군은 고군분투하였으나 화살에 맞아 병사의 상당수가 전사하고 이어 신라의 기마군에게 협공당하게 된다.

당시 신라군을 이끈 장수는 김무력이다. 김무력은 김유신의 할아버지다. 김무력은 휘하의 장수인 도도(都刀)를 선봉장으로 성왕의 군대를 공격하였다. 매복에 걸려 오도가도 못하게 된 백제군은 도도의 선봉대와 치열한 접전을 벌였으나 결국 좌평 4명이 현장에서 전사하고 병졸 2만 9천 6백명이 전사하였다. 도도는 백제의 군졸을 헤치고 나아가 성왕을 산 채로 잡았다. 그리고 성왕에게 무릎을 꿇게 하였다. 포박된 성왕은 적장 도도의 앞에 무릎이 꿇린 채 엎드렸다. 도도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왕이시여, 머리를 베도록 허락하소서.”

비록 적군이지만, 상대의 지체가 국왕이므로 최대한 존중하여 말한 것이다. 그러자 성왕은

“왕의 머리를 종놈의 손에 맡길수는 없다.”

라고 당당하게 말하였다.

이에 도도는 분개하여

“우리 나라의 법에는 맹세한 것을 어기면 왕이라 하더라도 마땅히 종의 손에 죽습니다.”

라고 성왕을 꾸짖었다.

이에 성왕은 하늘을 우러러보며 탄식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과인은 매번 뼈에 사무치는 고통을 참고 살아왔지만, 구차하게 생명을 구하고 싶지 않다.”

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목을 늘였다. 도도는 성왕의 목을 단칼에 베었다. 그리고는 성왕의 머리를 상자에 담아 신라의 왕실에 보내고 나머지 시신은 백제로 보내주었다. 신라의 진흥왕은 성왕의 머리를 직접 확인한 후 북쪽에 있는 궁궐 계단 아래에 묻었다. 북쪽 궁궐 아래의 머리가 묻힌 곳을 도도의 이름을 따 도당이라고 하였다.

이 전쟁에서 백제의 성왕은 전사하였으나 그의 아들 여창은 간신히 도망쳐서 왕위를 계승하게 되니 그가 바로 백제의 위덕왕(554-598)이다.

도도가 왕이라고 하여도 맹세한 것을 어긴 자는 종의 손에 죽는다고 말하였는데, 그것은 한때 신라가 고구려와 화친하게 된 것을 백제가 깨뜨렸기 때문이다.

문제의 성왕이 관산성 전투에서 사망한 것은 서기 553년의 일이다. 당시 백제는 고구려의 침공과 신라의 압박 등으로 국가의 사직이 풍전등화와 같은 처지에 있었다. 성왕이 그러한 화급한 사태의 와중에도 일본에 불상을 보내게 된 것은 바로 백제의 사직이 유사시에 일본에 이동할 지도 모르므로 그에 대한 대비책의 하나였다고 보여진다.

 

 

불상이 도착한 것은 백제가 부여로 수도를 옮겼던 바로 그 해이다. 성왕이 수도를 봄에 옮겼고, 가을에 불상을 일본에 보낸 것이다. 백제의 성왕이 일본에 불상과 경전을 보낸 배경에는 백제의 지휘부가 유사시 고구려에 멸망당하여 일본으로 건너갈 수도 있으니 일본국의 민심을 불교를 중심으로 단합시키라는 암묵적인 지시가 있었다.

흠명천황이 다스리던 당시의 일본은 백제의 분국이나 다름없었다. 말하자면 일종의 식민지였던 것이다. 흠명천황은 백제 성왕의 그러한 뜻을 읽고 있었다.

일본의 고대사는 매우 수수께끼같아서 언제부터 백제계가 일본의 천황을 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그러나 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제 15대 응신천황(270-310)이후부터 일본에 백제계 정권이 들어선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응신은 비류백제의 마지막 왕으로 백제가 온조에 의해 통합되자 비류백제국은 일본으로 망명하게 되고 바로 그 비류백제국의 마지막 왕이 응신이라고 보고 있다.

일본 천황가의 계보대로 한다면 흠명천황은 응신천황의 14대 후손이다. 말하자면 흠명천황도 백제계에 그 뿌리를 두고 있었으므로 백제인의 후손이라고 볼 수 있다.

흠명천황이 다시 입을 열었다.

“소아도목 대신이 불상을 모시겠다고 자원했으니 일단 시험 삼아 예배하도록 하라.”

라고 말하였다.

흠명 자신의 뿌리가 백제국이었고, 본국인 백제국에서 보내온 하사품이므로 그것을 뿌리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흠명천황은 불상 두구를 소아도목 대신에게 하사하였다. 소아도목 대신이 무릎을 꿇고 불상을 안았다. 그는 매우 기쁜 표정으로 불상을 안고 그의 집으로 돌아갔다.

당시 백제에서 건너온 미륵석불과 금동불은 그 크기가 약 30CM정도이다. 미륵석불이란 돌로 만든 미륵불로 석가 다음으로 부처가 될 고사를 말한다. 현재 도솔촌에서 보살로 있으면서 56억 7천만년 뒤에 이 세상에 나타나 용화수 아래서 성불하고 삼회의 설법으로 석가여래가 계실 때 도탄에 빠졌던 모든 중생을 구제한다는 미래불이다. 금동불이란 동이나 청동으로 만든 불상에 금을 입힌 것이다. 금동을 한 것은 부식을 방지하고 황금과 같은 효과를 내기 때문이었다. 금동불은 삼국시대와 고려시대때 유행했던 불상의 양식이다. 중국에서는 불교의 전래와 함께 남북조 시대에 많이 만들어졌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등신대 크기의 금동불도 잇었지만, 개인적으로는 가슴에 품고 다닐만한 작은 호신불도 있었다. 일본에 전래된 이 불상은 30년 전인 1970년대까지 아스카의 향원사라는 절에 있다가 어느날 도난당하여 현재는 나가노 현에 있는 대찰 선광사(善光寺)에 모셔져 있다고 한다. 필자는 도난당하기 전 촬영되었던 미륵석불과 금동불의 사진을 향원사 주지스님이 보여주어 직접 본 적이 있다. 1400년이나 지난 오래된 불상이어서 불상의 신체는 그 표면이 성한 곳이 없을 정도로 흠집이 많았으나 상당히 고졸한 작품이었다고 생각된다.

소아도목은 불상을 모시고 아스카의 소간전에 있는 그의 집에 안치하였다. 그의 소간전의 집은 여러 채였는데, 그 중에 향원이라 불리우는 집을 깨끗이 청소하여 거기에 불상을 모셨다. 문제의 향원의 집은 오늘날 향원사라는 절로 지금도 남아있다. 아담한 기와집과 요사채가 한 채 붙어 있는 집이다. 10여년 전부터 나라시 문화재연구소는 향원의 집, 즉 향원사를 발굴하기 시작하여 지하 3M에 당시 지어졌던 향원사의 유구를 발굴중에 있다. 필자도 직접 그 현장에 가본 적이 있다. 분명 파내려간 지하 3M에는 소아도목이 살편 향원의 집의 실체가 있었다. 주춧돌이며 기와장 파편이 모습을 드러내놓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불교의 일본 전래이다.

소아씨는 향원의 집에 모셔진 불상을 백성들에게 경배하게 했다. 성대한 불상 안치식이 백제계 이민자들과 더불어 거행되었고, 그날 이후 백제계 이민자들은 향원의 집에 찾아와 불상에게 예배를 드리고 갔다.

물부는 그 뿌리가 가야계이다. 그가 믿는 180신이란 오늘날의 신도를 말한다. 물부가 모시던 신을 국신이라 한다. 국신이란 하늘에서 내려와 나라를 처음 만든 조상을 말한다. 물부가 모시던 국신은 누구인가? 그 국신은 다카마카하라에 내려온 신이라고 한다. 다카마카하라는 오늘날의 후쿠오카 근처라고도 하고 또 이즈모 근처라고도 하며, 큐슈의 휴우가 근처라고도 한다.

작고한 재일 소설가이자 사학자였던 고 김달수 선생은 다카마카하라를 경남 창원에 있는 우두봉이라고 설파한 바 있다. 우두봉은 창원 지역에서 가장 높은 산이며 바로 먼 옛날 가야의 땅이었다. 우두봉을 경상도 사람들은 소시모리라고 부른다. 즉 소 머리에 하늘에서 신이 내려와 나라를 열었다는 것이다. 그때 내려온 신이 바로 물부가 모시는 신이다. 즉 가야계 최초의 조상인 것이다. 그 조상을 물부는 국신으로 규정하고 그 조상에 대해 춘하추동으로 제사를 지내왔다.

즉, 물부의 뿌리는 가야이며 그는 가야의 조상인 국신을 믿는 것이 당연했다. 그러한 그에게 흠명천황이 난데없이 석가모니 부처를 모시라고 하니 그가 거부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소아씨가 향원의 집에 불상을 모셔놓은 지 얼마 안되었을 때의 일이다. 난데없이 나라에 역병, 즉 전염병이 돌아 백성들 중에 갑자기 죽는 자가 많이 생겼다. 이것을 기회로 여긴 물부대련은 흠명천황에게 탄원했다.

“옛날에 제가 불상을 모시면 안된다고 말씀을 드렸는데, 불상을 모신 결과 역병이 돌고 많은 사람들이 갑자기 죽었습니다. 지금이라도 옛날로 돌아간다면 다시 평화로워 질 것입니다. 한시바삐 불상을 던져버리고 옛날의 복을 찾으소서.”

라고 말하였다. 전염병이 돌아 백성들이 많이 죽자 흠명천황도 덜컥 겁이 났다. 민심도 매우 흉흉해졌다. 물부 대련은 바로 이때다 라고 생각하고 569년 가을의 어느날 밤 군사를 일으켜 소아도목의 집을 습격한다. 그의 본거지인 오사카 근처인 팔미시에서 말을 달려 한 시간 떨어진 아스카의 향원에까지 쳐들어 온 것이다. 야잠의 기습에 소아도목이 칼에 질려 죽고 집안은 쑥대밭이 되었다. 물부는 소아씨 집안 사람들을 잡히는대로 죽이고 불을 질렀으며 백제로부터 건너온 미륵석불과 금동불 2구를 찾아내어 난바라는 강에 던져버렸다. 이것이 바야흐로 49년간 3대에 걸친 길고 긴 불교전쟁의 시작이었다.

사실 이 불교 전쟁은 종교전쟁이 아니다. 그 본질은 일본 내에서 누가 헤게모니를 잡느냐하는 소아와 물부의 권력쟁탈전이었다. 지금까지 사학계에서는 소아집안을 백제계로 못박고 있다. 하지만 물부의 뿌리가 백제계인지, 가야계인지, 신라계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설이 분분하다. 개인적으로는 물부의 뿌리를 가야에서 건너온 이민자의 후손으로 단정하고 있지만 일부 학자들은 그를 백제계로 추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물부가 모시고 있는 국신이 과연 어디에서 왔는가를 규명하면 물부의 뿌리가 자연히 밝혀진다고 생각한다.

 

그는 물부 대련의 권유에 따라 불상을 강에 던져버리라고 명령했다. 또 향원의 집에 불을 놓아 태우라고 명령했다. 불상은 난바라는 곳에 있는 굴강에 던져졌다. 또한 불상을 모셨던 향원사도 재로 변했다. 향원사가 모두 불에 타고 사라졌을 때 난데없이 황궁에 불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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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 다이코와의 신년의례>

 

 

정월 초하루.

새해가 시작되는 날이다.

물론 일본은 휴무였다.

일본 사람들은 새해 첫날이 되면 이곳저곳의 신사를 찾아 다니면서 참배를 한다. 새해에도 무사히, 새해에도 하는 일이 잘 되도록 해주십사 하고 비는 것이다. 이걸 일본 사람들은 하츠모데(初詣)라고 부르는데 보통 일본인들은 하루에도 몇 개의 신사를 순회하며 한해의 안녕을 비는 것이다.

나는 일본 사람들이 가장 많이 가는 주길 신사에 가보고 싶었다. 주길신사는 오사카에서 가장 큰 신사이다.

일본은 신이 많은 나라이다.

건강을 비는 신이 있는 가하면 항해의 안전을 비는 곤삐라 신사도 있고, 돈을 많이 벌게 해달라고 비는 신사가 있는 가하면 사업을 잘 되게 해달라고 비는 신사도 따로 있다. 말하자면 자신의 처지에 맞게 신사를 찾아가서 그곳의 신에게 자신의 소원을 비는 것이다.

전차길로 나가니 전차종점에는 주길신사로 가는 특별편 전차가 따로 있었다. 보통 때의 전철 요금은 160엔인데, 이 날은 특별할인으로 120엔에 손님을 태워다 주고 있었다.

주길신사에는 그야말로 구름같은 인파가 모여들고 있었다. 아침밥을 먹고 가족들이 신사로 꾸역꾸역 모여들었다.

카시와데(2배1박수)를 하고 그들은 뭔가 열심히 빌고 있었다.

주길신사를 들렀다가 나는 사천왕사로 갔다.

절에도 새해를 맞아 신자들이 찾아오기 때문이었다. 오사카에서 제일 큰 사천왕사에는 뜻밖에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다 합쳐 봐야 백명 미만이었다. 주길 신사에 수만,수십만이 모여든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살아서는 신사, 죽어서는 절>이라는 말이 실감나는 순간이었다.

신사는 출생, 결혼, 진급, 소원, 행복, 금전 같은 속세의 소원을 빌지만 절은 죽을 때나 찾아가는 곳이었다.

 

1월2일. 오전9시.

본격적인 취재가 시작되는 날이었다.

천왕사구 1정목에 있는 금강조 본사로 갔다.

이 날도 휴일이어서 직원들은 출근하지 않았다. 요시가와씨를 찾았으나 그는 출근하지 않았고 대신 후지모리(47)라는 사람이 나왔다. 후지모리씨는 앞으로 15일의 취재 기간 동안 자신이 나의 취재를 도와주라는 지시를 받았다며 모든 협조사항은 자신을 통해서 부탁하면 된다고 말했다. 그와 명함을 교환했다. 그는 금강조 경리부의 계장으로 21년째 금강조에 근무하고 있다고 했다. 앞 머리가 벗겨지고, 피부가 막 온천에서 목욕을 마치고 나온 사람처럼 희었다. 그러나 업무에 임하는 그의 태도는 철저하고 기민해보였다. 전형적인 일본인이었다.

그가 오늘은 금강조에 특별한 의식이 있다고 했다. 의식의 이름은 <杖削 리>. 언제부터인지 고래로부터 행해지고 있는 행사라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회사 1층 입구에는 <金剛>이라는 심볼 마크가 새겨진 하오리(일본의 깡총한 전통의상)를 입은 20여명의 남정네들이 모여있었다. 곧 금강리융 사장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왔다.

금강리융 사장 역시 4년만에 뵈었다. 정중히 인사를 했다. 그가 얼굴에 잠시잠깐 반기는 기색을 보이더니 1층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총무부와 경리부, 영업부가 함께 있는 1층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서 나무에 금을 긋기 시작했다.

나무는 가로 2.5센티, 세로 2.5센티의 정사각형으로 길이는 2미터 쯤 되었다.

금강 사장이 거기에 금을 그었다. 그것은 자(尺)였다.

2미터의 나무에 35센티마다 금을 그어 표시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고마척(고려척), 바로 그것이었다.

오늘날의 1척, 즉 1자는 30.3센티이지만 고대 일본에서는 한자가 35센티인 고려척을 사용했다.

즉 고래로부터 쓰던 자를 만드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금강조의 한해 업무의 시작이었다.

금강리융 사장의 곁에서 50대의 인텔리로 보이는 한 남자가 같이 자를 만들고 있었다.인사를 하고 보니 그는 금강리융 사장의 외아들인 금강정화(金剛正和.52)씨였다. 금강리융 사장이 백제로부터 건너온 금강중광의 39대 계승자이고, 40대 계승자가 될 사람이 바로 그였다.

180센티의 큰 키에 군살이라곤 없는 마른 체격이었지만 강단이 있어 보이는 인상의 중년이었다.

두 사람은 열심히 여덟개의 고려척을 만들었다.

사천왕사 가람연기에 따르면 제1대 도래인인 금강중광은 사천왕사의 설계자로 알려져있다.

사천왕사 건립 당시 백제에서는 4명의 감독관이 파견되어 왔는데, 그 사람들의 이름은 도자(圖子), 다문(多門), 금강(金剛), 중촌(中村)이다.

이 네사람은 사천왕사에 와서 금당, 강당, 오중탑 그리고 동서남북의 네 문과 사천왕사 전체의 공사를 진두지휘했다고 한다.

그러나 누가 어떤 건물을 담당했는지, 그 역할 분담이 어떠했는지는 지금까지 알려진 바 없다.

당시 백제는 이 네명의 공사감독관 이외에 단치장(鍛治匠), 조와사(造瓦師), 주사(鑄師), 회사(繪師), 불사(佛師) 등도 파견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그 파견 시기가 언제였는지는 정확치 않다.

다만 사천왕사 건립이 끝난 것이 서기 593년의 일이므로 그 무렵에 그들이 백제로부터 건너온 것으로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금강리융 사장은 고려척을 다 만든 후 그걸 가지고 5층으로 올라갔다. 그의 뒤를 따라 하오리를 입은 20여명의 남정네들도 따라 올라갔다.

5층은 강당이었다.

강당 앞에는 신이 모셔져있는 신단이 있었다. 그 신단을 금강 사장이 조심스럽게 열자 그안에 작은 나무조각상이 모셔져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 조각상은 성덕태자 바로 그였다.

성덕태자(574-622).

용명천황의 아들이며 추고 천황 시에 섭정으로 고대일본의 국가 기틀을 세운 사람,그리고 바로 금강중광과 도자, 다문, 중촌 등 네사람의 공사감독관을 백제로부터 일본에 초청한 장본인. 성덕태자는 그 어머니가 백제계로 알려져있으니 외가의 나라에 기술자들을 요청한 것이다.

그가 죽은 지 1300여년.

금강가의 사람들은 아직도 그를 신단에 안치해놓고 모시고 있는 것이다.

이걸 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놀라움과 감동이 엇갈리는 순간이었다.

1300년전 자신의 1대 조상을 불러 일을 맡기고, 자신의 1대 조상에게 사천왕사의 보수 관리를 맡긴 그 장본인을 1300년이 지난 후에까지 모시고 있는 저 정신은 무엇이란 말인가.

금강 사장은 성덕태자의 조각상 앞에 고개를 조아리고 절을 했다. 그가 절을 하자 하오리를입은 20여명의 중장년들도 절을 하기 시작했다.

행사는 절을 몇번하고 그 앞에 금강 사장 자신이 깎은 고려척을 바치는 것으로 금새 끝이 났다.

이 의식의 내용은 모든 공사의 기본이 되는 자, 즉 고려척을 새해를 맞아 새로 만들었으니 태자님께서 이 자를 받으시고 모든 공사가 차질없이 잘 되게하여 주소서라는 의미가 있는 의식인 것이다.

의식이 끝나자 금강 사장과 하오리를 입은 장년은 강당의 한쪽구석에 있는 식당으로 옮겨 좌정했다.

그들이 좌정하자 금강사장의 부인인 금강광자(金剛光子)씨와 금강집안의 며느리가 도시락을 공손하게 나눠주었다.

도시락이 하나씩 돌려지고 그옆엔 일본 청주가 1인당 한병씩 놓여졌다.그리고 김밥이 가득 담긴 몇 개의 접시도 놓였다.

금강 사장이 청주를 들어 건배하자 하오리를 입은 중장년들도 건배를 외치고 한모금씩 마셨다. 곧 사장과 함께 식사가 시작되었다.

도시락은 예사 도시락이 아니었다. 일본의 도시락 가게에서 흔히 살 수 있는 그런 도시락이 아니었다. 우리의 색동 저고리처럼 오색으로 물들인 반찬만 가득들은 도시락이었다. 말하자면 술안주에 해당하는 것인데, 나중에 먹어보니 일본의 전통향료와 토속적인 재료로 만들어진 좀 특별한 것이었다. 이 음식을 일본 사람들은 오세치라 부른다. 오세치란 전통적인 일본의 설 음식으로 찬합에 담아 정월 초 사흘 동안 먹으며 지내는 음식이다. 찬합은 4단으로 되어있고 첫 단에는 전채(채소요리)가 들어 있으며 둘재 단에는 구운 요리(생선류), 셋째단에는 식초로 무친 요리(해조류), 넷째단에는 익힌 요리(생선찜)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음식은 일종의 도시락으로 일본인들이 설날이면 반드시 먹는 음식이다.

금강조에서 제공된 오세치는 특별히 맞춘 것이었다.

정갈한 사기접시에 화초잎에 싼 분홍색 찹쌀떡, 빨간 연어알, 노란 가자미 튀김, 반작반짝 윤이 나는 멸치 볶음, 찐 새우, 삶은 다시마, 삶은 토란 줄기, 흰 어묵, 두부의 일종인 유바, 콩자반, 간장에 절인 연근, 붉은 과일 등이다.

금강조 사장과 하오리를 입은 20여명의 중년 들은 그것을 함께 먹었다. 하오리를 입은 20여 명의 중장년들은 바로 금강조의 1대 조상인 금강중광과 함께 백제에서 일본에 건너와 줄 곧 같이 일해온 대목수들이다. 그들은 <지난 1400년간을 함께 일해왔던 것처럼 올해도 잘해보자>는 의미로 해마다 설음식을 같이 먹고 있었다.

