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용글들

[스크랩] The diverse activities of the Kugonin at the Medieval period Nishinotsuji site, Osaka, Japan

영양대왕 2008. 1. 6. 20:34

오늘은 '일본 오사카의 중세 니시노츠찌 유적에서 보이는 쿠고닌의 활동'에 대해 잠깐 소개하고자 한다.
작년 초여름쯤이었던가, 연구소에서 정기적으로 실시하는 해외초청학자 특별강좌 제5회 강연회에서 재밌는 강의가 열렸다.
우리 연구소에 교환연구원으로 있던 쇼다상(청동기시대 전공)이 오사카에서 열린 세계고고학대회에서 만나 친분을 갖게 된 분을 초청했던 것이다. 히가시 오사카 민족박물관(Higashi-osaka city cultural Properties Association)에서 일본 역사시대에 나오는 말, 소뼈 등에 대한 연구와 지질고고학(Gio-Archeaology) 연구를 병행하고 있던 히데타카 베쓰호 선생님이 바로 그 주인공이었다. 주인장이 왜 이 강의를 재밌게 들었냐면, 한국 고고학계에서 잘 다루지 않는 부분들을 언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평소 청동기시대 및 특정 역사시대(주로 고구려, 백제고고학)에 대한 연구가 주를 이루고 있던 연구소이기에 해외초청학자 강연회는 외국의 최신 이론이나 최근 학계 현황을 아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 그 중에서도 고대사쪽에 많은 연구가 집중되어 있는데 제5회 강연회에서는 특이하게도 일본 중세시대를 다루고 있었기 때문에 그 점부터가 주인장에게는 굉장히 흥미로웠다.

 

더불어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일본 중세시대 중에서도 쿠고닌이라는 특정 집단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어서 그때 주인장이 많은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기억한다. 쿠고닌은 '공어인(供御人)', 즉 국가에 물건을 납품하는 어용상인을 가리킨다. 하지만 단순히 상업활동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해운을 장악하고 어업활동도 겸하고 있었기에 어민(魚民)이라고도 할 수 있었으며 도살업이나 기타 여러 수공업(오늘날 1차 산업이라 부를 수 있는 기술업 관련 업무 포함)에도 종사하고 있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향소부곡(曲)이라는 특수 지방행정단위가 있었는데 그 중 소(所)라고 하는 중앙정부에서 필요로 하는 각종 물품을 생산 · 공급하는 지역이 있었다. 그 곳의 주민은 모두 공장(工匠)이었으며 자기소(), 철소(), 은소(), 금소(), 동소(), 사소(), 지소(), 주소(), 와소(), 탄소(), 염소(), 묵소() 등 그 범위는 대부분의 수공업을 망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양자가 서로 비슷한 것 같지만 쿠고닌은 좀 더 포괄적인 업무를 담당했다는 점에서 양자는 차이가 있다.

 

조선시대에 소잡는 백정이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았던 것처럼 일본에서도 도살업 종사자는 신성한 장소에 출입이 금지되는 등 사회활동에 많은 제약이 있었다. 12세기 문헌을 보면 사회적으로 이들의 활동을 제한했던 기록이 분명히 등장하고 있다. 베쓰호 선생님은 이들에 대한 기록이 대부분 문헌에 있는데 어떻게 하면 고고학적으로 복원할 수 있을까~하는 고민을 갖고 있었고 그러던 중 오사카에서 니시노츠찌 유적을 조사하게 되었다. 선상지에서 구릉지대에 걸쳐 있는 니시노츠찌 유적은 주변에 자연수로와 인공수로가 흐르고 있다. 흔히 수로를 조사하면 단면을 통해 내부토를 알아보는데, 자연수로는 물이 계속 흐르기 때문에 내부 퇴적토가 충적될 여지가 적다. 하지만 인공수로는 물이 흐른다기보다 고여있는 상태로 유지되므로 내부 토사를 그닥 많이 운반하질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 안에서 유물이 발견되면 그것은 다른 곳에서 흘러들어왔다고 보기 어렵다. 조사자는 이 인공수로에서 12~14세기에 이르는 다양한 시기의 유물과 여러 동물뼈들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 뼈들을 정밀조사한 결과, 소 · 말 등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며 더불어 상당량의 어망추도 발견되었다. 즉, 문헌에 나오는 어업과 도살업을 담당했던 쿠고닌의 고고학적 흔적일 가능성이 크다는 소리가 되었다.

 

쿠고닌의 수장은 형부(兄部), 즉 코노코베라고 불렸으며 쿠고닌들의 배타적인 어로 활동 경계 및 범위는 대강어주(大江御廚), 즉 오에노미쿠리야라고 불렸다. 그리고 그 주변으로 무엔[無緣], 쿠가이[公界], 라쿠[樂]라고 불리는 지역이 있었다. 무엔은 승려들의 지역, 쿠가이는 쿠고닌의 지역, 라쿠는 예술가 및 광대 등의 지역이었는데 이들 지역은 일종의 자치지역으로서 무법지대라 할 수 있었다. 일본 전역에서 이들 지역의 전체적인 비율이 어느 정도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며 지역마다 명칭 등도 달랐다고 한다(다시 말하지만 지금 소개하는 것은 오사카의 쿠고닌에 대한 내용이다). 이들 지역들은 서로 경쟁 및 대립하는 관계였고, 국가나 지방의 통제력이 미치질 않았다. 실제 오사카 법통사의 승려들이 쿠고닌의 어업과 수렵활동을 방해하는 기록화가 남아있는데 그만큼 이들의 대립은 전국적으로 보편화된 현상이었던 것 같다.

 

당시 일본 중앙정부는 쿠고닌들에게 독점적인 부와 권리(어업권과 도살업권 등)를 부여하는 대신 쿠고닌은 하츠오라 불리는 진상품을 제공했다. 그들은 인간 취급을 받지 못 했고 당연히 세금이나 호적과도 상관이 없었다. 일반 백성들은 중앙정부에 세금을 냈고, 쿠고닌들에게 물건을 샀다. 그리고 쿠고닌들은 중앙정부에게 받은 권리를 이용해 물건을 만들어 팔아 그 이득을 취했다. 베쓰호 선생님은 쿠고닌과 백성을 영어로 non-human, human이라고 적고 있어 양자의 사회적인 위치가 어떠했는지 극단적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이러한 쿠고닌의 지위가 아마 우리나라의 소(所)와는 확연히 다른 점이 아닐까 생각한다. 국가에서 특정 기술을 지닌 집단을 확보하고 통제 · 관리했다는 점, 그들을 국가의 근간을 이루는 백성과 다른 존재로 인식하고 취급했다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쿠고닌이 그런 대접을 경제적 지위의 확보로 보상받는 것과 달리 소의 장인들은 그러하지 못 했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일본과 고려의 기술자에 대한 인식, 경제구조, 사회분위기 등이 이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더불어 니시노츠찌 유적에서는 소의 머리를 단번에 깨뜨릴때 쓰는 도구, 목을 한번에 베는데 쓰는 도구, 손도자 등이 출토되었고 전염병 등을 쫓기 위한 부적도 발견되었다. 도교가 한국에는 잘 정착했지만