본래 일본의 설 음식 즉 오세치 음식은 그 음식을 같이 먹으므로써 올 한해 하는 일이 잘되길 바란다는 의미가 있다.

연근은 지혜를 달라는 의미에서 먹는 것이고, 멸치조림은 풍작, 새우는 긴 수염처럼 오래 살게 해달라는 의미이다. 콩은 올해도 열심히 노력하겠다는 뜻이 담겨 있고 다시마는 올해도 제발 좋은 일만 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헌데 저 전통도시락을 함께 먹는 하오리를 입은 중장년 26명은 누구일까.

그들의 행색이나 태도로 보아서 그들은 금강조의 사원은 아닌 것 같았다. 술이 한잔씩 들어가자 그들은 곁에 앉아있는 사람과 잡담을 시작했다.

사장에게 그들의 소개를 부탁했다.

그들은 미야 다이코(宮大工) 즉 대목(大木)들이었다. 말하자면 절이나 신사 등 큰 건축물을 짓는 전통목수들이었다.

그들의 이름은 가토(加藤), 도이(土居), 기우치(木內), 하타야마(畑山), 이와사키(岩崎), 마스모토였다. 이 사람들의 선조도 1400년전 백제에서 함께 건너온 기술자들이었다. 금강집안의 1대인 금강중광과 백제에서 함께 건너와 자자손손 대를 물려 기술을 전수하면서 함께 일해온 것이었다. 말하자면 지난 1400년간 금강조 집안과 이들 미야 다이코들은 철저한 협력관계를 구축하면서 금강조 집안을 위해 일해온 1등 공신들이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대체 저들의 무엇이 지난 1400년간의 그 장구한 세월 동안 금강조를 위해 일하게 했던 것일까.

우리네 상식으로는 선뜻 이해되지 않는 일이 눈앞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벌어지고 있었다. 1400년간 정대공(正大工) 금강집안의 지시를 받아 그걸 몸으로 묵묵히 실천해 온 여섯명의 미야다이코(宮大工)들.

전 세계의 어떤 조직이 과연 1400년간 같은 일을 하면서 협력을 유지해온 선례가 있었던가.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물어보니 이 여섯명의 미야 다이코들은 각기 하나의 독립된 조직이었다. 그들은 각기 독자적인 구미(組)를 가지고 있고 그 밑에는 그들이 거느리고 있는 식구 즉 기술자들이 또 있었다. 가토 구미의 경우는 16명의 기술자 즉 목수를 거느리고 있고, 토이 구미가 12명, 기우치 구미가 14명, 하타 야마 구미가 15명, 야마모토 구미가 9명, 이와사키 구미가 6명이었다. 이들 구미들은 각기 공사현장을 가지고 있고, 그 공사현장에서 필요한 목조 지붕이나 대들보, 써가래 등을 만드는 일을 하고 있었다.

이들 구미 중에서 가장 좌장은 무려 45년간 금강조와 함께 일한 가토씨였다. 그리고 나머지 구미들도 보통 30년 이상 함께 일했으며 대체로 25년 이상 함께 일해 온 사람들이었다. 이들 구미들의 대표들은 지난 1400년간 자기 자식들에게 기술을 전수해 왔지만, 자식이 없거나 자식이 미야 다이코 일을 하기 싫어할 경우 제자 중에서 한사람을 뽑아 대를 잇기도 하면서 1400년간 협력관계를 유지해왔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오늘 아침의 식사는 새해를 맞아 올해도 일을 잘 해보자는 결속과 우의, 각오를 다지는 행사였다.

식사가 끝나자 그들은 또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곧 회사를 떠나갔다.

그들이 떠나고 난 뒤 나는 금강조와 관련된 주변 취재를 시작했다.

 

 

<성덕태자>

 

1월2일 오후.

미야 다이코와 금강조 사장과의 신년회식이 끝나자 우리는 성덕태자가 절체절명의 위기에 몰렸던 팔미시의 현장을 찾아 나섰다.

오사카의 우에혼마치(上野本町)에 있는 긴테츠(近鐵) 역에서 전철을 탔다. 우에혼마치 역에서 나라(奈良)쪽으로 전철로 아홉정거장 떨어진 팔미시에 내렸다. 팔미시는 오사카의 베드 타운이었다.

팔미역에서 내려 104 전화번호 안내에 승군사 위치를 물었다. 승군사(勝軍寺)는 태자정(太子町)이라는 동네에 있었다. 시내버스를 탔다.

버스는 10분만에 태자정에 도착했다. 물어물어 승군사를 찾아갔다.

승군사는 고색창연한 절이었다. 그 역시 성덕태자가 창건한 절이다.

태자정에 있는 승군사에 도착했다.

여기서 태자는 성덕태자를 말함이며 승군사는 말 그대로 물부군대를 이긴 절이다. 성덕태자가 물부군대를 이긴 곳이라하여 그런 이름이 붙은 것이었다.

<지명은 역사의 화석>이라는 말이 실감났다.

법당, 성덕태자전, 종루가 있는 자그마한 절.

이 절의 경내에 사람 팔로 세아름이나 되는 커다란 참나무가 있었다.벼락에 맞아 불타버려 이제는 밑둥만이 가시처럼 남아있는 노거수였다. 그 노거수 안에는 성덕태자 조각상이 들어있었다.

안내판의 설명에 따르면 성덕태자의 군대와 물부수옥의 군대는 이곳에서 격돌했다고 되어있다.

 

<소설투로 고쳐씀>

 

더구나 이곳 팔미시는 물부수옥의 본거지로 강대한 병력을 거느리고 있는 곳이었다. 성덕태자가 이끄는 숭불군(崇佛軍)은 이곳에서 3번에 걸쳐 싸웠으나 모두 크게 패했다. 그 마지막 전투에서 성덕태자는 물부수옥(物部守屋)의 군대에 포위당해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 갑자기 성덕태자가 의지하고 있던 참나무가 갈라지더니 성덕태자를 빨아들였다. 성덕태자는 그 안에서 사천왕에게 기도했다.저 물부군대를 타도해주시면 부처님을 위해서 큰 절을 짓겠노라.

이때 난데없이 아군이 들이닥치고 물부는 화살에 맞아 죽었다.그로서 물부의 군대는 패퇴했다. 이것이 서기 587년 7월의 일로 전해진다.

전쟁을 승리로 이끈 성덕태자는 사천왕에게 약속한대로 절을 지었다.그것이 바로 사천왕사(四天王寺)인 것이다.

<소설투로 끝남>

 

 

<물부 수옥의 묘>

 

 

승군사에서 나오는 길에 근처의 물부수옥의 묘에 들렀다.

승군사에서 불과 5백미터도 채 떨어지지 않은 거리. 팔미 시립병원 맞은편 대로상에 물부수옥의 묘가 있었다.

물부의 묘는 아오모리현 신사청(神社廳)을 비롯한 전국 140개 신사청에서 봉헌한 140개의 대리석 기둥에 둘러싸여져 있었다. 그 140개의 신사청의 면면을 보면 오사카부 신사청을 비롯, 북해도 신궁, 동경 신궁, 교토의 북야천만궁(北野天滿宮), 나라의 가스가다이샤(春日大社 : 일본 전국에서 가장 큰 대사) 등 일본내의 쟁쟁한 신사청에서 봉헌한 것들이었다.

비록 국신을 섬기는 물부는 1400년전 죽었으나 그의 추종세력들은 끝까지 살아남아 오늘날까지도 석책(石柵)을 치고 물부를 보호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1400년에 있었던 불교와 신도와의 종교 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고,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흔히들 일본의 종교를 신불습합(神佛習合)이라고 말한다.즉 불교와 신도가 혼합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절에 가보면 부처님을 모시는 금당이 있는가 하면 그 한쪽 구석 어딘가에는 그 지방의 국신을 모시는 사당이 또 하나 있기 마련이다.

따라서 신불습합이라는 말은 상당한 타당성을 가지고 있지만, 반면에 절대적으로 틀리는 말이 되기도 한다.

신도와 불교는 영원히 하나가 될 수 없는 별개의 종교이다.불교가 일본에 전래되었을 때 불교도와 신도교 사이에는 죽고 죽이는 49년간의 긴 전쟁이 있었다.그 긴 전쟁을 승리로 이끈 성덕태자는 일본을 다스리는 통치자가 되자 <이화이귀(以和爲貴)>라는 통치철학을 내세운다.

<이화위귀>

즉 화로서 귀함을 얻는다는 것이다.

이는 신도세력을 의식한 성덕태자의 고심에 찬 정치결단이다.즉 물부는 죽었으나 국신 즉 신도를 믿는 신도파, 다시 말하면 가야출신들의 일본국민이 아직도 상당수에 달하기 때문이었다.

불교를 믿는 백제계 국민들과 신도를 믿는 가야계 국민들의 화합.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고서는 당시 일본의 정국은 안정될 수없었다.그래서 성덕태자는 <이화위기>를 실천하는 행동강령으로 소위 일본 최초의 헌법인 17조 헌법을 만든다.그 헌법의 제1조도 화(和)를 강조하는 것이었다.

<和를 貴한 것으로 하고 逆함이 없음을 宗으로 하라>

그가 창안한 헌법 제1조에서도 역시 화를 가장 강조하고 있다.

이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국민의 단결을 위해 고심했는가 하는 것을 알 수있다.

그러나 그것도 역시 부족하다고 느꼈는지 그는 소위 <신불습합>이라는 기묘한 사상을 창안해낸다.

<신도와 불교의 흡수 합일>

더 쉽게 말하면 신도와 불교를 합한다는 것이다.

신도와 불교는 엄연히 별개의 종교이다.부처와 조상신은 합해질래야 합해질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그러나 성덕태자는 그것을 합하려고 했다.

이것은 놀라운 정치적 책략이다.

말하자면 여전히 남아있는 신도세력의 환심을 사기 위한 정치적 일대 결단인 것이다.

이것은 뒤집어 얘기하면 백제계 출신과 가야계 출신의 단합을 유도하기 위한 고육지책의 일환이었다.

일본의 고대사는 한반도에 있었던 고대사의 재현이다. 한반도의 고대사가 백제, 고구려, 신라의 패권싸움이었듯이 일본의 고대사도 처음에는 가야계와 백제계의 패권싸움에서 가야가 망하자 신라계와 백제계의 패권싸움으로 넘어가고 이어 고구려, 신라, 백제계의 패권싸움으로 넘어가고, 한반도에서 백제와 고구려가 모두 망하고 신라가 삼국 통일을 하자 일본땅에도 신라계정권이 들어서는 한반도 정치의 복사판인 것이다.

나는 1400년전에 죽은 물부수옥의 묘안으로 깊숙히 들어갔다.

물부 수옥. 일본명으로는 모노노베 모리야.

그가 죽은 것은 서기 587년경이니 지금부터 1412년전의 일이다. 무려 1412년전에 죽은 물부의 묘.

그의 묘앞에는 새해를 맞아 참배객들이 놓고 간 몇가지 물건들이 있었다.

떡과 빵, 그리고 백학이라는 상표의 청주 한병, 2리터짜리 물 한병과 <日本盛>이라는 상표가 붙은 한컵짜리 청주와 <대판의 혼>이라는 상표의 소주가 한병 놓여 있었다.그리고 작은 꽃다발도 하나 놓여있었다.

그렇다.

물부는 죽은 것이 아니다. 물부는 1400년전에 죽었지만, 그의 추종자들은 그의 정신은 아직 살아있는 것이다. 그것이 오늘날에는 신도라는 이름으로 포장이 되어있지만, 그 신도의 뿌리는, 그 정체는 알고보면 가야, 가야에서 건너온 가야계 유민들인 것이다.

 

 

(박스처리)

<일본인과 신사참배>

 

일본에는 10만 7천 개의 신사가 있다. 신사는 신궁, 신사, 대사로 나뉜다. 신궁이이란 왕이나 왕족들이 죽으면 그 신을 모시는 곳이다. 즉, 명치신궁처럼 명치천황을 모시는 곳이다. 신사란 일본의 귀족들이 죽으면 그 귀신을 모시는 곳이다. 대사란 일본의 죽은 평민들을 모시는 곳이다. 일반적으로 이 3가지를 합쳐서 신사라고 부른다.

오늘날 문제가 되고 있는 야스쿠니 신사도 바로 이 신사 중의 하나이다. 도쿄에 있는 야스쿠니 신사는 2차 세계대전 때 싸우다 죽은 4만 5천 명의 군인들의 혼을 모셔놓은 곳이다. 그 당시 전쟁을 지휘하던 노기 대장을 비롯한 일본의 전쟁 영웅들이 거기에 모셔져 있다. 한국인의 입장에서 보면 그들은 우리에게 원수나 다름없는 사람들이지만, 일본인의 입장에서 보면 그들은 일본을 위해 싸우다 죽은 군인들인 것이다. 일본 사람들은 누구나 사람이 죽으면 신이 된다고 믿기 때문에 그들의 혼을 신사에 모시는 것이 풍습이고 야스쿠니 신사도 죽은 자의 혼을 모신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그곳은 특별히 2차 세계대전 때 전몰한 군인들의 혼을 모신다는 점이 다른 것이다.

 

<가스가다이샤(春日大社)>

 

서기 768년에 세워졌으며 일본의 3대 신사중의 하나이다. 768년 후지하라가문이 만든 것으로 전통에 따라 19세기 말까지 20년 마다 새로 지어졌다. 경내에는 1800개의 석등이 양쪽으로 늘어서 있으며 복도 천장에 매달려 있는 금 속의 등은 1000개를 헤아린다. 또한 주홍색 건물과 주위의 숲이 아름다운 대조를 이루고 있다. 봄에는 등나무에 꽃이 피고 만요식물원에는 아름다운 식물들을 구경할 수 있으며 매년 여러차례 아악과 무악 등의 연주회가 열린다.

 

 

 

<시무식과 죤나시키>

 

1월 5일. 아침 9시.

금강조의 시무식이 있었다.

본사 직원 120명, 전직원이 5층 강당에 모였다.

금강사장의 간단한 인사말이 있고 난 후 전 사원이 테이블에 앉았다. 모든 테이블에는 대관(大關)이라는 상표의 청주와 백자병에 들은 청주 홍죽매(紅竹梅)가 놓여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과자 종류의 안주가 은박지접시에 담겨있었다.

사장이 건배를 제의했다. 전 사원이 술잔을 높이 들었다. 그리고는 모두다 기분좋게 한잔씩 들이켰다.

새해 출근 첫날은 늘 그렇게 시작한다는 것이었다. 사장이 술주전자를 들고 사원들 사이를 걸어다니며 술잔을 채워주었다. 헌데 부사장 금강정화씨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우리의 취재를 도와주고 있는 후지모리씨에게 물어보니 그는 이미 동경지방의 현장에 출장을 떠났다는 것이다. 새해 첫날 시무식에 부사장이 없다는 것이 웬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날은 금강리융사장(74) 혼자서 술주전자를 들고 돌아다녔다.

시무식은 간소하게 끝났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금강조의 사실상 시무식은 1월 11일에 있었다. 이 시무식 의식을 금강조에서는 전나시키(手斧始의 式)이라고 불렀다.

전나시키.

우리 말로 해석하면 <첫 손도끼의 의례> 라고 할 수있다.

첫 손도끼의 의례.

웬지 전통의 냄새가 강하게 풍기는 그 무엇이 있었다. 마음이 설�다.

<저 의식에는 뭔가 엄청난 것이 있다>

하는 그런 기대감이 가슴속에서 솟구쳐 올랐다.

후지모리씨도 자신이 죤나시키를 준비하는 당사자라며 상당히 긴장하는 표정이었다.존냐시키는 그 장소도 금강조 5층 강당이 아닌 사천왕사 내의 금당(대웅전)이었다.

 

 

< 첫 손도끼의 의례>

 

 

1월 11일 오후 3시.

기대하던 죤나시키가 시작되었다.

첫 순서는 금강조 회사 정문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금강사장이 그 옛날 백제식 관복과 관모를 쓰고 나타났다. 관복은 붉은 색이었는데, 옷소매가 치렁치렁 늘어질 정도로 넓었다. 첫눈에 백제 때의 고대복장이었다는 직감적으로 느낄 수있었다. 관모는 말총으로 만들어졌는데, 벼슬이 꿩의 꼬리처럼 늘어져 있어서 상당히 지체가 높은 고관의 복장이라는 것을 느낄 수있었다.

아아, 금강 사장이 입고 있는 저 관복과 관모는 대체 어느 정도의 벼슬아치를 의미하는 것일까.

분명 저 복장은 백제에서 건너온 제1대 금강중광이 입었던 바로 그것과 똑같이 만들은 것이리라. 그렇다면 저 복장을 연구해보면 제 1대 금강중광이 어느 정도 지체를 가졌던 기술자였는지 알 수있으리라.

저 복장은 백제의 것인가, 아니면 고대 일본의 것인가.

고대 일본의 관직은

臣(오미)-連(무라지)-君(기미)-直(아다에)-造(미얏꼬)-史(후다지)

로 나뉘어 진다. 소가의 집안은 신(臣)이었고, 물부의 집안은 무라지, 즉 연(連)이었다. 이는 모두 장관급 이상의 높은 벼슬아치들이다. 금강중광은 과연 어느 정도의 계급을 가진 기술자였을까.

부사장 금강정화씨도 고대 복장을 하고 나타났다. 다만 그의 복식은 곤색에 가까웠는데, 관모의 벼슬이 없다시피 짧았다. 그리고 이어 12명의 권대공(權大工)이 나타났다. 그들의 복장은 모두 검은 색으로 관모에는 벼슬이 없었다.

그들은 모두 회사 건물입구에 마련된 나무 물통에 손을 씻고 창호지에 손을 닦은 후 행렬을 시작했다.

행렬의 입구에는 하얀 소복을 입고 창을 든 두 남정네가 앞장섰고, 그 뒤에는 권대공 12인이 따랐으며 그 뒤에 부사장, 그리고 맨 마지막이 금강 사장이었다.그들은 하얀 버선에 일본 ‘쏘리’ 신발을 신고 천천히 사천왕사의 금당을 향해 걸어갔다.

금당에 일행이 도착했다.덜컹 쇠문이 닫혔다.문이 닫힌 이상 누구도 나갈 수도 들어 갈수도 없었다.

금당안은 캄캄했다.대형 불상 앞에 촛불 두 개만이 달랑 켜져 있을 뿐이었다.불상을 중심으로 좌측에는 금강조 회사 사람들이 앉았고,오른쪽에는 사천왕사 대표로 참석한 스님 세사람이 좌정했다.그 스님들의 뒤에는 금강조 회사와 관련된 업자들과 금강조 직원들이 입회했다.

사회는 금강조 영업과장 야마모도(45)씨가 맡았다.

불상이 있는 제단 아래에는 25센티*25센티*1.8미터 정도의 대들보가 놓여져있고,젯상에는 40센티 정도 되는 도미구이 두 마리가 불상의 오른쪽과 왼쪽에 각각 한 마리씩 놓였으며

처음에는 권대공 한사람이 나와 눈금이 그려진 고려척에 흰 종이를 달고 참석자들의 머리 위에 대고 흔들었다.그것은 미루어 짐작컨대 오늘의 의식을 시작하기에 앞서 재앙을 쫓는다는 의미처럼 보였다.이어 부사장이 눈금이 새겨진 2미터 길이의 고려척을 전방을 향해 높이 쳐들고 눈대중을 하는 시늉을 했다.그 행동을 두 번 반복하더니 세 번째에는 탕 소리가 나도록 바닥의 대들보같은 나무에 내리쳤다.그가 자리에 가서 앉았다.

이를테면 고려척으로 나무를 쟀다는 의미가 있는 행동이었다.

이번에는 권대공 두 사람이 일어나 먹통과 먹줄을 가지고 여러번 갸늠하더니 그 나무에 먹줄을 매기는 행동을 취했다.그리고 다른 권대공이 일어나 부처님에게 술을 공양했다.

마지막으로 금강 사장이 일어나 연장을 들었다.그가 든 연장은 끌이었다.나무의 껍질을 벗기는 끌인데,그걸로 금강 사장은 나무 껍질을 벗기는 시늉을 했다.나무껍질을 벗기고 나자 그는 나무의 표면을 다듬는 끌로 그 표면을 다듬는 시늉을 했다.입을 굳게 다물고 아주 결기있는 표정으로 사장은 마지막에 ‘에에이’ 하는 큰 소리를 지르며 의식을 끝내었다.

그리고는 부처님 앞에 서서 축문을 읽는 것이었다.

보통 축문부터 먼저 읽고 행사를 치루는 것이 아니라 행사부터 하고 축문을 맨 마지막에 읽는 것이 좀 특이했다.

축문 읽기가 끝나자 부처님 앞에 바친 술을 사천왕사 측의 스님과 금강조 집안의 사람들이 나눠마셨다.

그걸로 행사는 끝이 났다.

행사는 아주 엄숙했고,또한 장엄했다.

금강조에서 제공한 팜플렛을 보면 그 옛날의 언제서부터인가 이 행사를 했다고 하는데,그 유래는 성덕태자가 사천왕사를 창건할 당시 백제로부터 건너온 네명의 기술자 중에 금강가를 사천왕사의 정대공(正大工)으로 임명한 후 그러한 의식을 매년 치루도록 명령했다는 것이다.

사천왕사가 완공된 것이 서기 593년의 일이니까 죤나시키라는 이 의식은 서기 593년부터 행해졌다고 할 수있다.

여기서 한가지 얘기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축문의 내용이다.

금강리융 사장이 읽은 축문의 내용은 사실 심상치 않은 것이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그들의 조상이 어떻게 건너와 사천왕사 건립에 참여했다는 언급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금강 사장에게 그 축문을 보여줄 것을 요청했다.그러나 금강조 측은 축문은 신에게 바치는 것이므로 인간에게는 보여줄 수없다고 거절했다.몇번의 요청이 있고 나서 결국 금강조 측에는 우리에게 그것을 공개했다.

그 내용은 이러하다.

<먼 옛날 팔이 황자께서 우리를 바다 건너 백제국으로부터 부르시어 우리에게 일을 주시고 우리에게 봉록을 주시어 세세천년 우리가 사천왕사를 지키고 가업을 잇게하여 주시었으니 우리는 매년 정월 열하루날을 기해 그 은혜를 갚고자 하나이다>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팔이(八耳)황자는 성덕태자를 말함이다.

팔이 즉 귀가 여덟 개라는 말은 귀가 여덟 개가 아니라 귀가 많다는 뜻이고,이것은 달리 말해 남의 말을 잘 듣는 즉 백성의 의견을 잘 수렴하는 현군이라는 의미이다. 즉 축문에는 현군인 성덕태자가 백제에서 자신의 조상을 불렀다는 것이 명시되어 있는 것이다.

이로서 금강 집안이 백제에서 건너왔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로 보였다.

 

 

<미마지>

 

 

 

612년 백제의 미마지가 도래해왔다.

성덕태자는 기량이 있는 소년을 뽑아 이 새로운 대륙의 예술을 배우게 했다.

지악은 뒷날 아악료에 전해져 궁정음악이 되었다.(다무라엔초.성덕태자.홍윤기.166)

 

612년 백제의 미마지,일본에 귀화(김홍철)

*미마지(미마지)는 오늘날 노오(能)의 원조인 算樂을 일본에 전한 사람이다.

고로,노오는 백제시대에 잇엇던 예술양식이다.(뚜르드몽드 97년 1월호)

때는 서기 612년.

미마지(味麻之)라고 불리우는 백제의 장인이 일본의 나라에 건너갔다.612년이면 백제의 무왕 시절이다.

일본에는 성덕태자가가 집권하고 있던 그 시절,미마지는 일본왕의 초청으로 일본에 건너갔다.

왕의 요청은 산악(散樂)이라는 연극을 일본에 가르쳐달라는 것이었다.

산악이 어떤 연극인지 그것은 구체적으로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짐작컨대 산악은 백제에서 귀족들이 즐기던 아주 고급한 형태의 어떤 연극이었던 모양이다.

일본의 왕은 바로 그 산악이라는 연극을 동경했던 모양이다.그렇게 해서 백제국에 간청한 결과 미마지가 일본에 건너가게 된다.

여기에 대해서 <일본서기>는 그저 간단히 백제의 미마지가 일본에 건너왔다고만 되어 있다. 미마지는 일본에 건너와서 어디서 어떠한 일을 했던 것일까? 그에 대한 해답이 사천왕사에 남아있다. 사천왕사 경내에는 오늘도 ‘무대강’이라는 돌무대가 남아있다. 바로 그 돌무대 위에서 미마지가 사자춤을 공연했던 것이다. 그 공연을 본 일본의 귀족들은 미마지에게 사자춤을 일본의 청년들에게 가르치게 했고 그후 미마지는 일본에서 사자춤과 가면극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게 된다.

 

 

<사천왕사 공사 때의 노동자들의 식단>

 

당시 공사에는 수천 명의 기술자와 노동자들이 동원되었다. 금강중광과 같은 공사감독관은 비교적 좋은 대우를 받으면서 일을 했고, 그 밑에서 각 부문의 공사를 맡았던 공사기술자들도 비교적 좋은 대우를 받았으나 일반 노동자들은 매우 힘든 공사였다. 당시 일본에서는 절이나 궁궐 등의 건물을 신축하게 되면 농번기를 피해 백성을 징발했다. 그러나 너무 힘든 중노동이었기 때문에 징발된 백성들은 죽거나 다치거나 영양실조로 사망하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징발령이 떨어지게 되면 산속으로 도망가는 농민들도 부지기수였다. 당시 공사에 징발된 노역자들의 식단을 보면 그들이 공사에 동원되어 일을 하다가 죽을 수밖에 없는 사정을 짐작하게 된다. 당시 노역자들에게 제공된 식사는 보리밥 한 그릇과 소금, 미역, 국 한그릇이 전부였다. 오늘날 현대의 식품영양학자들이 그 식사량을 그대로 재현하여 분석해본 결과 당시 노역자들의 식사가 인간에게 제공할 수 있는 칼로리는 총 407칼로리였다. 끼니당 407칼로리 정도의 식사를 제공받았는데, 그것도 하루에 세끼가 아니라 두끼였다. 고대에는 사람이 두끼 식사밖에 하지 않았던 것이다.

오늘날 30대 남성이 하루에 필요한 열량은 2450칼로리이다. 그러나 당시의 노역자들이 섭취한 열량은 불과 814칼로리 정도였던 것이다. 절대적인 영양부족상태에서 공사에 동원되어 무려 6년 간 공사 현장에서 일했다. 따라서 상당수의 노역자들이 공사가 채 끝나기도 전에 영양실조로 사망했을 것이다.

일반 노역자를 지휘하던 기술자집단의 경우 그들은 매끼니마다 평균 725칼로리의 음식을 제공받았다. 그 식단의 내용을 보면 보리밥 한그릇, 생 오이 한 개, 생선 구이 2마리, 미역 한 접시, 생채소 한 접시, 소금, 막거리 한 잔, 약초죽 등이었다. 이 모든 것의 열량을 계산해 보면 725칼로리가 나오고 그들은 하루에 1450칼로리의 영양분을 섭취했던 것이다. 그들 또한 현대인이 필요한 하루 섭취량에 비해 약 1000칼로리가 부족하다. 그들에게도 역시 사천왕사의 공사는 힘에 부쳤을 것이다.

반면에 공사를 책임지고 있던 감독관의 경우는 매 끼니마다 약 1245칼로리의 식단을 제공받았다. 그 식단을 보면 흰 쌀밥 한 그릇, 멸치 등 생선이 들어간 국 한 그릇, 은어구이 2마리, 미역 무침, 도미무침, 전복과 성게알 무침, 한천 한 접시, 강낭콩, 호도와 귤, 간장, 소금, 청주 한 사발에 치즈까지 제공되었다.

그들 공사감독관들은 일반 감독관이나 노역자들과는 다르게 보리밥이 아닌 쌀밥을 제공받았으며 반찬 또한 양질의 것을 제공받았다. 그 중에서도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공사감독관들에게 치즈가 제공되었다는 것이다. 지금부터 무려 1500년 전에도 일본에는 치즈가 있었다. 당시 일본인들이 먹던 치즈는 소의 젖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양의 젖으로 만든 것이었다. 양젖으로 치즈를 만드는 제조기술은 유럽 쪽에서 건너온 것이 아니라 아시아 북방의 유목민들이 만들어 먹던 것이었다. 짐작컨데 그 기술은 고구려와의 문화교류를 통해서 건너왔던 것일 것이다. 즉 고구려는 만주 지역의 유목민들과 이웃하고 있었고 그들로부터 치즈를 만드는 기술을 배워 이미 그들 자신이 치즈를 상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낟. 바로 그 기술이 일본까지 전파된 것이다.

서기 500년대의 일본에는 고구려의 문화가 많이 건너왔다. 이미 알려진 사실이지만, 일본 나라 지역에서 발견된 기토라고분의 경우 발굴 당시 거기에 그려진 벽화가 일본과 한국의 사학계에 큰 충격을 던져준 바 있다. 기토라 고분의 천장에 그려진 벽화는 천문도였다. 그 벽화에는 북두칠성과 북극성, 황소자리, 오리온 자리, 시리우스자리 등이 표시되어 있었고, 원으로 태양이 지나는 길인 황도와 적도가 표시되어 있었는데, 그 별들의 위치와 운행궤도를 분석해본 결과 그 밤하늘의 관측지점은 북위 38도-39도 사이에 있는 황해도와 평안남도 경계선에서 관측되었다는 것으로 결론지어졌다. 관측시기는 기원전 3세기에서 기원후 3세기 사이였으며 장소는 오늘날 평양 부근이었다고 분석된 것이다. 당시 그 고분에는 무려 600개의 별과 34종의 성좌가 그려져 있었으므로 일본 동해대학의 정보기술센터는 그러한 별자리를 토대로 관측의 위치와 시기를 추정해낼 수 있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거기에 그려진 천문도는 평양의 밤하늘이엇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보아 기토라고분의 부장자는 고구려인의 귀족이라고 결론지어졌다. 오사카에서 과히 멀지 않은 나라 지방에 이미 고구려의 고분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고구려와 일본의 문화교류는 짐작하고도 남은이 있는 것이다.

 

 

<족보>

 

 

1월8일.

금강집안에서 소장하고 있는 족보 및 가전 문서류 일체를 공개했다.모두 귀중한 물건들이어서 좀체로 내놓지 않는 것들이었다.

금강사장 자신은 외출 중이어서 후지모리씨가 입회한 가운데 문서가 공개됐다.

내가 금강가의 족보를 본 것은 두 번째였다. 당시 한국인에게는 처음으로 공개한다고 했다.

그때 한 번 본 일이 있었으나 사실 자세히는 보지 못했다.처음 대하는 물건이라 엄벙덤벙하다가 제대로 기록을 못했던 것이다.

그런터라 두 번째 공개에서는 열심히 기록하려고 노력했다.

금강가에서 공개한 문건은 모두 14점이었다.

<금강씨유서(由緖)>를 비롯한 족자가 8점, 제32대 금강여팔랑(金剛與八郞)의 유언집이 2점, 1883년에 간행된 공장도서(工匠道書) 1점과 <유류구전(柳流口傳)>, <어수상(御首箱)>, <유씨가계도(柳氏家系圖)> 등이었다.

우선 제일 관심이 가는 것은 역시 족보인 유씨가계도였다.

거기에는 제1대 금강중광에서부터 제39대 금강리융에 이르는 금강집안의 계승자들이 적혀있었다. 족보는 폭 30센티에 길이가 4-5미터에 이르는 비단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족보가 만들어진 시기는 약 350년전이라 하는데, 우리나라에는 이 문건이 처음 공개되는 것이므로 후일의 일본 고대사 연구가들을 위하여 그 명단 전체를 밝혀놓을 필요가 있어 여기 모두 기록해 놓는다.

거기에 기록된 39대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1대 중광(重光)

11대 중유(重遊)

21대 중영(重永)

31대 중정(重正)

2대 중추(重秋)

12대 중실(重實)

22대 중도(重道)

32대 희정(喜定)

3대 중리(重里)

13대 중달(重達)

23대 중열(重悅)

33대 희행(喜幸)

4대 중유(重由)

14대 시본(是本)

24대 중정(重正)

34대(미상)

5대 중성(重成)

15대 시방(是房)

25대 시칙(是則)

35대 희영(喜永)

6대 중의(重儀)

16대 중종(重宗)

26대 중방(重房)

36대 중표(重表)

7대 중도(重道)

17대 중계(重繼)

27대 시약(是若)

37대 치일(治一)

8대 낭칙(琅則)

18대 시성(是盛)

28대 중구(重矩)

38대 요시에

9대 중우(重祐)

19대 중의(重義)

29대 중로(重路)

39대 리융(利隆)

10대 중병(重並)

20대 시영(是永)

30대 중춘(重春)

 

 

이 족보를 보면 금강집안은 주로 무거울 중(重)자를 돌림자로 취했음을 알 수있다. 그러다가 제 8대에 이르러 느닷없이 랑칙(琅則)으로 이름이 바뀌어 버린다. 금강 사장이 입회하지 않았고, 물어 볼 기회가 없어서 유감이지만 8대는 미루어 짐작컨 대 양자가 아니었는가 추측된다.

일본 사회에서 자식이 없을 경우 양자를 들이는 것은 아주 흔한 일이고 자연스러운 일이므로 그는 양자일 가능성이 많다.

또한 14, 15대의 경우도 돌림자가 시(是)로 바뀌었는데, 이 경우도 양자일 가능성이 높다. 또18대, 20대, 25대, 27대의 경우도 돌림자 시(是)로 바뀌고 있으며 32, 33, 35대의 경우에는 기쁠 희(喜)로 돌림자가 바뀌어 있다.

이 경우도 정상적인 대물림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37대 금강치일의 경우는 금강가가 최대의 비극을 맞은 경우이다.

 

 

<금강치일의 할복자살>

 

 

제 37대 금강치일은 오늘날의 39대 금강리융 사장의 장인이다.

금강치일은 1934년 할복자살했다. 그가 자살하게 된 것은 그의 대에서 회사가 망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37대 1400여년간 이끌어 오던 회사가 일감이 없어 망하게 되자 마지막까지 회사에 남아있던 2명의 직원들에게 회사를 사직할 것을 권유했다. 그러나 그들은 월급을 받지 못한다 하더라고 계속 일하겠다고 고집했다고 한다. 그 두 명의 직원들은 자기 당대에서부터 금강집안과 함께 일한 것이 아니라 벌서 여러 대에 걸쳐 일을 해왔으므로 경기가 어려워 봉급을 못 받는다고 회사를 그만둘 수 없다며 사직을 사양했던 것이다.

그 다음날 금강치일은 아내에게 소복을 준비하라고 한다. 하얀 소복으로 갈아입은 금강치일은 어리에 칼을 차고 부인과 두 딸을 데리고 선산으로 갔다. 금강집안의 선산은 사천왕사 안에 있다. 사천왕사를 그의 조상이 지었으므로 사천왕사측에서 묘를 쓰도록 배려한 것이다. 금강치일은 조상의 묘 앞에 가서 술을 따른 후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지금까지 37대 1300여년간 조상님들이 회사를 잘 이끌어오셨으나 제 때에 와서 망했습니다. 가업을 지키지 못하고 회사가 망하게 되어 조상님들에게는 면목이 없습니다. 무려 1000여년간 지켜오던 가업을 제가 지키지 못했으므로 조상님 앞에 죽음으로써 참회하겠습니다.”

라고 말하고 난 후 그는 부인과 두 딸이 지켜보는 가운데 할복자살해 버렸다.

부인인 금강요시에와 두 딸은 아버지가 자신들 앞에서 할복자살하는 처참한 광경을 보았다. 만일 한국 같으면 그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아버지가 칼을 빼어 자결하려는 순간 아내와 자식들이 달려들어 아버지의 칼을 뺏으며 울고불며 말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면에서 일본인과 한국인은 다르다. 자신의 잘못을 참회하고자 죽음을 결행할 경우 아무도 말리지 못하는 것이 일본인의 성정이다.

금강집안 1300년 동안, 전대미문의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지금은 부인인 금강 요시에와 딸 금강절자(金剛節子)와 치자(治子)가 모두 사망해버렸으므로 당시 사건의 목격자는 현재 없는 셈이다.

따라서 현재 전해져 내려오는 얘기는 구전이다.

당시 금강조가 망하게 된 배경을 금강리융 사장은 ‘영업의 부재’때문이었다고 설명했다.

금강치일은 상당히 고지식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주는 일감만 받았지 스스로 일을 따 오는 일은 전혀 하지 않았다고 한다. 더구나 당시 일본은 중일전쟁으로 절을 신축한다든지, 증축하는 등의 일감이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오는 일감만을 기다리는 것은 사실 상 앉아서 죽음을 기다리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금강치일이 회사가 망해가는데 팔짱만 끼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전쟁터에서 죽은 군인들의 관이 갑자기 많이 필요하게 되자, 관을 짜서 납품하는 일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는 회사를 운영하기가 어려웠다. 결국 회사의 재정이 한계에 부딪치자 그는 마지막 선택을 하게 된 것이다.

37대 금강치일의 자살은 그의 고지식한 성격과 사회환경이 빚어낸 복합적인 것이었다고 볼 수있다.

초상을 치른 사흘 후 금강치일의 부인 금강 요시에는 소복을 입고 사천왕사를 찾아갔다.

그리고 사천왕사 주지에게 지난 1400년간 자신의 집안이 사천왕사를 위해 일해 왔으므로 일감을 달라고 애원했다. 지난 1400년간의 공로를 보아서라도 한 번만 살려달라고 애원한 것이다.

사천왕사 주지는 사천왕사 내의 오중탑(높이 48미터)을 다시 세우는 일을 맡겼다. 1934년 9월 21일 제 1호 무로도(室戶)태풍으로 오중탑이 완전히 부서져버렸기 때문이다. 무려 48미터 즉 16층 높이나 되는 나무탑을 다시 세우는 일은 쉽지 않았다. 과거에는 80미터까지 되는 목탑이 존재했었다고 한다. 바로 우리나라의 경주에 있었던 황룡사 9층탑이 82미터의 목탑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현대의 토목기술로는 34미터 이상의 목탑을 세우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한다. 몇 년 전 충청북도 진천에 있는 보탑사에서도 목수 신영훈의 설계로 한국최고의 목탑을 세우기 위해 설계를 하고 실제로 지어본 결과 34미터 이상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었던 것이다. 결국 사천왕사의 오중탑은 과거의 장대한 목탑을 포기하고 철근콘크리트에 탑을 세우게 된다. 그러나 철큰콘크리트탑이라고 해도 높이가 무려 48미터나 되는 탑을 세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금강조의 기술이 뛰어나다고 하지만 철근콘크리트로 탑을 세우는 일은 경험이 별로 없었던 것이다. 당시 금강조는 사천왕사 오중탑의 설계를 지금은 작고한 천소준일(天沼俊一) 박사에게 맡겼고 감독은 대포덕태랑(大浦德太郞)씨에게 맡겼다.

금강치일의 부인 금강 요시에도 소복을 입은 채 금강조 직원들을 데리고 11년간 공사를 진두지휘했다. 흩어졌던 미야다이코와 직원들은 일심합력하여 오중탑을 재건했다. 오중탑은 1945년 3월 13일 밤 완공되었다. 탑이 완공되고 낙성식이 있던 날 공사관계자와 금강 요시에 여사는 모두 눈물을 흘렸다. 할복자살로 남편을 잃고 가녀린 여자의 몸으로 금강조를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이다. 금강조 집안에서 보여준 사진을 보면 공고 요시에 여사가 하얀 소복을 입고 남자들만이 일하는 거친 공사 현장에서 일하는 광경이 남겨져 있다. 당시 그 사진은 오사카의 일간 신문에서 취재한 것으로 그들 일간신문에서는 ‘장한 어머니’라는 제목으로 금강 요시에 여사의 활약상을 그리고 있다. 그리고 금강 요시에 여사의 그러한 모습은 도쿄의 일간 신문에까지 게재된다. 어느날 도쿄의 일간 신문을 읽은 일본 천황 히로히도는 오사카까지 내려와 금강 요시에 여사를 격려해주었다고 한다. 오중탑의 재건과 함께 금강조도 다시 살아났다.

그리고 회사를 직접 더 경영하다가 금강 사장이 25세 되던 1950년 금강조를 금강리융 사장에게 넘겼다.

 

 

<“술을 마시지 말라”는 유언>

 

 

다시 금강조 측에서 공개한 문건으로 얘기를 돌린다.

공개된 문건 중에서 흥미를 끄는 것은 32대 금강 여팔랑(與八郞)의 유언집이다.

그 유언집은 약 50페이지 정도의 작은 소책자이다.

여기에 쓰여진 내용 중에 흥미를 끄는 것은

첫째 선조의 묘에 매년 헌향하라

둘째, 안좋은 일이 있을 때는 친척들이 모여서 상의하라.

셋째, 술을 많이 마시지 말라

는 것이었다.

첫 번째 유언인 선조의 묘에 매년 헌향하라는 것은 금강조 집안의 조상숭배에 대한 정신을 알 수 있다 서기 478년 회사를 창업한 이후 금강조집안은 자신들의 조상에 대해 끔찍할 정도로 외경심을 가지고 사업을 해왔다. 그러한 전통이 면면히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둘째 안좋은 일이 있을 때는 친척들이 모여서 상의하라는 말은 금강조집안의 단합을 나타낸다. 금강조가 제 1대에서부터 40대에 이르는 동안 그들의 인척은 수 천, 수 만명이 될 것이다. 그 중에서도 오사카에 사는 8촌 이내의 인척들만 해도 수 백명이 된다. 물론 그들은 대부분 지금은 금강조와 사업적인 관계가 없다. 하지만 그들은 금강조를 자신들의 하나의 구심점으로 삼고 있으므로 금강조가 흔들릴 때마다 대소사를 함께 의논하는 것이다.

셋째로 술을 많이 마시지 말라는 유언은 술을 많이 마시면 내일의 일에 충실할 수 없을 뿐더러 회사까지 말아 먹는다는 경고가 담겨있었다.

그러한 경고 금강집안이 1400년을 유지해오기 위해 얼마나 섬세한 부분까지 신경을 썼는가 하는 것을 느끼게 해준다.

그 다음에 눈길을 끄는 문서 중에 <공장도서(工匠圖書)>가 있다.

이 공장도서는 여러 책이었다.

가장 오래된 것은 400년전의 것으로 사천왕사의 보수기록부이다.

즉 사천왕사 내의 건물을 수리했을 때 어느 부분을 어떻게 고쳤는지를 그림과 글씨로 자세하게 기록해 놓은 것이다.

또한 1883년에 작성된 <공장 도서>의 경우는 사천왕사의 오중탑을 인간의 신체에 비유해 그림으로 그려놓고(사진) 거기에 삼각함수까지 동원하여 이미 그 당시 상당히 고차원적인 현대 수학의 개념이 도입되었음을 알게 해주고 있다.

마지막으로 대단히 의미심장한 문건은 <유씨 구전>과 <유씨가계도>였다.

유씨 구전과 유씨가계도는 모두 만들어진지 그리 오래된 문서들은 아니었다.

<유씨구전>은 한지로 색이 바래있었으나 2백년이 넘지 않는 붓글씨로 쓰여진 필사본이었는데, 해서로 쓰여져있어 해석하는데는 시간이 좀 걸리는 문서였고,<유씨가계도>는 만들어진지 100년이 안된 것으로 보였다.

<유씨가계도>의 경우 금강씨 족보와 마찬가지로 금강집안의 1대부터 39대에 이르는 사람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금강씨의 본래 성이 버들 유씨였음을 나타내고 있었다.

본래 그들의 성은 유(柳)씨였던 것이다.

훗날 집에 돌아와 그들 집안의 족보를 추적해보니 그들은 전주에 본관을 둔 문화 유씨 였다. 전주 문화 유씨 종친회에 전화를 걸어 서기 578년 경 일본으로 건너간 유중광이라는 사람이 족보에 등재되어 있는가를 물었다. 문화유씨 종친회 측에서는 그렇게 오래된 사람의 이름은 족보에 등재되어 있지 않다고 대답해 주었다. 유중광의 이름을 문화 유씨 족보에서 찾을 수 없는 것은 대단한 유감이었다. 한국의 족보학은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000년이 넘는 사람의 이름은 찾을 수가 없었다.

그의 1대 조상이 백제에서 건너올 당시 본래 유씨였는데, 그의 탁월한 건축 솜씨를 보고 용명천황(585-587)이 그에게 <금강>이라는 성을 하사했다는 것이다. 그때부터 유씨들은 <금강조>로 불리워지게 된 것이다.

유씨.

그들은 본래 전주를 본관으로 둔 문화 유씨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온 나머지 다문, 도자, 중촌의 세 기술자는 어떻게 된 것일까.

금강 사장의 말에 따르면 사천왕사가 완성되자 성덕태자는 사천왕사를 금강에게 맡기고, 그에 따른 봉급을 주었으며 나머지 세사람은 오늘날 나라시의 이카루가(生斑)에 있는 법륭사를 짓도록 명했다는 것이다.

법륭사는 오늘날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물인 몽전이 남아있는 유서깊은 사찰이다. 또한 법륭사는 그 전체가 1993년 세계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된 바 있다.

다문, 도자, 중촌은 성덕태자가 두 번째로 발원하여 짓게 된 법륭사로 가서 그 절을 지었으나 그들은 그후 특별한 봉록을 받지 못하게 되어 건축가로서 대가 단절되고 말았다고 한다.

이 부문은 어떠한 역사 책에도 그 설명이 나와 있지 않으므로 일단 금강리융 사장의 가전(家傳)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여기 실낫같은 단서가 하나 있다.

 

 

<니시오카는 누구의 자손인가?>

 

 

니시오카 츠네카츠(西岡常一)라는 목수가 있다. 그는 대대손손 목수의 자손이라고 한다. 그의 가문은 언제부터인지 법륭사의 목수로 일해왔다고 한다. 통상 일본의 학계에서는 니시오카 집안이 약 300년간 법륭사의 목수로 일해왔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니시오카 자신은 자신의 집안이 언제부터 법륭사의 목수로 일해왔는지는 잘 모른다고 했다. 기록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니시오카씨는 오늘날에도 일본의 크고 작은 절을 짓는 궁대공(미야다이쿠 : 도목수)이다. 궁대공이란 궁이나 절을 짓는 최고의 목수를 말한다. 그 자신 어렸을 때부터 할아버지의 손이 이끌려 법륭사 곳곳을 돌아보면서 건축에 대해 배워온 사람이다.

그 후 그는 자신의 가업을 이어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궁대공이 되었고 지금 현재도 절을 짓는 일을 하고 있다. 그가 절을 짓고 있을 때, 이따금 할아버지가 다녀가곤 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네가 짓고 있는 절을 돌아보고 느낀 것인데, 한 번더 법륭사를 찾아가서 중문기둥이 어떻게 세워져 있는지를 보고 오길 바란다.”

라고 충고를 하기도 했다.

니시오카시는 법륭사를 하나의 거대한 도감으로 삼고 있다. 법륭사 자체가 이미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1300년된 목조건물이기 때문에 그 목조 건물을 관찰함으로써 새로운 지혜를 얻는 것이다. 궁대공 니시오카씨는 1000년 이상을 지탱하는 건축물을 지으려면 수령이 1000년된 노송을 서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다. 1000년 자란 나무는 목재로 썼을 때, 역시 1000년을 간다고 믿기 때문이다.

오늘날 법륭사의 골조는 그 절이 세워지던 1400년 전 이미 1000년 이상된 노송을 사용했다. 지금도 법륭사의 목조건물을 수리할 때 기둥의 일부를 대패로 밀어보면 향내가 난다고 한다.

필자는 니시오카씨의 조상이 혹시 성덕태자의 명령에 의해 법륭사를 짓기 위해 건너갔던 다문, 중촌, 도자 중 한 사람의 자손이 아닐까 추측을 하고 있다.

 

 

<금강조의 구조>

 

 

- 궁대공은 10년 이상 근무해야 그 자격을 인정 받으며 보통 목수는 5년간의 수업기간이 끝나야 목수로 인정 받는다. 금강조에서 쓰는 나무는 히노키이다. 히노키가 품질이 좋기 때문이다.

 

- 목수는 궁대공과 정대공으로 나뉜다.

 

- 전나시키를 하러가기 위해서 손을 씻고 고개를 흔드는 것을 악마를 쫓기 위한 행동이다. 그들이 손을 씻는 것은 인간은 불순한 존재이므로 깨끗이 하면 신에게 가까이 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 신선한 술을 부어 나무에 스미게 한다.

 

- 전나시키에 사용된 나무봉은 오래된 벗꽃나무로 만들어진 것이며 오래된 벗꽃나무는 매우 단단하기 때문이다.

 

- 금강조가 기초공사를 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은 그렇게 해야만 건물이 지진이 와도 쓰러지지 않기 때문이다.

 

- <작업 원칙>

 

 

1. 궁대공은 낮에는 공사현장에서 일하지 않는다. 기술의 비법이 알려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외부사람이 없을 때는 낮에도 일을 한다.

2. 금강조만의 특별한 기술이 있는데 이것을 도둑맞지 않기 위해서이다.

3. 일본에는 절만을 전문적으로 짓는 사원건축전문회사가 약 4개 정도 있다. 이들 회사와 금강조의 공사 가격은 비슷하지만 일반 건축회사들에 비해서는 월등히 비싼 가격에 절을 짓고 있다.

4. 싸게 공사를 수주 받아 대충 만들기 보다는 비싸게 입찰을 받아 공사를 제대로 하는 것이 금강조의 신조이다.

 

-설계부장 야부데츠오(藪哲郞 62세)씨는 99년 현재 41년째 금강조에 근무하고 있으며 오사카 공업대 건축학과 출신이다. 그가 16세에 금강조에 입사한 것으로 보아 그는 금강조 근무 중에 대학을 졸업한 것으로 보인다.

 

- 야부데츠오 설계부장 밑에는 12명의 설계사가 있다. 그들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설계 1팀에는 오다, 야마오치, 하기노, 야마오치 씨와 부장인 야부데츠오 씨등 5명이며 설계 2팀의 경우 미우라, 후지이, 야마모토, 고지, 곤도, 와이(여사원) 등이 있다. 설계부에 근무하는 직원들은 신입사원부터 베테랑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예컨대 고지 히로이키(鄕司啓之 46세)씨의 경우 입사한 지 26년이 경과했으며 그는 컴퓨터 CAD로 설계 작업을 하고 있다. 오사카 출신이며 현재 그가 설계하고 있는 공사는 오사카의 팔검신사(八劒神社)이다.

야부데츠오 설계부장이 이끄는 금강조 설계부는 다음과 같은 공정의 순서에 따라 일하고 있다.

 

첫째, 공사 발주자와 회합을 갖는다. 이때 공사 발주자의 요구조건을 상세히 듣는다.

둘째, 발주자의 의사에 따라 기획 설계를 한다.

셋째, 기획 설계안을 공사발주자에게 보여주고 상이한 점을 찾아내서 공사발주자에게 맞는 설계를 다시 한다 이것을 실시설계라 한다.실시설계가 끝나면 공사에 착수한다. 공사에 착수하기 전 절이나 신사의 지붕은 그 크기와 똑같이 합판으로 사전에 제작한다. 이것을 원촌도(原村圖)라고 한다. 절이나 신사에서는 지붕의 모양새가 매우 중요하므로 실제 지붕 크기의 합판과 나무로 똑같이 제작해보는 것이다. 이들 기획 설계부가 설계하는 공사 건물은 1년에 150개 정도로 취재 당시에 그들은 32개 공사 현장의 설계도를 맡고 있었다.

 

 

<금강조 본사 구조>

 

금강조 본사는 사장 금강리융씨 밑에 부사장 금강정화씨가 있고 그 아래 설계부, 야기부장팀, 이께야마부장팀, 나오키 부장팀, 자재부, 적산부(積算부 4명) 관동지점 등 6개의 부서 외에 총무부(17명)가 있다. 설계부장은 야부데츠오씨가 이끌고 있으며 하기 부장과 이께야마 부장, 나오키 부장은 모두 각각 8개의 공사현장을 갖고 있다. 자재부는 이들 공사에 자재를 공급하는 일을 맡고 있고, 관동지점은 노인홈(양로원)이나 연립주택 등의 공사를 하고 있다. 적산부는 공사비 규모를 산출하는 부서이다. 적산부의 부장은 오오모토 마사하로(大本正治)이다.

금강조의 핵심부서인 설계부의 야부데츠오 부장에게 금강조가 추구하고 있는 건물의 가장 이상적인 모델은 일본 내의 어떠한 것이냐고 물었다. 부장은 교토에 있는 평등원을 일본 건축의 백미로 꼽았다. 그가 평등원을 일본의 고대 건축물 중에 가장 우수한 건물로 꼽은 이유는 균형이 맞고 밸런스가 잘 잡혀져 있으며 곡선미가 화려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평등원은 교토의 우치시에 있다. 평등원은 현재 쎄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는 고찰이다. 평등원이 만들어진 것은 1052년이다. 본래는 관백등원도장이라는 사람의 집이었는데 그것을 절로 만든 것이다. 평등원 내에서 가장 뛰어난 건물로 손꼽히는 것은 봉황당이다. 봉황당은 중당, 양익랑, 미랑 등 4채의 건물로 구성되어있으며 현재 일본의 국보이다.

99년 2월 현재 금강조가 시행하고 있는 공사 중에서 대표적인 공사는 교토의 교토시 서경구 대원야 소염정 1372번지에 있는 서산봉사라는 절과 히라가타 시의 금야본정 1-6-14번지에 있는 진광사이다.

 

- 32대 금강여팔랑이 남긴 유언서의 내용에는 이러한 내용이 있다.

1. 유불신 3교의 책을 읽어 세상과 사람을 알고

2. 견적 입찰에 주의해서 끝까지 마음에 어긋남이 없이 잘 기록해 놓을 것이며,

3. 금강조의 나아갈 방향을 써놓고 그것을 추구하면서 처음의 마음으로 돌아가 일에 중요성을 느끼며 기술자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4. 목수로서 기본적인 마음을 구체적으로 나타내야 하며 능력이 없는 자에게는 공사를 맡겨서는 안된다.

5. 술을 많이 먹지 마라.

 

- 금강조는 31대 째에서 가문이 분가되었다. 하나는 정대공 또하는 권대공으로 나뉘어진 것이다. 정대공은 목수로서 책임자이며 권대공은 그 아래 단계이다. 이 두 집안은 지금도 협력관계에 있으면서 줄곧 자신의 신분에 맞는 작업을 하고 있다.

 

- 오늘날 금강조는 전체공사중 절의 신축과 신사의 건축이 전체 공사의 60%이며, 요양원이나 연립주택 등은 약 40%이다. 금강조는 절이나 신사 공사의 일본 전국의 10%를 점유하고 있으며 1년에 약 60개 정도의 공사를 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점점 공사 수주가 늘어나고 있고, 또한 그들도 신규 공사의 확보에 주력하고 있다.

 

 

<성덕태자의 헌법 17조>

 

1. 화는 세상의 근본정신이다. 불, 법, 승의 3보를 존경하라.

2. 선의 기초는 믿음으로 귀의하는 마음이다.

3. 부름을 받는 것에 성실하라.

4. 관리는 예를 근본으로 하라.

5. 공무원들은 먹고 마시는 것을 자제하며 물질적인 욕심을 버려라. 또한 사람의 재판을 공명정대하게 하라.

6. 악을 멀리하고 선을 권장하는 것은 처음부터 착하게 되는 것이다.

7. 사람은 임무가 있다. 자신의 본분을 충실히 지켜라. 현명한 사람은 덕이 있으므로 임무를 맡으면 훌륭한 영광이 있지만, 게으른 자는 화를 불러 난을 만든다.

8. 관리는 직무를 잘하기 위해 일찍 출근하며 늦께까지 일하라.

9. 진심은 일을 하는 도리의 근본이다.

10. 마음 속에 한을 품지 말고 눈을 부릅뜨지 마라.

11. 공적도 있지만 과실도 있음을 십분 이해하라.

12. 지방장관은 세금을 함부로 받지 마라. 규정된 세금 이외에 권력을 이용하여 세금을 걷지 마라.

13. 관직에 종사하는 자는 서로 도와라.

14. 사람을 질투하지 마라. 내가 사람을 시기하면 사람도 나를 시기한다. 질투는 끝가는 데를 모른다. 지식이 자기보다 나으면 즐거워하지 않는다. 재능이 자기보다 나으면 질투한다.

15. 나의 이익을 무시하고 공(나라)을 위하는 것이 신하된 자의 도리이다.

16. 백성을 국가에서 쓰려고 할 때 시기를 가려서 써라. 농사가 바쁜 철에 백성을 동원하는 것은 좋지 않다. 한가한 겨울에 백성을 써라.

17. 일을 독단적으로 처리하지 마라. 작은 일은 많은 사람과 상의할 필요가 없지만, 중요한 일은 대화하여 도리를 명확하게 해서 해결하라.

 

 

 

 

 

 

<금강조 집안의 선산>

 

 

오늘날 금강조 집안의 선산은 사천왕사 안에 있다.

사천왕사 안의 묘역에는 금강조 집안 외에도 수백개 이상의 집안의 묘역이 있다.

금강조 집안의 묘역은 의외로 단촐했다.

부도탑은 모두 다섯개였다.

제 1대 조상부터 35대 조상까지를 하나의 부도탑에 모셨고, 36대 금강중표의 부도탑이 하나 있었으며, 37대 금강치일과 38대 금강 요시에 부부가 또 다른 하나의 부도탑에 합장되어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둘은 묘역의 입구에 별도로 세워져있었는데 그들은 직계 자손이 아니었다.

하나는 38대 금강 요시에 사장의 남동생이었고, 또 하나는 오늘날 39대 금강리융의 사장의 딸로 일찍 요절한 사람의 부도탑이었다.

말하자면 제1대에서부터 35대까지의 조상들은 그 이름만 부도탑에 적혀 있을 뿐 여타의 뚜렷한 특징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1400년간을 유지해왔다는 금강가의 묘역치고는 단촐했다. 그러나 37대 금강 치일이 바로 그 묘역 앞에서 할복자살을 했다는데 생각이 미치자 다소 숙연한 기분이 들었다.

금강조.

1400년이라는 세월은 짧은 것이 아니다.

따라서 그들의 집안 역사를 대변해줄 수 있는 명명백백한 기록이나 물증이 남아있다는 것 자체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이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자신의 집안의 가계를 대변할 수 있는 5백년 이상된 물건을 가지고 있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나는 금강조를 취재하면서 39대 1400년이라는 장구한 세월동안 그들이 그들의 가업을 실종시키지 않고 이어 왔다는데 큰 교훈을 얻는다.

나는 취재 기간 중에 금강조 사장에게 당신의 뿌리를 아직도 한반도라고 생각하느냐는 다소 멍청한 질문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의 조상이 백제에서 왔으니 나는 백제인이고 또한 한국인이다”

라고.

나는 이 대답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내가 정작 의미를 두는 것은 그들의 조상이 한반도에서 건너왔으니 당신들은 우리의 자손이다 하는 편협한 생각보다 그들의 집안이 가지고 있는 놀라운 약속의 정신이다.

1400년전 성덕태자와의 약속.

세세천년 사천왕사를 지키라는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들의 집안이 39대동안 해온 일은 한국과 일본이라는 두 나라를 떠나서 참으로 놀라운 인간 정신의 아름다움을 보게 해주는 것이라 생각했다.

이러한 인간의 정신이 살아 있는 한 세상은 아직 보고 배울 것이 참 많다.

나는 그런 뿌듯한 심정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졸지 않을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지면이 허락한다면 나는 이번 취재에 응해준 금강리융 사장님과 그 부인인 금강광자 여자 그리고 부사장인 아들 금강정화씨(40대 사장으로 취임했음)에게 깊은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끝까지 나의 모든 요구를 충족시켜 주고자 헌신적으로 도와 준 후지모리씨에게 머리 숙여 감사의 말씀을 올린다.

취재가 끝나고 작별인사를 했을 때 금강조 회사 정문 앞에서 내가 탄 택시가 사라질 때까지 충혈된 눈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던 후지모리씨의 마음을 나는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이외에 설계부의 여러분과 영업부의 야마모도과장, 그리고 요시가와씨, 만원사 공사현장의 야나세 가스히로씨 현장감독에게 고맙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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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장은 현장에 살아야 한다.>

 

 

취재 마지막 날.

금강조 사장인 금강리융씨의 가정방문이 허락되었다. 금강리융 사장의 집은 가까웠다. 회사 4층이 바로 사장 집이었던 것이다.

“사장은 언제나 현장에 살아야 한다.”

이것이 금강가문의 철칙이라고 한다.

그래서 지금까지 1400년간 금강조의 사장은 언제나 금강조 본사가 있는 <오사카시 천왕사구 1정목 14-29번지>에 거주해왔다고 한다. 사천왕사 서문 바로 앞이다. 사천왕사 서문에서 50미터 거리의 대로변에 금강조 본사가 지금도 있는 것이다. 금강조의 본사는 사천왕사가 완공된 서기 593년 이후 지금가지 줄곧 그 위치에 있다.

금강조 본사의 4층에 있는 사장댁을 방문 하던 날, 나는 상당한 기대를 하고 계단을 올라갔다. 1400년간을 그 자리에서 살아온 금강조 사장댁은 도대체 어떤 모습일까 매우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를 안내한 후지모리씨의 말을 듣고는 이내 적지 않게 실망했다.

첫째, 금강리융 사장은 볼 일이 있어 집에 없다는 것이다. 또한 사장 댁에서는 거실만이 공개가 허용될 뿐, 나머지 장소에는 일체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하라는 엄명이 있었다고 한다. 4층 사장 댁에 올라가 보니 역시 사장은 출타하고 없었다. 그는 공과 사를 철저히 구분하는 사람이었다.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은 취재해도 무방하지만 사생활에 관련된 부분은 일체 응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예컨대 취미가 골프라고 해서 골프장에 따라가겠다고 했더니 허락하지 않았다. 밤에 가라오케에 가서 이따금씩 노래를 부른다고 하기에 한 번 따라가겠다고 했더니 역시 대답은 ‘노’였다. 사생활과 일은 명확하게 선을 그어놓고 있었던 것이다.

사장댁에 들어섰을 때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밀양 반닫이’였다. 어디서 구했는지 아주 보존상태가 좋은 고급품이었다. 거실로 들어섰다. 금강리융 사장의 부인 금강 광자 여사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그맣고 단아한 체구에 콧날이 오똑 솟은 기품있는 얼굴이다.

거실은 10조(5평) 다다미방이었다. 방은 먼지 하나 없이 깔끔했다. 도코노마(물건을 넣어두기 위한 일종의 거실로 오픈된 상태의 벽장)에 바로 성덕태자의 통치철학이었던 <이화위귀(以和爲貴)>라는 족자가 걸려있었다. 그 옆에는 자그마한 장식장이 두 개 있었고, 백 한쪽 구석에는 가리개(키가 작은 병풍)가 하나있었다. 장식장에는 주먹만한 칠기 상자가 몇 개 놓여 있었다. 상당한 고급품이었다. 안주인의 미에 대한 안목을 느낄 수 있었다. 책장 위에 놓여져 있는 것 중에 눈길을 끄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청자로 만들어진 복숭아 모양의 자기였다. 누구의 작품이냐고 물었더니 경기도 이천의 해강요의 작품이라고 한다. 해강은 한국을 대표하는 도예가였다. 20년 전에 구입했다고 한다. 그런 것을 모은 것이 금강 광자 여사의 취미라고 한다.

거실의 한쪽 벽에 신단이 있었다. 신단의 가운데 모시고 있는 작은 조각상을 보니 그것은 바로 성덕태자였다. 1400년 전 자신의 1대 조상을 백제에서 초청한 장본인, 사천왕사를 지키라고 명령한 장본인, 그를 14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자기의 거실에 모셔놓고 아침저녁으로 경배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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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조>가 흔들리면 일본이 흔들린다.

 

 

1월 7일.오전 8시 30분.

금강리융 사장이 공사현장 방문을 위해 회사를 떠나고 있었다.

우리는 그의 현장방문을 따라가겠다고 요청했다. 그랬더니 그는 오늘 하루 동안 오사카와 그 인근 도시에 있는 8개의 공사현장을 돌 예정인데, 과연 그걸 다 따라잡을 수있겠느냐고 되물었다.

74세된 노인의 행보를 40대에 불과한 필자가 따라잡지 못할 턱이 있겠는가.

물론이라고 대답해주었다.

첫 번째 방문 장소는 금강조 회사에서 40분 정도 떨어진 기시와다(岸和田)시에 있는 滿願寺(만원사)라는 절 신축공사현장이었다.

금강사장이 달리는 차 안에서 뭔가 안주머니에서 주섬주섬 종이 한 장을 꺼냈다.그것은 반절지정도의 크기였다. 그걸 펴보니 그것은 금강조가 시행하고 있는 32개 공사 현장의 위치가 그려진 지도였다.

그는 그 지도를 펴고 자신이 돌아야 할 코오스를 다시 한 번 점검하고 있었다.

하루에 무려 8개 현장을 돌 예정이어선지 시간 안배를 하는 모양이었다. 그는 잠시 지도를 보며 스케쥴을 정리했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또 다른 반절지를 양복 안주머니에서 꺼냈다. 이번에 꺼낸 것은 32개 공사 현장의 공사현황표였다. 거기에는 공사명, 공사 시공일, 공사준공예정일, 공사감독, 계약금액, 현재 진척상황 등 공사전반에 관한 필요한 내용들이 빼곡히 써 있었다. 헌데 그 내용은 회사에서 만들어 준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본인 자신이 삐뚜빼뚤한 글씨로 직접 작성한 것이었다.

그는 1925년 생이다.올해 만 74세이며 한국식 나이로는 75세의 고령이다.눈도 어둡고 손도 떨릴 나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2개의 공사현장에 대한 개요를 반절지 크기의 종이에 직접 작성해가지고 다니고 있었다.

놀랍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해서 물었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는가?>

그가 말했다.

<나이가 들어서 기억력이 좀 떨어진다.그래서 적어가지고 다닌다. 하지만 지금도 이 공사개요를 보지 않고서도 그 내용을 거의 다 외우고 있다.>

한술 더 뜨고 있었다.

4년전 필자와 처음 만났을 때도 그는 공사현황표를 주머니에 넣고 있었다.그때는 무려 152개의 공사현장이 있었다. 그때 그에게 시험삼아 공사 현장 1개소를 무작위로 골라내서 물어본적이있다.

그때 그는 그 공사현장의 개요 일체를 거의 완벽하게 외워보였다.

현재 금강조는 32개 공사현장에 120억엔대의 비교적 작은 매출을 기록하고 있다.

그에게 질문을 하나 던졌다.

<1400년이 된 기업치고는 매출이 작다.좀더 공사를 많이 할 수도 있지 않은가>

그의 대답은 이러했다.

<매출이 늘어나면 눈이 닿지 않는 공사 현장이 생긴다.눈이 닿지 않으면 그것은 곧 부실로 이어진다.또 능력이상으로 회사의 규모를 키워놓았다가 불황이 닥치면 회사가 도산할 위험이 있다.>는 것이었다.

문어발 식으로 닥치는대로 업종을 확장하는 우리 기업과는 사뭇 다른 태도였다.

무려 1400년의 역사를 가진 기업이 백억엔대의 매출에 충실하겠다는 자세는 참으로 본받을만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택가 속에 있는 만원사 공사현장에 도착했다.

연 건평 400평 규모의 약 3층 규모의 3억5천만엥짜리 절의 신축현장이었다.

현장에 도착하자 그는 안전모를 트렁크에서 꺼내서 썼다.현장감독 야나세(45)씨가 그를 안내했다.

3층 규모의 공사현장은 온통 난간으로 이어져 있었다.

금강 사장은 아슬아슬한 난간을 따라 거침없이 위로 위로 올라갔다.그를 따라가던 필자는 솔직히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그는 지붕 밑의 대들보 위를 거침없이 걸어다니며 현장감독과 구석구석을 살펴보았다.

하루에 무려 8개 공사현장을 점검한다기에 그저 공사감독을 독려하는 위로방문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는 공사 전체를 꿰뚫어 보면서 또한 문제점이 없는지를 정확하게 읽고 있었다.

50년 경력의 베테랑 다운 모습이었다.

30분도 채 안됐는데 그는 제반 사항을 다 파악하고 떠날 차비를 하였다.취재진이 촬영 때문에 시간을 지체하자 그는 일정이 바쁘다며 핸드폰 번호를 가르쳐 주곤 먼저 핑하니 떠나버렸다.

우리는 그를 포기했다.

이 공사를 발주한 만원사의 주지 스님 미즈오(水尾.51)씨를 만났다.미즈오씨에게 명함을 건네주고 인터뷰를 하자고 했더니,잠깐 기다리라고 한다.

그러더니 거울 앞에 가서 하이칼라 머리를(일본 스님은 머리를 깍지 않는 사람도 많다)빗질 했다.

잠시 후 그가 돌아왔다.

믈어 볼 미리 가르쳐 달란다.

몇가지 질문을 얘기했더니, 옷 소매 밑에서 라이터와 담배를 꺼내 한 대 피운다. 일반 사람들이 담배를 피우는 거야 당연한 하지만, 스님이 담배를 척 고나물으니 조금 웃긴다는 기분이 든다.

하긴 일본의 스님은 술도 먹고,담배도 핀다.생선회도 잘 먹고,야키니쿠(쇠고기구이)도 즐긴다.룸 살롱도 가고, 헬스클럽도 다닌다고 들었다. 또 거의 99%가 대처승들이다. 그런데도 일본 사람들은 스님을 어려워한다.

그래서 스님들은 일본의 미혼 여성들에게 인기가 캡이다.

스님들은 거의 대부분 아주 부자인데다 자유 직업이다. 대목 때 왕창 매상 올려서 보통 때는 한가하게 논다. 그러니 여성들에게 신랑감으로 인기만점이다.

내가 아는 일본의 어느 스님은 1년에 장장 10억엥을 번다. 슬롯 머신해서 버는 것이 아니라 염불해서 버는 수입이 그렇다. 스님의 염불값은 외상이 없다. 크레딧 카드도 받질 않는다. 오로지 현찰이다.

그래서 가진 건 돈 밖에 없는 스님이다. 자기가 19대째 세습주지라는데 고민이 하나있다. 딸만 셋이라는 것이다. 아들이 없어서 절을 물려줄 수가 없는 것이다.

그 스님 왈 ‘아무래도 어디 가서 아들 하나를 만들어 와야 할 것 같애’

하고 심각하게 고민을 털어놓는다.

스님이 그래도 되나.

하고 생각했지만, 농담은 아닌 것 같다.

일본스님=베리 굿 직업.

앙, 나도 머리깍고 일본에 와서 스님이나 될까.

그에게 금강조에게 공사를 맡긴 이유가 있느냐고 물었다.

미즈오 주지는 금강조는 다른 회사보다 공사비가 2-30% 정도 더 비싸지만 믿을 수 있어서 맡겼고, 다른 회사와 달리 한 번 입찰금액을 정하면 공사가 끝날 때까지 공사비를 더 청구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다른 회사는 중간에 공사비를 더 청구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어떤 면에서 믿을 수 있다는 것인지 물었다.

그랬더니 그가 대답하기를 4년전 고오베 지진 때 다른 회사가 지은 절은 다 넘어갔지만,금강조가 지은 절은 쓰러지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4년전 고오베를 강타한 한신 대지진은 진도 8의 강진이었고 5천명 이상의 사망자를 낸 엄청난 것이었다.

그의 대답을 듣고 우리는 고오베 대지진 때 실제로 금강조가 지은 절 중에 쓰러지지 않은 절이 있는지 확인 하기위해 고오베 가보기로 하고 취재 일정을 급히 바꾸었다.

수차례의 통화 끝에 고오베 인근에 있는 명석(明石)시의 계광원(戒光院)이라는 절에 도착했다.

계광원의 주지를 만났다.

그는 지진이 나던 날 아침의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진도 8의 지진이 바로 눈앞에 보이는 담로도(淡路島)섬 앞의 바다가 발원지로 우리 절을 덮쳤다. 40미터되는 절 담장이 모조리 무너지고,절 뒷마당의 공동묘원의 묘비나 탑이 거의 다 쓰러졌다. 대웅전 불단 앞의 집기는 모두 다 넘어졌고 2미터가까운 불상도 앞으로 50센티가 정도가 밀려 나왔다. 내 자신도 공중에 약 30센티 정도 붕 떴다. 한신 고가도로가 넘어졌지만 이곳의 대웅전 건물은 무너지지 않았다. 단지 건물 자체가 좀 뒤틀렸다. 그러나 그것도 몇 년 지나자 저절로 원 위치로 돌아왔다.>

 

계광원의 대웅전은 목조 2층 건물이다. 지진이 나기 4년전에 금강조가 지은 것이다.

담장이 40미터나 쓰러질 정도였는데 건물 자체는 별 탈이 없었다는 얘기였다.

 

이 이야기를 듣고 나는 금강조의 설계부장 야부 텟츠오(藪哲郞.56)씨에게 그 이유를 물어보았다.

그의 대답은 금강조가 지은 건물이 흔들릴 정도면 일본열도가 흔들린다고 비유적으로 표현했다. 그러면서 그는 단언했다.

금강조가 망할 정도면 일본도 망한다는 것이었다.

그만큼 금강조가 지은 건물을 자신한다는 얘기였다.

그렇다면 금강조는 도대체 어떤 노우하우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그 첫째는 보이지 않는 곳일수록 더욱 더 신경을 쓴 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땅 속에 묻혀버리는 기초공사부분이나 지붕 속 같은 곳을 말한다.

실제로 만원사 공사 현장에서 내가 직접 자로 건물의 기초부분을 재보니 맨 밑바닥에 15센티의 굵은 자갈이 깔려있고 그위에 무려 104.5센티의 콘크리트를 타설한 것을 확인할 수있었다.

기초공사가 무려 1미터가 넘는 것이다.

두 번째는 대들보나 천장 속에 들어가는 나무의 경우 최하 80년에서 1백20-30년 된 최상품의 히노키(檜)나무를 쓰며 재료가 반입되었다 하더라도 하자가 있을 경우 즉시 반송된다는 것이었다.

우리나라 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곳은 얼렁뚱땅 넘어가버리는 경우가 없는 것이다.

두 번째는 공사인부 개개인의 자질이다.

만원사 공사 현장에서는 잡부들이 술을 마시지 않았다.

점심은 거의 모두 집에서 싸온 도시락으로 해결했고, 간식으로는 빵과 드링크가 전부였다. 야나세 현장감독에게 물어보니 술은 일체 금지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우리나라 건설현장처럼 소줏병이 이 구석 저구석에 굴러 다니는 모습은 전혀 볼 수없었다.

또한 잡부들이라 할지라도 공사현장에서 숙식을 해결하지 않았다. 전원, 집에서 출퇴근하면서 일한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정상적인 환경에서 정상적으로 출근하여 정상적으로 작업하고 정상적으로 퇴근한다는 점이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작업인부들의 상당수가 현장에서 먹고 자고, 술 마시고, 밤이면 삼삼오오 어울려서 화투를 치다가 잠자리에 드는 일이 대부분이 아니던가.

또한 그들은 자기가 맡은 분야에서는 그야말로 최선을 다해서 일한다는 점이다.

꼼꼼하고 정밀하게 마치 자기 집을 짓듯이 열심히 일해주는 것이다.

자기가 맡은 곳은 자기가 책임진다는 정신.

그것이 금강조의 노우 하우라면 노우하우 였다.

나는 만원사의 야나세 현장감독과 공사 현장을 돌아보고 나서 당신이 짓고 있는 이 건물의 내구연한을 몇 년 정도 자신하는가 하고 물었다.

그는 3백년에서 4백년 정도는 자신 한다고 대답했다.

그는 무려 3, 4백년을 책임질 수있다는 말을 했다. 여기서 나는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개인적으로 나는 취미가 집을 설계하는 것이다.집도 여러 채 지어봤다.지금 살고 있는 집도 내가 직접 설계해서 인부들을 데리고 지은 것이다.내가 당시 공사현장감독과 함께 지은 우리 집은 지은지 불과 10년도 안되었는데 현재 균열이 간 곳이 한두군데가 아니다.

헌데 금강조가 지은 건물은 무려 3백년 이상을 자신한다고 하니 어쩌다가 이렇게 어마어마한 차이가 나게 된 것일까.금강조는 비단 회사만 오래된 것이 아니라 그 실력과 전통에서도 정상급을 달리고 있는 회사였다.그것은 <문화재 건조물 보존기술협회>의 후쿠모토(福本都治. 52세) 부소장과의 인터뷰에서도 어느 정도 증명이 되었다.

그는 금강조의 사원건축기술이 일본내에서는 정상급이라고 인정하고 있었다.

 

<후쿠모토 인터뷰>

 

문 : 금강조의 기업 정신을 어떻게 보는가?

답 : 에도 시대나 막부시대에는 성 아래 마을에 건축 전문가인 장인들이 많았다. 공사를 발주하는 사무라이나 귀족들은 자신들의 취향에 따라 무리한 요구를 한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금강조는 거기에 굴하지 않았다. 디자인이나 선에 대해서는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감각을 고집했으며 이것이 금강조의 고유한 철학이 되었다.

문 : 금강조는 14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은 공법을 고집하는가?

답 : 그렇지 않다. 1945년 일본이 전쟁에 지면서 목재건물에 철근이 도입되었다. 이것은 상당한 변화였다. 새로운 공법이 도입되었고 그러한 공법을 더욱더 충실하게 하기 위해 CAD를 이용한 첨단 디자인이 개발되었다.

문 : 금강조는 직원이 100여 명에 불과한 작은 회사이다. 영세하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답 : 보통 일본의 건축회사는 중견 기업의 경우라도 직원이 1만명에서 1만 5천명 정도의 수준이다. 금강조는 비록 인원은 적지만 규모가 작다보니 분명한 자기 색깔을 가지고 있다. 적응력이 빠르고 규모의 경제학하고 다르다.

문 : 소규모 기업이나 보니 문제점도 많을텐데.

답 : 문제점도 있다. 금강조의 경우는 설계자가 현장 감독에게 곧바로 도면을 넘겨 작업에 돌입하는데, 일본의 건축회사의 경우 설계자와 현장감독을 잇는 중간감독이 있다. 방송으로 치면 그가 프로듀서이다. 현장감독은 디렉터일 뿐이다. 중간감독이 예산이나 자재의 사용, 공사의 방향 등을 지휘한다. 이러한 약점 때문에 건축을 적당히 하는 경향이 있다.

문 : 현재 금강조는 나무와 나무를 연결하는데 못을 사용하고 있다. 못을 쓰는 것이 아니라 스텐을 써야한다. 못을 사용하게 되면 수명이 짧아진다.

문 : 지진방지를 위해 천장 속에 나무를 사선으로 대었다고 한다. 그것이 과연 효과가 있는가?

답 : 사선으로 나무를 대었다고 해서 지진에 강하다는 보장은 없다.

문 : 일본의 목조 기술은 본래 고유의 것인가? 아니면 다른 다라로부터 온 것인가?

답 : 일본의 목조기술은 한국의 석조기술을 목조로 옮긴 것이다. 고대에는 한국의 석조기술을 목조 기술로 바꿀 수 있었던 일본의 기술자들이 있었을 것이다.

문 : 금강조의 장수비결을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답 : 시대와 풍토에 맞는 기술개발을 끊임없이 해 온 것이 그 회사의 장수 비결이라고 생각한다. 예컨데 일본은 강우량이 많은 나라이다. 그러한 강우량을 사전에 계산하여 거기에 맞춰 공법을 만들었다. 또한 시대의 요구에 맞게끔 기술로서 대응해 나갔다. 금강조라고 해서 과거의 전통만을 고집한 것이 아니다. 새로운 기술이 오면 거기에 맞춰서 그 기술에 도전하여 자기 자신의 기술로 만들었다. 100년 전 금강조가 지은 건물을 보면 재료의 특징을 100% 살린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현재는 새로운 요구에 맞춰주거나 도전하고 있다.

문 : 한국의 전통 건물과 일본의 전통 건물은 어떻게 다른가?

답 : 한국은 대륙적인 전체미를 중시한다. 일본은 섬나라이기 때문에 부분미에는 뛰어난다. 그러나 전체미는 약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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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원사 공사를 발주한 사람은 수미보구(水尾保久) 스님.

사업기간 : 98년 4월 1일 -99년 10월 31일

공사감독 : 야나세 가츠시로(45세), 23년 근무 나고야 중부고등학교 졸업. 금강조가 첫 직장임.

당시 근무자는 대목수 1명, 소목수 1명, 대공 1명, 소공 1명, 미장공 1명, 사원 2명, 전기공 1명이었다.

공사금액 : 2억 6천만엔

총 건평 ; 4백평 중 당시 짓고 있었던 부분은 64평

목재 : 히노키를 사용하고 있었으며 나무의 양은 154 입방미터였고 당시 사용되던 히노키의 수령은 80년생이었지만, 통상적으로 120-130년생을 쓴다. 나무의 산지는 나라 지방의 요시노에서 온 것이다.

공사에 동원되는 연 인원 : 1,646명이었다.

기와 : 아이치현의 니카와 현에서 온 것이다.

보통 평일에는 25명의 작업자가 일하나 당시는 정월이어서 8명의 작업자만 일하고 있었다.

 

공사 발주자인 주지의 당부사항

1. 조각을 화려하게 해달라.

2. 기와의 선을 부드럽게 해달라.

3. 기둥의 재료를 요시노의 소나무로 해달라.(요시노의 소나무가 품질이 제일 좋기 때문)

 

-대웅전 지붕의 선이 가파른 이유?

일반 주택은 지붕의 밑변과 높이가 10:4.5의 비율이나 절의 경우는 10:6.8의 비율이다. 즉 일반주택에 비해 지붕의 경사도가 30%이상 가파르다. 절의 지붕이 가파른 것은 가파라야 외관이 멋있게 보이기 때문이다.

 

-기초공사요령

 

1.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은 시간을 넉넉하게 갖고 공사를 한다. 그렇게 해야만 3-400년 정도 갈 것이다.

2. 기둥의 경우 : 굵은 것만 쓰면 된다. 기둥의 목적은 힘을 분산하는데 있는 것이므로 거기에 신경을 쓴다.

3. 못은 가급적 쓰지 않는다. 나무와 나무 사이를 연결할 때, 일부 쓰인다.

4. 만원사의 건물의 무게는 재목이 100톤, 기와가 40톤 정도이다.

5. 기초공사 : 흙을 팔 때 많이 파면 안된다. 필요한 부분만 파야한다. 그 깊이는 1미터 50센티정도이다. 즉 가장 밑바닥의 흙 위에 굵은 자갈을 15센티 정도 깔고 그 위에 5센티 정도 콘크리트를 타설하며 그 위에 16밀리미터 철근으로 99.5센티의 기초공사를 한다. 이것은 7-80년 전부터 쓰던 공법이다.

6.지진방지 대책 : 중창돌이(頭貫)를 꽉 끼어야 지진이 나도 흔들이지 않는다.

7. 천장 속의 나무는 대각선으로 댄다.

 

문 : 건물이 3-400년밖에 안 가는 이유는?

답 : 나무가 썩기 때문.

 

문 : 목재 부식 방지 대책은?

답 : 물이 젖었다가 말랐다가 하기 때문에 관계없다. 거래처에서 가져온 목재를 자재부에서 검사하여 마음에 들지 않으면 돌려보는 데, 불합격률은 약 10% 정도이다.

 

문 : 만원사 주지가 직접 공고구미에 입찰했는데 그 이유는?

답 : 공사 후 대금을 더 청구하는 사례가 일본 건축업계에서도 빈번한데, 금강조는 한 번 입찰한 금액을 끝까지 유지한다. 보통 다른 건축회사의 경우는 중간에 한 번 더 청구를 한다. 공사 대금은 3분의 1씩 3회에 걸쳐서 받는다.

 

절의 신축은 도중에 사람을 받지 않는다. 처음 작업에 투입된 인원이 끝까지 가는 방식이다. 대체로 대졸자를 선발해서 길러서 쓴다.

 

문 : 야나세 감독은 현재의 일에 만족하는가?

답 : 만족한다. 봉급은 일본업계의 중간 정도에 해당한다. 그러나 금강조는 가정적인 분위기로 회사를 운영한다. 그래서 좋다. 연봉은 약 900만엔 정도이다. 보너스는 6월 말과 12월 말 등 연 2회에 지급받는데 1회당 170만엔 정도이다. 공사가 끝날 경우 건물을 발주한 절 측에서 보너스를 약간 준다. 그것으로 회식한다.

 

문 : 지금까지 몇 개의 건물을 지어왔는가?

답 : 20개 정도의 절을 만들었다. 현장 감독을 15년 간 했는데, 그때 지은 건물이 모두 10개 정도이다. 그 전에 사원으로 참여해서 지은 절이 10개 정도 된다. 초기 8년 동안은 평사원으로 일했다.

 

 

<현장에서 근무하는 사원 니시키 요리 세이지(28세)>

문 : 현재 경력은 몇 년인가?

답 : 8년이다. 지금까지 8개 현장에서 근무해왔다. 3-4년이 지나면 주임(감독)이 될 것 같다.

 

문 : 여기서 먹고 자는가?

답 : 아니다. 효고현의 아마가사끼에 집이 있다. 1시간 20분 정도 걸린다.

문 : 금강조가 첫 직장인가?

답 : 그렇다.

문 : 결혼했는가?

답 : 아직 미혼이다. 애인이 없다. 현재는 일밖에 모른다. 주량은 맥주 10병이다.

 

 

<부사장 금강정화씨 인터뷰>

문 : 건축은 어디서 공부했는가?

답 : 미국의 UCLA대학 건축학과를 졸업했다. 미국에서 8년 살았으며 금강조에는 20년간 근무했다.

문 : 자식이 있는가?

답 : 딸 둘이 있다. 딸들은 스위스 주네브에서 유학 중이고 현재 중 3, 중 1이다.

문 : 미국의 건축공법과 일본의 건축공법은 같은가?

답 : 서로 전혀 다르다.

문 : 39대를 이어온 금강조 전통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나?

답 :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문 : 40대 계승자가 될 예정인데, 전통과 현대의 조화, 혹은 회사를 어떻게 이끌어갈 생각인가?

답 : CAD 등을 도입하여 현대화 작업을 계속 추진할 생각이며, 연립주택이나 아파트, 노인요양원 등 새로운 건설 분야에 진출할 생각이다.

문 : 앞으로 회사의 매출을 늘리고 세계적인 건축회사로 이끌 생각은 없는가?

답 : 회사의 매출 보다는 품질을 유지하는 쪽에 더 신경을 쓰고 있다. 세계적인 건축회사라는 말뜻은 무슨 뜻인지 잘 이해하지 못하겠다. 주어진 일에 충실할 뿐이다.

문 : 현재, 당신은 딸 둘밖에 없다. 금강조의 41대 사장은 누가 될 것인가?

답 : 생각중이다. 우리 집안은 사위를 받아들여 대를 잇게 하거나 양자를 받아 대를 잇게 한 적이 여러 번 있다. 아마도 그렇게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문 : 키가 큰데 얼마인가?

답 : 180센티미터의 키에 70킬로그람이다. 중고교시절에 검도로 체력을 단련했다.

문 : 금강조는 나무의 사용량이 많다. 나무는 전량 일본에서 생산되는 것을 쓰는가?

답 : 일본에 생산된 히노키 소나무를 쓰기도 하지만 미국이나 캐나다로부터 히바, 히노키 등을 수입해서 쓰기도 한다. 일본에서 구입하는 목재의 경우는 북해도와 도쿄 인근의 지바현에서 가져온다. 때로 나라현의 요시노에서 올 경우도 있다. 목재의 대부분은 히노키이다.

문 : 금강조가 주식회사가 된 것은 언제부터인가?

답 : 1955년에 주식회사가 되었다. 그 이전에는 그냥 작은 회사였다.

문 : 금강조의 공사는 오사카 인근에 국한되는가? 아니면 일본 전지역을 취급하는가?

답 : 일본 전 지역의 공사를 취급한다. 최근에는 북해도 삿뽀로시의 대창사라는 짓기도 했다.

 

<금강조의 경영철학>

 

 

1. 금강조 사장은 비서가 없다.

2. 사장은 현장에 살아야 한다.

3. 눈이 닿지 않는 공사 현장이 생기면 그곳은 곧 부실로 이어진다.

4. 기본에 충실한다.

 

 

<사까이시 가공센터>

금강조는 오사카에 3개의 가공센터와 도쿄에 2개의 가공센터를 가지고 있다. 사카이시 가공센터는 금강조가 처음으로 만든 가공센터이다. 20년 전부터 가공센터를 가공해왔고 여기서 만들어진 현천도는 현장에서 조립된다. 이 가공센터를 만든 것은 금강정화 부사장이다. 그가 주도적으로 결정하여 현재의 가공센터 부지와 건물을 샀다. 물론 부친과 상의는 했지만 그의 독자적인 결정이라고 볼 수 있다. 대지는 950평이며 건평은 500평이다. 여기서 하는 일은 설계도면 대로 나무와 합판을 가지고 현천도를 만드는 것이다. 사카이시 가공센터에는 모두 12명이 근무하고 있는데, 이 가공센터를 책임지고 있는 사람은 토거조이다. 토거조는 엄밀하게 말하면 금강조 직원이 아니다. 금강조와 협업 관계에 있는 한 팀이다. 금강노는 사카이시 가공센터에 근무하는 토거조외에 6개의 조, 즉 팀을 가지고 있다. 그 팀들도 또한 금강조와 협업관계에 있다.

 

문 : 토거씨는 올해 몇 살인가?

답 : 63세이다. 금강조와 협업한 지 33년이 되었다. 아들 에이지는 34세인데, 18세부터 여기서 근무하여 현재 16년 경력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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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야의 밤, 돈토보리에서

 

밤8시30분,도톤보리(道頓堀)에 나왔다.

운하 물 속에서 쏘아 올려진 네온사인 조명이 거리의 빌딩을 물들이고 있는 곳.

그 빌딩의 뒷골목, 거리거리, 골목골목마다 한평 짜리 생선횟집부터 오뎅집, 게요리 집,우동집, 샤브샤브집 등 각종 일본 요리점들 다닥다닥 문 입구에 노렝(발)을 달고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일본 제일의 번화가, 도톤보리. 휘황찬란 도톤보리.

그 옛날,그러니까 100여년전 쯤 전에 야수오 도톤보리라는 사람이 운하를 파면서 근대식 도시로 탈바꿈했다고하는 이 번화가.

오사카는 예부터 상인의 도시로 첫 손 꼽힌다.

상인의 도시인만큼 오래된 점포들이 많은 곳이 오사카.

상인의 도시 오사카에서는 바로 이 <노렝:暖簾>을 달고 최소한 100년이상 된 가게가 200여곳이 아직도 성업 중에 있다.이 점포들은 시니세(노포:老鋪)라고 불리우면서 각자 자신의 상징인 노렝을 달고 몇 대 씩 점포를 운영해온 집안들이다.

이 점포들을 보면 1888년에 창업한 도시락 가게 아시노가(芦家), 1861년에 창업한 버선가게 에비스, 1877년에 개업한 일본 요리점 이찌야마도(一大和), 1883년에 개업한 이불가게 이토만(伊藤萬), 1689년에 개업한 조화(造花)가게 웸라, 1871년에 개업한 우치다(內田)사진관, 1805년에 개업한 빙과점 이케다이구로(池大黑), 1752년에 개업한 대판계란회사, 1837년에 개업한 과자가게 쓰루가 야(駿河屋), 1833년에 개업한 나막신, 기모노 가게 오기무네, 1848년에 개업한 곤포(昆布)가게 고쿠라야 산본(小倉屋山本), 1858년에 개업 등(燈)만 만들어온 가와이, 1804년에 개업 향(香)만 만들어온 옥초당(玉草堂), 1764년에 개업한 기모노점 고다이마루(小大丸), 1878년에 개업 포장지만 만들어 온 자박쿠, 1714년에 개업한 그릇가게 석반(錫半), 1678년에 개업한 다나베(田邊) 약방 등이다.

10년 이상된 오사카의 노포(老鋪)들을 대상으로 이들이 평균 몇대 동안 자신의 점포를 유지해왔는가를 분류해보면

4대동안이 48개소, 5대가 25개소, 6대가 9개소, 7대가 10개소, 8대가 10개소, 9대가 2개소, 10대가 4개소, 11대가 3개소, 12대가 5개소, 13대가 1개소, 14대가 3개소, 17대가 2개소, 18대가 1개소엿습니다.

이 보다 더 오랜 기업으로는 나라현에 있는 먹 가게 고매원(古梅園)인데 서기 700년대에 개업한 가게이다.이 집은 12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지고 있다.

 

< 끝 >

 

<금강조>

-눕힐 것은 눕히고 세울 것은 세워라

-바른 쌓기와 들여쌓기

-기와입힘은 잔물결이 치는 것처럼.

-좋은 기와를 쓰면 반드시 좋은 작품으로 보답한다.

(부처님이 사실 집이다.천년,만년이 지나도 문제가 없어야한다,

좋은 집을 지어라.)

-나무를 3년간 말리다.연기를 쐬라.

(3년간 말리면 톱이 들어가지 않는다)

-찬곳에서 자란 나무.

-보이는 곳보다 보이지 않는 곳에 더 신경을 써라.

-마지메(진면목)와 키조멘

-다실의 문이 작은 것은 시선이 위로 향하지 않고 집중될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17세기의 고보리 엔슈,이조성,

교토 청류원.평등원 가보기.

 

홍광표(동국대 교수,조경학회)

<잃어버린 우리 조경-대구MBC>

안제복 교수(대구 카톨릭 대):들여쌓기와 바른 쌓기

 

<세계의 최장수 기업들>

 

영국의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2004년 12월 16일자에서 발표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기업들을 살펴보면 일본의 공고구미라는 회사가 서기 578년에 창업하여 가장 오래된 회사라고 소개하고 있다. 이어 2번째는 서기 718년에 창업한 일본의 전통여관 법사가 차지했다. 법사여관은 이시카와현에서 창업한 이후 현재까지 46대를 이어오고 있는데, 46대 계승자인 호시 젠고로는 지금도 불조심이라는 가훈을 지키며 약 1300년간 가업을 이어오고 있다. 3번째는 프랑스의 포도농장 샤또 디 굴랭이고 4번째는 종을 만드는 회사인 이탈리아의 폰테리아 폴티피시아 마리넬리로 역시 서기 1000년에 창업했으며 5번재는 이탈리아의 포도주 제조회사인 바론 리카솔 리가 1141년이고, 유리가공업체인 이탈리아의 바로비오 앤 투소가 1295년, 이어 1304년에 개업한 독일의 호텔 필그리하우스, 8위는 프랑스의 종이제조업체인 리차드 드비스(1326), 9위는 이탈리아의 귀금속 가공업체인 토리니 피렌체(1369), 10위는 이탈리아의 포도주 회사인 안티노리(1385)였다.

미국의 가장 오래된 회사는 1623년에 세워진 타악기 제조업체 질드란 심벌이다. 스웨덴에서는 스토라라는 회사가 1288년에 창업하여 가장 오래된 기업으로 꼽힌다. 스토라는 스웨덴 중부 지방에서 광산을 개발하는 기업으로 설립되어 구리 생산을 시작하면서 이후 산림벌목과 철광석으로 그 사업을 확장시켰고 1885년에는 제제소를 설립했으며 이후 1894년에는 화학산업으로까지 사업의 영역을 확장했다. 최근 1998년에 들어서는 필란드의 엔소라는 기업과 합병한 후 지금도 여전히 사업을 해나가고 있다. 중세 때부터 사업을 시작하여 산업혁명과 1,2차 세계 대전을 거쳤으나 그 회사는 지금도 세계 10대 제지 기업으로 손꼽히고 있으며 산업혁명 이후에는 증기기관을 활용한 내연기관 생산을 시작하면서 중공업쪽으로 진입했고, 근래에는 전기, 마이크로칩 등 첨단 IT기술에까지도 도전하면서 회사의 생명을 이어나가고 있다. 네덜란드에서 가장 오래된 회사는 1554년에 설립된 비누 제조회사 데베르 굴데 한트, 핀란드에서는 1649년에 설립된 가위 제조회사 휘스카스이다. 중국의 경우를 보면 고량주 제조업체인 오량액이 1140년에 창업하여 지금까지 술을 만들고 있고, 한국 사람들이 좋아하는 우황청심환을 만드는 동인당 약국은 북경에서 1669년에 창업했다.

한국의 경우는 가장 오래된 회사는 1896년 박승직이 면직물을 판매하기 위해서 서울 종로에 세운 박승직 상점이 그 모태이다. 박승직은 바로 오늘날 두산 그룹을 창업한 창업주이기도 하다. 그 다음으로 조흥은행을 꼽는다. 조흥은행이 설립된 것은 1897년이며, 부채표 활명수로 유명한 동화약품(1897)도 같은 해에 창업했다. 이어 그 2년 후인 1899년에는 상업은행이 창업했다. 대한매일신보로 출발한 서울신문(1904년), 유한양행(1926)이 뒤이어 창업했다.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기업인 샤또 드 굴랭은 프랑스 르와르 지방에서 출발한 포도주 제조회사이다. 이 회사는 서기 1000년에 개업한 이래 현재가지 포도주를 생산하고 있으며 한편으로는 포도주 박물관과 나비농장을 갖고 있다.

영국에서 가장 오래된 가족기업은 서기 1541년에 설립된 섬유제조업체 존 브룩 앤 손스이다. 그러나 이 업체는 섬유제조업을 포기하고 지금은 다른 품목을 생산하고 있다.

동경대의 기업역사학자인 레슬리 한나는 “20세기 대기업의 평균 수명은 75년이다.”라고 밝혔으나 실제로 기업들의 평균 수명은 13년 정도에 불과한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케빈 케네디가 쓴 <백년 기업의 조건>이라는 책에 따르면 기업의 수명이 짧은 것은 혁신, 제품 교체, 전략, 제휴 등 4가지 사안에 소홀히 했거나 학습문화, 리더쉽, 지배시스템, 이사회의 감시 등 4가지 주요 사안을 소홀히 했기 때문이다. 라고 그는 주장했다.

일본의 니케이 신문은 장수기업이 되려면 우선 첫 번째로 변하지 않는 절대가치의 추구를 꼽았다. 말하자면 미국의 디즈니가 103년 동안 그 기업을 영속할 수 있었던 것은 “아이들과 가족에게 꿈을 주자.”는 기업의 목표를 지켰기 때문이다. 창업자 월트 디즈니는 1930년대까지 “사람들은 만화를 한 시간 이상 보지 않는다.”라는 통념을 깨고 <백설공주>를 만들어냈다. <백설공주>는 그 한 편을 감상하는 데 무려 100분이 걸리는 만화영화였다. 한 시간이 넘어가면 만화영화는 지루해진다는 만화의 통념을 깨고 백설공주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백설공주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인기있는 만화이다. 1930년대 첫 선을 보인 이후 7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그 인기가 식지 않고 있는 것이다.

또한 스위스의 식품업체인 네슬레가 137년이나 시장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은 “좋은 음식과 좋은 삶”이라는 회사의 목표를 꾸준히 실천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본래 네슬레가 탄생한 것은 스위스 레만 호수 부근의 작은 마을에 살던 앙리 네슬레가 영양부족으로 목숨을 잃는 간난아이들을 보고 충격을 받은 후 모유 대신 우유로 만든 유아용 시리얼을 개발하면서부터 출발한 기업이다.

그러나 장수기업에는 왕도가 없다. 특히 21세기의 급변하는 경영환경에서는 변수가 더욱 많기 때문이다. 경영전략, 주주의 지배구조, 노사관계의 복잡함, 임금의 상승 등 여러 가지 변화요인이 많기 때문이다.

하버드 경영대학원 존 데이비스 교수는 3대 이상 지속된 가족기업들을 연구해본 결과 장수기업에는 3가지 요인이 있어야 그 기업이 오랜동안 사업을 할 수 있었다면서 그 요인으로 신뢰, 자부심, 가족의 혼을 꼽았다. 즉 소비자에게 신뢰받고 자신의 상품에 자부심을 가지며 열과 성을 가지고 기업을 이끌어갈 때에야만 그 기업이 오랫동안 존속한다는 것이다.

반면에 <통찰력 있는 기업들의 성공하는 습관>이라는 책을 낸 짐 콜린스는 장수기업들의 특징을 원칙을 고수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것에 끊임없는 변화를 모색하는 기업이 오랫동안 살아남아왔다고 분석했다. <성공의 수세기>라는 책을 집필한 윌리엄 오하라는 장수기업의 장점을 단지 운이라고는 평가할 수 없다며 장수기업의 특징은 경영권을 자손에게 물려주면서도 반목과 불화가 없이 가족들간의 화합과 신뢰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경영이론가인 아리드 제우스는 <생동하는 회사>라는 자신의 저서를 통해 장수기업의 비결을 이렇게 소개한 바 있다. 장수기업의 특징은 “첫째, 자금 운용 정책이 매우 보수적이다.” 라는 것이다. 즉 은행과 거래할 때 수익성 보다는 안정성을 더 중시하여 늘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왔다는 것이다. “둘째는 사회환경의 변화에 민감하게 대처했다는 점”이다. 그는 스웨덴의 스토라사를 예로 들면서 15세기경 스토라사가 스웨덴 국왕의 노여룸을 사서 국가에 흡수합병 당할 위기에 처하자 국왕의 비위를 맞춰줌으로써 독립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또 1831년에 개업한 영국의 부커사는 본래 남미에서 설탕을 생산하는 기업이었지만 1800년대 영구 정부가 설탕 산업을 국유화 할 것을 예상하고 주력 업종을 해운업과 소매업으로 재빨리 바꿔버렸다.

세 번째 특징으로는 “종업원들에게 그 회사만의 기업문화를 교육시켜 강력한 응집력을 만든다.”는 것이다. 예컨데 맥도날드 햄버거의 경우 700개가 넘는 매뉴얼을 통한 직원 교육을 통해 스스로 맥도날드 문화를 만들어왔다. 심지어는 회사 내에 자체 대학을 운영하면서 끊임없는 교육을 통해 한 번 입사한 사원을 맥도날드 맨들으로 재탄생시킨 것이다.

네 번째 특징으로 장수기업들은 “직원들의 개성을 살려주는 풍도를 조성한다.”는 점이다. 예컨데 미국의 3M사는 직원들에게 근무시간의 15%는 자기자신의 개인 일에 쓸 수 있도록 규정을 만들어 줌으로써 신세대문구 용품인 <포스트잇>을 개발할 수 있는 시간을 허용했다. 말하자면 기업의 운용을 유연하고 탄력적으로 함으로써 사원들이 자유로운 사고와 아이디어를 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또한 영국의 이코노미스트도 70년대 이후 세계의 500대 기업을 분석하면서 장수기업의 비결을 신뢰, 자부심, 자금이라는 3가지 요인으로 분석하고 있다. 즉 “사업의 원칙을 고수하면서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다는 것이다.

 

2004년 경영전문지인 월간 <현대경영>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국내 500대 기업 중 창업 50년을 넘긴 기업은 2004년 7월 말 현재 61개 사이고 70년을 넘긴 기업은 모두 12개사였다. 기업의 역사가 비교적 일천한 한국에서 50년 이상을 지속적으로 발전시켜온 회사는 매우 드문데 그러한 회사들은 각기 나름대로의 경영상 특징을 가지고 있다.

1954년에 창업한 금강제화의 경우는 1973년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캐주얼 구두 랜드로바를 내놓으면서 선풍적인 인기를 몰았고 이어 94년부터는 발이 너무 크거나 작아서 고민하는 소비자들을 위해 직접 발 사이즈를 재서 맞추어주는 맞춤구두를 선보였다. 말하자면 사회환경에 맞추어 기업의 마케팅 전략을 진화시켜왔던 것이다.

한국에서 오래된 회사로 손꼽히는 삼양사의 김윤회장은 삼양사의 장수비결에 대해 “리벌루션(혁명)은 없었다. 그러나 이볼류션(진화)는 한순간도 멈추지 않았다.”며 혁명이 아닌 진화를 강조한 바 있다.

1953년에 설립된 제일모직이 장수한 비결도 진화에 있다. 이른바 섬유산업은 사양산업인데 제일모직은 10년마다 주기적으로 변화를 모색함으로써 초창기 주력 산업인 직물에서 60년대에는 의류로 변모하였고 이어 70년대에는 화학 산업으로 변화하였으며 80년대 이후에는 전자재료사업으로 변신을 거듭한 바 있다. 즉 과거의 영화에 연연하지 않고 끊임없이 살길을 모색해 나갔던 것이다.

반면에 장수기업의 비결을 기업의 진화가 아닌 연구 개발에 둔 회사도 있다. 세계적인 화학기업인 미국의 듀폰사의 홀리데이 회장은 1802년에 창업한 듀폰이 200년 넘게 세계의 화학 산업을 이끌고 있는 비결로 변화와 연구개발을 꼽았다. 즉 연구개발을 통한 신사업수종의 개발로 회사의 변화를 추구하면서 승부를 걸어왔다는 것이다. 과거의 듀폰은 화학기업이었으나 2000년대의 듀폰은 생명공학기업으로 변화하고 있다. 1997년까지만해도 듀폰의 매출은 거의 대부분이 화학제품이었고 생명과학 분야가 차지하는 비중은 5%미만이었다. 그러나 2004년이 되면 생명과학분야의 매출이 25%로 늘어나고 화학제품의 매출은 점차 줄어들고 있는 추세로 변모하고 있는 것이다.

“변화는 기업의 생명줄이다. 그러나 끊없이 변화하면서도 회사가 지켜야할 가치는 지켜야 한다.”

라고 듀폰의 경영 가치를 말한다. 그러나 시대는 변모하고 있다. 듀폰 역시 너무 늦기 전에 과거를 잊어버려야 한다면서 변화되어야할 대상과 유지되어야 할 대상을 구분하는 것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자 그렇다면 1400년을 이어온 일본의 건축회사 공고구미는 어떻게 그 장구한 세월동안 망하지 않고 버텨올 수 있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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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1년에 창업한 이탈리아의 리카솔 리가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기업의 하나로 손꼽힌다. 리카솔리가는 와인의 원조라고 불리우는 포도주, 기안티를 처음 생산해내면서 전세계의 포도주시장에 문을 연 기업이다. 리카솔리가가 포도주를 생산해 냄으로써 인류는 비로소 포도주 다운 포도주를 마실 수 있게 되었는데, 몇 백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프랑스가 포도주에 대한 연구를 거듭하면서 포도주 국가의 영예는 이탈리아에서 프랑스로 넘어가게 된다. 특히 20세기 들어 이탈리아 포도주는 프랑스 와인이 밀려 세계시장에서 기를 펴지 못했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포도주의 원조인 이탈리아의 리카솔리가는 대대적인 변화를 모색한다.

그 첫 째는 다양한 신기술의 개발과 포도재배법 및 양조과정을 모조리 뜯어고친 것이다. 즉 과거의 전통 방식만을 가지고 21세기 시장을 개척하려던 망상을 버린 것이다. 현대에 맞게 포도주를 재배하며 그 양조과정도 첨단기술을 도입하여 현대화시킨 것이다. 둘째는 이탈리아 내수시장과 유럽의 시장을 중심으로 판매를 추진해 온 것을 일소하고 생산량의 70%를 미국 중심으로 판매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또한 정부는 정부대로 와인의 등급을 엄격히 규제하여 너도나도 1등급이었던 300개 이상의 와인등급을 최우수등급으로 재편, 단 18종으로 규제하는 한편 100여개의 와인 규정을 만들어 이탈리아 와인의 품질을 보증하려는 노력을 병행했다. 또한 2000종이 넘는 포도 묘목 중 400종 만을 선별하여 장차 이탈리아의 포도주 산업을 이끌어나갈 묘목으로 선정하기도 하였다.

리카솔리가는 시대의 변화에 발맞추어 자신들이 지금까지 추구해왔던 전통을 버리고 새로운 회사로 거듭나고 있는 것이다.

 

 

<일탑일금당식>

 

 

사천왕사가 모델로 한 절은 부여의 정림사이다. 오늘날 부여의 정림사는 모두 불타 버려 절의 건물은 사라졌고 오중탑만 남아있다. 그러나 주춧돌을 토대로한 정림사의 가람 배치도를 보면 사천왕사의 가람배치도와 놀랍도록 그 구조가 같다. 절 입구에는 남대문이 있고 남대문을 통과하면 중문이 나오며 중문을 지나면 탑이 있고 탑 뒤에는 금당이라 불리우는 대웅전이 있으며 이어 강당이 나온다. 백제의 정림사와 오사카의 사천왕사는 가람 배치 양식에 있어 똑같이 일탑일금당식, 즉 다시 말하면 탑 하나에 대웅전도 하나인 양식이다.

백제의 정림사와 오사카의 사천왕사가 똑같은 양식 취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이 당시 사천왕사를 지을 때 봉헌되었던 가람 건축 기술자들이 모두 백제에서 왔기 때문이다. 백제 출신들이 와서 절을 지었으니 당연히 사천왕사의 건축양식도 백제의 것을 따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일탑일금당식이라는 양식은 백제 고유의 것이다. 고구려의 경우는 일탑 삼금당, 즉 탑은 하나인데 대웅전은 3개인 양식을 취하고 있다. 일탑삼금당이라는 양식은 다분히 위압적이고 폐쇄적인 건축구조이다. 따라서 백제와 신라는 고구려식의 일탑삼금당식을 지양하고 신라의 경우는 이탑일금당식, 백제의 경우는 일탑일금당방식을 취했다. 본래 백제의 탑은 목탑이었으나 백제 후기에 들어서 목탑이 석탑으로 바뀌어나가게 되었다.

일본의 고대 건축의 경우도 백제의 영향을 많이 받아 거의 대부분이 일탑일금당식을 취한 것을 알 수 있다. 사천왕사와 더불어 일본 최초의 절이라는 비조사 역시 백제인들이 지었지만, 비조사의 경우는 고구려식과 백제식을 절충하여 일탑이금당으로 지어졌다.

이렇게 국가마다 탑과 대웅전의 양식이 다른 것은 탑을 사찰의 중심으로 보는가 대웅전을 사찰의 중심으로 보는가에 따라 달라진 것이다. 대체로 삼국시대에는 탑을 사찰의 중심으로 보고 절을 건축했다. 경주에 있었던 황룡사나 사천왕사, 부여의 정림사의 경우는 탑이 사찰의 중심이었다. 탑 속에 사리를 봉안하여 그것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그러나 고려시대에 들어서면 사찰의 중심이 건물 중심, 즉 대웅전이나 금당을 중심으로 바뀐다. 신앙의 대상이 부처님의 사리가 아니라 불상으로 바뀌어 그 불상을 봉안한 사당이 종교의식의 중심이 된 것이다 .이러한 대표적인 사찰로 통도사나 해인사, 화엄사 등을 들 수 있다.

 

 

<황룡사>

 

 

황룡사는 진흥왕 14년인 서기 433년에 짓기 시작하여 서기 569년에 완성된 신라의 대가람이다. 사찰이 지어진 후, 선덕여왕 14년(645)에는 자장법사의 권유로 황룡사 내에 국내 최대의 목탑인 9층 탑이 세워진다.

황룡사 9층탑은 백제의 탑 기술자였던 아비지가 공사 감독을 맡아 645년에 건립하였다. 당시 황룡사 9층 목탑의 높이는 약 225척(80.16미터) 정도 였다고 찰주본기에 기록되어 있다. 요즘으로 치면 아파트 30층 높이이다. 이 탑은 지금까지 존재했었던 목탑 중에 전세계에서 가장 높았던 목탑으로 추정된다. 보통 세계에서 가장 높은 목탑이 1056년 요나라때 만들어진 산서성의 응현5층탑이라고 한다. 응현5층탑은 높이가 67미터였다.

“아비지라는 공장이 명을 받고 와서 재목과 돌을 다듬고 이간 벼슬의 용춘은 소장 200인을 거느리고 일을 주관하였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기록이다. 황룡사 9층 탑을 아비지가 인부 200인을 거느리고 일을 했다는 것이다.

아비지는 백제 출신의 기술자로 신라의 초청을 받아 황룡사 9층탑을 세우게 되었는데, 절의 기둥을 세우던 첫 날, 아비지의 꿈에 백제가 멸망하는 것이 보였다고 한다. 이에 놀란 아비지는 일을 멈추었는데, 문득 천지가 흔들리더니 하늘이 캄캄해지면서 노승 한 사람과 힘이 센 장사 한 사람이 금전문에서 나와 그 기둥을 세우고 사라져 버렸다고 한다. 아비지는 이 절이 부처님의 원력으로 세워진다는 것을 느껴 결국은 황룡사 9층탑을 완성시켰다. 완성된 탑의 높이는 철반이상의 높이가 42척, 그 이후 곤탑의 높이가 183척이었다. 도합 225척인데, 이 225척을 당시 쓰이던 고려척을 환상하면 약 80미터 높이가 된다. 요즘으로 치면 20층 빌딩 위에 철탑이 하나 서 있었던 셈이다. 이렇게 높은 탑이 세워지면서 황룡사 9층탑은 서라벌 장안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명물이 되었다. 삼국유사를 쓴 일연은 황룡사 9층 목탑을 기려 이렇게 시를 썼다.

“귀신이 부축한 듯 제경(帝京:서라벌)을 누르니

휘황한 금색으로 처마가 움직이네.

이곳에 올라 어찌 구한(九韓)의 항복만을 보랴.

건곤이 특히 편안한 것.

깨닫기 시작했네.“

오늘날 황룡사지에는 황룡사 건물과 황룡사 탑은 모두 사라지고 64개의 주춧돌만이 남아 있다. 그 64개의 주춧돌이 바로 목탑이 서 있던 자리이다. 신라가 황룡사 9층 목탑을 세계 최대의 규모로 세운 것은 삼국 통일을 발원하기 위해서였다. 그 발원자는 당나라에서 불교를 공부하고 돌아온 자장법사(590-658)였다.

자장법사는 중국에서 우연히 문수보살을 한 사람 만났다고 한다. 자장이 말하기를

“우리나라는 말갈, 남으로는 왜국과 인접해 있으며 고구려와 백제가 번갈아 침입하니 이런 이웃나라의 횡포로 백성들이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라면서 신라가 처한 어려운 상황을 하소연하자 그 문수보살은

“지금 그대의 나라는 여왕을 섬기고 있소. 여자가 임금이니 덕은 있으나 위엄이 없으므로 이웃나라들이 넘보는 것입니다. 지금 본국에 돌아가 황룡사 안에 9층탑을 세우도록 하시오. 그러면 이웃나라들이 모두 항복하고 동방의 아홉나라가 조공해 올 것이며 나라가 기리 평안하리라.”

라고 가르쳐주었다. 이제 자장법사는 귀국하자마자 여왕에게 건의하여 황룡사 9층탑을 건립하게 된 것이다. 즉, 황룡사는 호국불교 사상의 정신적 상징이며 신라 불교 문화의 상징이 된 것이다.

결국 신라는 황룡사 9층탑을 세운지 23년만에 고구려와 백제를 멸하고 삼국을 통일하게 된다. 그러나 웅대했던 황룡사 9층탑도 1238년 몽고의 침략을 받아 한 줌의 재로 사라지고 말았다.

황룡사 9층탑은 1096년 고려시대 때까지 6번의 보수를 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1238년에는 몽고 원나라의 침략으로 소실되었다.

문수보살이 말한 아홉나라란 일본, 중국, 오월, 탐라, 응유, 말갈, 계단, 여적, 예맥 등이다. 그래서 황룡사 9층탑의 1층은 일본을 누르는 것이고 2층은 중국을 누르는 것이고 3층은 오월을, 4층은 탐라를, 5층은 응유를, 6층은 말갈을, 7층은 계단을, 8층은 여적을, 9층은 예맥을 누른다는 의미에서 완성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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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불과 배불>

 

<다음은 일본 서기에 나오는 내용이다.>

538년 10월, 백제의 성왕은 서부 희씨 달솔 노리사치개를 보내 석가불의 금동상 1구, 반개 약간, 경륜 약간 권을 하사하였다. 따로 표를 올려 널리 예배의 공덕을 찬양하여

“이 법은 모든 법 중에 가장 훌륭한 것입니다. 이해하기 어렵고 입문하기 어려우며 주공과 공자도 알지 못하였습니다. 이 법은 무량무변한 복덕과보를 낳고 무상의 보리에 도달할 수가 있습니다. 비유하여 말하면 사람들이 여의주를 품고 필요에 따라 모두 마음 먹은 대로 되는 것과 같이 이 묘법의 보물도 그러합니다. 기원하는 것은 마음대로이고 모자라는 바가 없습니다. 또한 멀리 천축에서 삼한에 이르기까지 교에 따라 받들어모시고 존경하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이 때문에 백제왕은 신하 노리사치개를 보내 조정에 전해드려 기네(오사카)지방에 유통시키고자 합니다. 부처님이 ‘내 법은 동쪽에 전해질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을 실현 시키는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이날 천황은 다 듣고나서 환희용략하시어 사자에게 소하기를

“짐이 옛부터 이제까지 아직 이렇게 미묘한 법을 들은 일이 없다. 그러나 짐이 혼자서는 결정하지 아니할 것이다.”

라고 말하였다. 그래서 군신에게 하나하나 물어

“서쪽나라에서 바친 바 있는 부처의 얼굴은 단엄하다. 일찍이 본 일이 없다. 예배할 것인가? 말 것인가?”

라고 말하였다. 소아대신 도목이 주장하여

“서쪽의 여러 나라가 다 같이 예배하고 있습니다. 일본이 어찌 혼자 배반할 수 있습니까?”

라고 말하였다. 물부대련 미여와 중신련 겸자가 다같이 주장하여

“우리나라가 천하에 왕 노릇하게 된 것은 항상 천지사직의 180신을 춘하추동에 제사 지내는 것을 일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그것을 고쳐서 부처를 예배한다면 국신의 노여움을 살 것입니다.”

라고 말하였다. 천황이

“자원한 소아도목에게 주어서 시험삼아 예배하도록 하자.”

라고 말하였다. 소아도목 대신이 무릎을 꿇고 받으며 기뻐하였다. 소간전의 집에 안치하였다. 삼가 불도를 닦는 인연으로 하였다. 향원의 집을 깨끗하게하여 절로 삼았다. 후에 나라에 역병이 유행하여 백성이 요절하는 이가 많았다. 오래 되면서 더욱 많았다. 치료할 수가 없었다. 물부대련 미여와 중신련 겸자가 같이 주상하여

“옛날에 신 등의 의견을 쓰지 않으셔서 이 병과 주검을 불러왔습니다. 지금 먼저대로 되돌아가면 경사가 있을 것입니다. 빨리 부처를 던져버려 후의 복을 비소서”

라고 하였다. 천황이

“주한대로 하라.”

라고 말하였다.

유사가 불상을 난파의 불강에 흘려버렸다. 또 가람에 불을 놓아 태워 남김이 없었다. 이때 하늘에 풍운이 없는데 홀연히 대전에 화재가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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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달 천황 14년 봄 2월.(서기 585년)

 

소아대신 마자는 탑을 대야악의 북쪽에 세우고 대법회를 열었다. 먼저 사마달 등이 얻은 사리를 탑의 주두에 올려놓았다. 24일 소아대신의 병이 중하였다. 점치는 자에게 물었더니 점치는 자는

“아버지 때에 제사지냈던 불신의 마음 탓이다.”

라고 말하였다. 대신은 자제를 보내어 점괘를 아뢰었다. 소하여

“점치는 자가 말한대로 아버지가 받들던 신을 제사지내라.‘

라고 하였다. 대신은 소를 받들어 석상을 예배하고 수명을 늘려주십사고 빌었다. 이때에 나라에 역병(천연두)이 유행하여 백성이 죽는자가 많았다.

 

춘 3월 1일.

물부수옥 대련과 중신 승해대부가 주하여

“어찌하여 신의 말을 듣지 않으십니까? 흠명천황에서부터 폐하에 이르기까지 역병이 유행하여 국민이 다 죽을 것 같습니다. 오로지 소아신이 불법을 일으키기 때문에 이렇게 되지 않았습니까?”

라고 말하였다. 소하여

“극히 명백한 것이므로 불법을 그만두라.”

라고 하였다. 30일 물부수옥 대련이 스스로 절에 가서 걸상에 걸터앉았다. 탑을 잘라 허물고 불을 붙여 태웠다. 아울러 불상과 불전을 불태웠다. 타다 남은 불상을 거두어 난파의 굴강에 던지게 하였다. 이날 구름이 없는대도 바람이 불고 비가 왔다. 물부대련은 비옷을 입었다. 소아마자와 이를 따라온 승려들을 꾸짖어 사람들에게 모욕을 당했다는 마음이 들게하였다. 사람을 보내어 소아마자가 공양하는 여승 선신리들을 불렀다. 소아마자는 감히 명에 항거하지 못하고 통곡하여 여승들을 불러내어 어실에게 맡겼다. 유사는 곧 여승들의 법의를 벗겨 금고하고 해석루시의 정에서 초달하였다. 천황은 임나의 부흥을 생각하고 판전이자왕을 사자로 삼았다. 이때 천황과 대련이 갑자기 두창에 걸렸다. 그래서 사자를 보내는 것이 중지되었다. 귤풍일황자에 소하여

“선천황의 칙을 배반하지 말고 임나의 정사를 잘보라.”

라고 말하였다. 그런데 두창으로 죽는 자가 나라 안에 넘쳤다. 그 창을 앓는 자가

“몸이 타고 매 맞고 부서지는 것 같다.”

라고 말하고 울부짖으며 죽어갔다. 노인도 젊은이도 몰래 서로 이야기하여

“이것은 불상을 태운 죄일 것이다.”

라고 말하였다.

 

여름 6월.

소아마자가 주하여

“신의 병이 중하여 아직도 낳지 않앗습니다. 불법의 힘을 빌지 않으면 구원할 길이 어렵습니다.”

라고 말하였다. 그래서 소아마자에게 소하여

“그대 혼자서 불법을 섬겨라. 타인에게 시키면 안된다.”

라고 하였다. 세사람의 여승을 소아마자에게 돌려주었다. 소아마자는 이를 받고 기뻐하였다. 이때까지 없는 일이라 감탄하여 세 사람의 여승에게 절했다. 새롭게 절을 지어 영입하여 공양하였다.

 

가을 8월 15일

천황이 병이 중하여 대전에서 붕하였다.

그때 빈궁을 히로세에 세웠다. 소아마자는 칼을 차고 주(죽은자를 사모하여 그 영전에 아뢰는말)를 여쭈었다. 물부수옥 대련은 비웃어

“짐승에 쓰는 화살에 맞은 참새와 같다.”

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이어 물부수옥 대련이 수족을 떨면서 주를 여쭈었다. 소아마자 대신이 웃으며

“방울을 달았으면 좋겠다.”

라고 말하였다. 이 때문에 두 대신 사이에 원한이 생겼다.

 

 

587년 가을 7월.

소아마자 대신은 여러 황태자와 더불어 군신에게 권하여 물부수옥 대련을 멸할 것을 모의하였다. 박뢰부황자, 죽전황자, 개호황자, 난파황자, 춘일황자, 소아마자대신, 기난마려숙미, 거세신비량부, 선신하타부, 갈성신오나라가 같이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서 물부대련을 쳤다.

대반연치, 아부신인, 평군신수, 판본거강수, 춘일신이 같이 군병을 이끌고 지기군에서 물부수옥이 있는 서파의 집에 왔다. 대련은 친히 자제와 종의 군사들을 이끌고 벼로 성을 쌓아서 싸웠다. 물부대련은 의개의 땅을 박나무의 가지 사이에 올라 높은 곳에서 비오듯 쏘았다. 그의 군병들이 강성하여 집에 가득하고 들에 넘쳤다. 황자들과 군신들의 군병들은 겁약하고 무서움을 타서 3번 퇴각하였다. 이때에 개호황자(성덕태자)는 이마에 속발하고 군사의 뒤를 따랐다. 스스로 생각하여

“만일 잘못하면 패하지 않을까., 기원하지 않으면 이기기 어려울 것이다.”

라고 말하였다. 그래서 백요목(누리데)를 잘라서 사천왕의 사를 만들어 정발의 위에 놓고 발원하여

“지금 내게 적을 이기게하여 주시면 반듯이 호세사왕을 위하여 사탑을 건립할 것입니다.”

라고 말하였다. 소아마자 대신도 발원하여

“모든 제 천황, 대신왕 등이 나를 도와 지켜 이기게하여 주시면 제 천황과 대신왕을 위하여 사탑을 건립하여 불법을 크게 펴겠습니다.”

라고 말하였다. 맹세를 마치고 각종의 병기를 가지런히하여 진격하였다. 이때에 역견수적수가 물부대련을 가지 아래로 쏘아 떨어뜨려 물부대련과 아울러 그 아들을 죽였다. 이에 따라 대련의 군사는 갑자기 저절로 패하였다. 군병들은 모두다 검은 옷을 입고 히로세의 흉원에서 수렵하는 흉내를 내며 도망하여 흩어졌다. 이 전역에 물부대련의 아들들과 권속들이 혹은 위원에 도망하여 숨어 성을 갈고 이름을 바꾸는 자가 있었고 혹은 도망하여 갈바를 모르는 자도 있었다. 사람들이 서로 말하기를

“소아대신의 처는 물부수옥의 누이이다. 대신은 헛되게 처의 계략을 써서 대련을 죽였다.”

라고 말하였다. 난을 평정한 후에 섭진국(오늘날의 오사카)에 사천왕사를 지었다. 대련의 노비의 반과 집을 나누어 사천왕사의 노비와 전장으로 하였다. 소아대신은 또 원에 의하여 비조의 땅에 법흥사를 세웠다.

 

 

 

<이민자들의 나라, 일본>

 

일본은 이민자들의 나라다. 쉽게 말하면 1492년 콜럼버스에 의해 아메리카 신대륙이 발견되자 유럽의 여러 국가 사람들이 신천지를 향해 대거 건너간 것과 같다.

우선 그 내용을 가장 손쉽게 알 수 있는 책이 <일본서기>이다. <일본서기>는 서기 720년 일본에서 펴낸 가장 오래된 역사책 중의 하나이다. 바로 그 <일본서기>와 여타의 사서를 보면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사람들이 얼마나 되는지 추정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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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6년 백제의 응신왕, 고구려 관개토대왕에게 패퇴하여 백성과 신하들을 이끌고 일본으로 망명.

405년 2월, 백제왕이 봉의공녀(縫衣工女)를 바침. 궁궐군이 120현의 현민을 거느리고 벡제로부터 내귀.

406년 8월, 백제왕이 아직기를 보내 좋은 말 두 필을 바침.

407년 2월, 왕인이 왔다.

411년 9월, 아지사주와 그의 아들 도가사주가 17현의 군민을 데리고 일본으로 내귀.

429년 백제 직지왕이 그 누이 신제도원을 보내 섬기게 함.

507년 백제, 오경박사 은양이를 파견함.

540년 백제인 기지부 투항.

554년 백제, 담혜와 도심 등 9명의 승려를 보내 일본에 대한 포교를 본격화함. 백제 천문학자 왕보손이 천문학과 역법을 전함.

562년 가야가 멸망하여 진씨, 한씨가 일본으로 대량 건너옴.

577년 백제, 율사/선사/비구니/주술사/불교 공예가/사찰 건축 기술자 등을 보내 일본 불교 건설에 대대적인 지원을 함.

583년 백제승 일라, 일본의 초청으로 도일.

587년 백제, 사찰 건축 기술자 태량말, 태문, 가고자 등 3인과 화가, 백가 등을 보냄.

590년 백제, 율학에 정통한 혜총을 보내 소아마자에게 계율을 줌.

593년 성덕태자, 백제승 풍국을 초청하여 사천왕사 주지로 모심.

602년 백제승 관륵, 일본에 건너와 불교, 역법, 천문지리학을 가르침.

608년 고구려승 담징과 법정 일본에 건너옴.

612년 백제의 미마지, 산악을 일본에 전함. 백제의 노자공이 아스카 궁의 남쪽에 못을 파고 다리를 놓고 작은 산에 석불을 세움.

664년 3월, 백제 선광왕 등을 난바에 살게 함.

665년 2월, 백제국의 관위와 계급을 검토, 귀실집사에게 소금하의 벼슬을 줌. 백제 남녀 4백 명 도래, 오미국의 신전군에 살게 함.

666년 백제인 2천 명 도래, 동국에 거주시킴.

669년 백제의 여자신, 귀실집사 등 남녀 7백명을 오미국 포생군에 이주시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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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대략, 일본측 기록에 나타난 이주자들의 현황이다.

기록에서 내귀하였다느니, 바쳤다느니, 하는 표현들은 일본측 입장에서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조작된 것이니 액면 그대로 믿을 바는 못 된다. 요즘 말로 하면 이주하였다, 혹은 초청 비자로 건너갔다는 것인데, 대대적으로 역사를 뜯어고치면서 표현을 바꿔버린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대체 어느 정도의 숫자가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건너갔는가 하는 것이다.

우선 서기 405년 백제의 궁월군이 120개 군현의 군민을 이끌고 일본에 건너갔다는 기록부터 생각해 보자.

이것은 서기 396년 비류백제의 왕이었던 응신이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에게 쫓겨 일본으로 망명하자, 그 뒤를 따라 집단 망명한 세력이다. 그렇다면 120개 군현의 군민은 어느 정도일까? 적어도 수천명에 이르는 숫자였을 것이다. 궁월군의 망명 때에는 수천 명이 건너갔지만, 이보다 앞서 응신왕의 망명 때에는 수만, 수십만 명의 백제인이 일본으로 건너갔을 것이다. 그러나 응신왕 망명시에 일본에 건너간 숫자에 대해서 일본측 기록은 침묵하고 있으니 그 숫자를 알 길은 없다.

‘서기 540년 백제의 기지부 투항’이란 내용에서 기지부란 백제 성왕의 셋째 아들 임성태자이다. 임성태자는 오늘날의 야마구치현으로 백성을 데리고 건너가서, 거기서 대내(大內:오우치)라는 왕국을 이루며 살았다. 학자들은 이 임성태자가 쇼오토쿠 태자의 초상화를 그렸다는 아좌태자와 동일인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두 번째의 대량 이주는 백제가 패망한 서기 660년 무렵이다.

부여의 향토 사학자들은 백제가 망했을 때 금강을 빠져나간 백제인은 약 20만 명이라고 추정하고 있지만, 일본측의 기록에서 보이는 숫자도 만만치 않다.

먼저 664년 3월에 왕족인 선광왕이 건너왔는데, 이때도 많은 수의 군사들이 다라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665년 2월에 백제인 남녀 400명이 건너왔으며, 이어 666년에는 2천명이 도래한 것으로 되어 있으니, 이 숫자만도 2400명이 된다. 그러나 이것은 당시 통계에 잡힌 숫자이고, 통계에 잡히지 않은 난민들의 숫자를 합치면 엄청날 것이다.

또 하나 주목해 보아야 할 것은 서기 562년 당시 고령가야가 망하자 이때도 대량 이주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기록에는 귀족인 진씨와 한씨들이 대거 건너간 것으로 나와 있지만, 그들을 따라간 백성들의 숫자 또한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이들 진씨는 바로 교토에서 호족으로 자리잡은 진하승의 선조들이며, 한씨들은 나라 명일향촌에 터를 잡은 아지사주의 선조가 된다.

일본 역사의 실제적인 시작은 서기 396년 응신천황부터이다. 그 이전의 왕들은 모두 전설 속의 왕인데, 바로 그 전설 속의 왕들은 일본에 거주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한반도에 거주하고 있었다.

일본 역사는 이러한 콤플렉스를 감추기 위해 서기 396년부터 시작되는 응신의 역사를 무려 120년이나 소급하여 서기 276년부터 시작된 것처럼 은폐하고 있다. 일본사가 얽히고 설킨 것은 바로 이것 때문이고, 일본사의 비극 또한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천황가의 계보가 흐트러졌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한 책이 서기 815년 일본에서 편찬한 <신찬성씨록>이라는 책이다. <신찬성씨록>은 일종의 대대적인 호적정리 사업이다. 이 호적 사업은 일본의 수도와 그 주변 5개국에 거주하는 주민들의 호적을 일제히 정리한 것이다. 말이 수도와 그 주변 5개국이지, 이는 당시 일본에 거주하고 있는 국민의 대다수였을 것이다.

여기에는 무려 1182개의 씨족이 나와 있는데, 그것을 출신지별로 분류해 보면 당시 일본 열도에 살던 사람들이 누구였는지를 알 수 있다. 이런 분류는 이미 여러 사람이 했는데, 그중 서울대 홍원탁 교수의 분류를 따라본다.

그가 분류한 1182개의 출신지별은 다음과 같다.

 

1. 응신천황 계통의 백제 왕족 후손 씨족이 335개

2. 응신시대 혹은 그 이전에 일본으로 건너간 한반도계의 후손으로 추정되는 천신 씨족 집단이 373개

3. 기타 158개의 백제 씨족

4. 신라, 고구려, 가야에서 건너간 씨족이 61개

5. 한국과 직접 관련이 없다고 생각되는 씨족이 225개(이 225개 씨족을 다시 분류해 보면 땅의 신과 관계 있는 시족이 30개, 중국계가 109개, 116개는 미정 잡성이다. 그러나 이 미정 잡성도 더욱 추적해 보면 그중 백제계가 18개, 고구려계가 7개, 신라계가 8개 가야계가 1개이다.)

 

첫 번째 항의 응신천황이란 서기 396년 고구려 광개토대왕에 패퇴하여 일본으로 망명한 백제의 왕이다. 바로 그와 관계 있는 백제 왕족 씨손이 335개라는 얘긴데, 이 호적 조사가 815년에 실시되었으므로 일본에 도래한 지 약 419년 만에 그 자손이 엄청나게 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두 번째 항의 응신시대 이전이란 서기 396년 응신왕의 망명 이전을 말함인데, 그때 일본에 건너간 한반도계 씨족이 무려 373개이다. 말하자면 서기 396년 이전에 일본땅으로 수많은 한반도인들이 건너갔는데, 그들은 규슈 일대에 작은 부족 국가를 이루고 살았었다. 그리고 그들 중 상당수가 수도가 있던 교토로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하나 특이한 것은 천신 씨족이란 말이다. 이는 고조선계를 말하는 것이다. 고조선이라고 하면 우리는 아득한 옛날로 생각하고 있지만, 이미 고조선 시대에 일본으로 이주한 사람도 상당수에 달하고 있다. 이 문제는 앞으로 학자들이 좀더 자세히 연구해야 할 문제이다.

어쨋든 이러한 분류를 통해 우리는 자명한 한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그것은 한국인과 직접 관계가 없는 씨족은 1182개 중에서 겨우 221개 씨족밖에 안된다는 사실이다. 즉 서기 815년 당시 일본의 수도인 교토와 그 주변 인구의 80퍼센트 이상이 한반도 출신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서기 815년, 즉 고대 일본의 실상이다. 1182개의 씨족 중에서 961개의 씨족이 한반도 출신인 것이다.

그렇다면 결론은 확실하다.

당시 일본은 바로 한반도인이 건설한 제 2의 국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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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천황가>

 

 

오래전부터 일본의 천황가는 그 출신이 한반도계라는 의심을 받아왔다.

천황이 왕위 계승을 할 때 인수인계한다는 삼종의 신기(칼, 거울, 곡옥)는 가야에서 건너온 것으로 알려져 있고, 일본 황실에서만 즐긴다는 정형시, 화가는 신라의 향가에서 시작된 것이며, 일본왕가의 고대 고분에서는 백제계 유물이 대량으로 출토되고 있고 최근에는 한술 더 떠서 기토라 고분의 경우처럼 고구려계통의 천문도까지 나오고 있다.

역사 이래 지금까지의 일본 천황은 모두 125명이다.

제 1대는 기원전 660년의 신무천황이다. 기원전 660년에 일본 땅에 천황이 있었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기원전 660년의 신무천황부터 14대 중애천황에 이르기까지의 일본 역사는 일본의 역사가 아니다. 그 14대 동안의 역사는 일본 땅에 존재했었던 것이 아니라 한반도에서 있었던 일을 일본에도 있었던 것처럼 각색했거나 큐슈에서 있었던 일을 기록한 것이다.

그 각색자는 서기 712년에 편찬된 <고사기>와 720년에 편찬된 <일본서기>의 작자들이다. 물론 그 사람들은 일본 황실의 명으로 그 책을 썼다. 따라서 당연히 그 책의 각색의 주체는 일본의 황실이다.

 

제 1대 신무, 제 2재 수정, 제 3대 안녕, 제 4대 의덕, 제 5대 효조, 제 6대 효안, 제 7대 효령, 제 8대 효원, 제 9대 개화, 제 10대 숭신, 제 11대 수인, 제 12대 경행, 제 13대 성무, 제 14대 중애

바로 이들 14대 왕은 모두 각색된 왕들이다.

 

위에 열거한 제 1대 신무천황으로부터 제 14대 중애 천황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는 너무나 복잡하다. 한반도에 있었던 일을 윤색했거나 나라의 야마토 조정으로 천도를 하기전 큐슈의 왕국에 있었던 일들을 포함하고 있어 그 실체를 밝혀내기가 대단히 어렵다.

그건 우리 뿐만 아니라 일본인들도 마찬가지이다.

일본의 유수한 출판사들이 펴낸 일본사 연표를 보면 제 1대 신무 천황에서부터 제 32대 숭준천황에 이르기까지의 생몰 연도와 집권 기간이 나와 있지 않다. 정확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하는 일본의 쟁쟁한 학자들도 그 연도에는 자신이 없는 것이다.

말하자면 서력기원으로 환산해서 서기 몇 년에 즉위했고 서기 몇 년에 퇴임했다는 기록이 아예 없다는 얘기이다. 일본 천황가에서 그 실체를 어느 정도 규명할 수 있는 것은 제 15대 응신천황때 부터이다.

그럼 여기서 일본 왕가의 역사를 제 15대 응신천황으로부터 시작해서 풀이해본다.

응신천황은 한반도에 있었던 비류 백제의 마지막 왕이었다는 것이 한국의 제야사학자들의 주장이다. 그러니까 제 1대에서부터 제 14대에 이르는 일본 천황들은 한반도에 있었을 당시의 비류 백제의 왕들이다. 응신대왕의 선조들의 역사인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이것조차 불명확하다. 제 10대 숭신천황이나, 제 11대 수인천황의 경우는 비류 백제의 왕들이 아니라 가야계의 왕으로 추정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 1대부터 제 14대까지의 일본 고대 황실의 계보를 논하는 것은 아직 이르다.

일본의 고대 사학자들도 이 부분을 “미싱 링크(Missing Link)”라고 부르고 있다. 다시 말하면 분명히 연결은 있지만 불명확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체로 응신천황을 사학자들은 서기 396년에 일본으로 망명한 비류 백제의 마지막 왕으로 추정하고 있다. <일본 서기>에서는 그가 제 14대 중애 천황의 넷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기장족희(氣長足姬 : 숨기 좋기)라고 기록되어 있다. 한국의 재야사학자 김성호는 그가 390년 비류 백제에서 왕위에 즉위했고 396년에 비류백제를 침공한 광개토대왕으로 인해 일본에 대선단을 이끌고 망명하여 서기 397년 큐슈에 정권을 수립했다고 주장한다. 또한 그는 응신천황은 그후 나라지방으로 이동하여 나라, 즉 국가를 세웠는데 그것이 야마토 정권이라는 것이다. 대체로 학자들은 김성호의 주장에 반론을 제기하지 못하고 있는 입장이다.

일본에 야마토 정권이 수립된 것은 서기 404년의 일로 이때부터 일본에 최초의 본격적인 국가가 성립되었으며 최초의 황실은 백제로부터 시작된다라고 추정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서기 815년에 실시한 일제 호적정리의 결과와 일치한다. 당시 실시된 호적정리는 일본의 유수한 고대사 기록인 <신찬성씨록>이다.

이후 일본의 황실은 제 15대 응신, 제 16대 인덕, 제 17대 이중, 제 18대 반정, 제 19대 윤공, 제 20대 안강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일본의 역사는 제 18대에 가서 급전직하로 바뀐다. 제 18대 반정천황은 고구려계였다. 즉 17대까지 백제의 왕들에 의해서 왕권이 계승되다가 18대부터는 고구려계로 바뀌어버리는 것이다. 따라서 그 천황의 이름도 심상치 않은 반정(反正)이 된다. 이어서 제 19대가 되면 이번에는 뜻밖에도 신라계의 피를 받은 윤공천황이 들어선다. 이때부터 천황가의 족보가 대단히 복잡해지는 것이다.

일본 천황가의 족보가 대단히 복잡해졌다는 단서는 바로 <신찬성씨록>의 서문에도 그대로 나온다.

이 책의 서문을 보면 당시 일본 정부가 서기 815년에 갑자기 대대적인 호적정리 사업을 한 이유가 나와있다.

 

윤공천황 치세때 가문 관계에 커다란 혼란이 일어났다. ... 황극천황(제 35대)이 왕위에 계실 때 지방의 기록이 모두 불타 버렸다. 그러다가 천지(제 38대)가 태자로 계실 때 쿠나(船史)집안의 문서 담당관인 혜척(惠尺)이 타다나마 그을은 기록을 조정에 바쳤다. ... 경오년(서기 670년)에 호적이 다시 편찬되고 사람들의 씨족, 골족 관계가 명백해졌다. 천평승보(서기 749-757)시대에 조정의 특별한 배려로 모든 외국인에게 원하는 성씨가 주어졌다. 먼저 주어진 성과 후에 주어진 성이 모두 문자가 같기 때문에 어느 가문이 외국인이고, 어느 가문이 일본 토박이인지 확실치 않게 되었다. 도처에서 서민들이 고귀한 가문의 자손인 양 행세했으며, ...

 

이것이 <신찬성씨록>의 서문에 나온 말이다.

바로 그 책의 맨 첫 줄에 보면 윤공천황 때 가문 관계에 큰 혼란이 일어났다고 쓰여있다. <신찬성씨록>을 펴내야 했던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그것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다른 왕 때에는 별 문제가 없었는데 왜 유독 윤공천황 때에 이르러 가문관계에 큰 혼란이 일어났던 것일까?

일본의 사학자들은 그가 신라와 관련이 있는 왕이라고 공인하고 있다. 그가 신라계 였기 때문에 바로 큰 혼란이 생긴 것이다. 그 전까지 일본의 천황가는 백제계였다. 비류백제의 응신천황이 서기 396년 일본으로 망명한 이후 일본의 왕은 줄곧 백졔계였는데, 윤공 때에 이르러 느닷없이 천황가가 신라계로 바뀌어버리고 역사를 뜯어고치면서 큰 혼란이 생긴 것이다.

그렇다면 윤공 천황은 신라계의 누구인가?

그가 즉위한 것은 서기 532년, 그의 나이 37세 때이다. 서기 532년. 대체 이 해에 어떠한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무대를 한반도로 옮겨보면 서기 532년은 금관가야가 신라에 의해 멸망한 해이다. 신라의 법흥왕은 가야 6국 중 가장 강력하게 신라에 저항하던 금관가야를 멸망시키고 그 지역을 금관궁으로 격하시켜 버린다.

금관가야.

이 나라는 경상남도 김해에 근거지를 둔 6가야의 하나로 가락국 혹은 대가야 혹은 본가야라고 불리었다. 바로 가야 6국 중에서 가장 힘이 센 맹주였던 것이다. 금관가야가 망하던 해인 서기 532년 당시 그 나라의 왕은 제 19대 구해(仇解)왕이었다.

이 대목에 관해 삼국사기에는 이렇게 서술되어 있다.

 

마지막 왕인 구해는 신라에 나라를 바친 뒤 높은 벼슬을 받고 본국을 식읍으로 하였다.

 

이 기록에 따르면 구해왕은 금관군으로 격하된 뒤 ‘높은 벼슬’을 받았다고만 되어 있지 그가 어떻게 살다 어떻게 죽었는지는 나와있지 않다. 그렇다면 과연 일국의 국와까지 지낸 사람이 신라 조정에 준 높은 벼슬에 만족한 채 조촐하게 살다가 죽었는가?

과연 그랬을까? 사서의 행간을 살펴보면 <삼국사기>의 기록대로 인 것 같지는 않다. 유감스럽게도 일연스님이 쓴 <삼국유사>에는 구해왕에 대한 언급이 없다. 삼국유사의 가락국기에는 가야국의 시족 수로왕의 탄생설화를 시작으로 제 2대 거등왕에서부터 제 10대 구형왕까지의 역사만 기록하고 있을 뿐, 금관 가야에 대한 기록이 없다.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 스님이 가야의 역사를 제대로 알지 못해서 쓰지 않았던 것일까? 아니면 11대 왕 이후의 역사에 대한 기록이 소멸되어 버려서 쓰지 못했던 것일까? 그 이유는 알 수 없다. 이 기록의 불비로 인한 역사의 복원을 일본쪽으로 시각을 돌린다. 금관가야가 망하던 서기 532년 바로 그 해에 일본에는 느닷없이 신라계로 공인된 윤공 천황이 즉위한다. 더구나 그는 백제계가 아닌 신라계이다. 그가 즉위하던 해를 꼭 집어내어 <신찬성씨록>의 서문은 가문 관계에 커다란 혼란이 일어났다고 쓰고 있다. 그렇다면 이것은 우연의 일치인 것인가? 느닷없이 백제계로 전승되던 왕권이 뒤집히고 신라계가 들어서던 그 해에 한반도에서는 금관가야가 소멸되었는데,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이 모두 우연의 일치일 것인가?

윤공천황은 금관가야의 마지막 임금인 제 19대 구해왕이 아니었을가? 그는 금관가야가 망하자 망국의 한을 안고 일본으로 건너간 것이 아닐까? 그리고 일본 내에 있었던 가야계 세력과 손을 잡고 백제계 천황가를 공격하여 뒤집어 엎어버린 것은 아닐까?

일본의 고대 국가에서 가장 팽팽하게 대립한 두 세력은 백제계와 가야계였다는 것을 나는 앞에서 설명한 바 있다. 바로 그 가야계의 호족들은 물부집안을 비롯한 진(秦)씨, 한(漢)씨 집단이었다.

물부는 나라 지방의 기성(磯城), 반여(磐余) 땅에 바탕을 둔 세력가였으며, 진씨는 교토 일대를 다스리는 호족이었고, 한씨는 철을 다룰 줄 아는 기술집단이었다. 바로 이 세력들과 구해왕 자신이 데리고 온 가야군이 힘을 합해 왕권을 찬탈한 후 스스로 왕위에 오른 사람이 윤공 즉 구해라고 추정되는 것이다.

구해는 자신의 전 천황이었던 제 18대 반정 천황을 죽이고 왕권에 오른 사람이다. <일본서기>에도 윤공이 신라계로 그려져 있다. 서기 573년조의 기록이 바로 그것이다.

 

즉위 42년 춘 정월, 천황(윤공)이 돌아가셨다. 그때 나이 78세였다.(고사기) 신라가 천황이 붕하였다는 것을 듣고 놀라고 걱정하여 조물의 배 80척 및 악공 80인을 바쳤다. 그들이 대마도에 묵으며 크게 곡하였다. 스쿠시(오늘날의 후쿠오카, 큐슈 부근)에 와서 또 크게 곡하였다. 난파진(오사카)에 머물러 모두 소복을 입었다. 모두 조물을 받쳐 들고 여러 가지 악기를 울리며 난파진에서 경(수도가 있었던 나라)에 이르기까지 혹은 곡을 하고 혹은 춤 추고 노래하였다. 그리고 빈궁에 참석하였다.

 

윤공이 죽자, 왜 신라가 놀라서 큰 걱정을 했을까?

윤공은 두 가지로 해석되는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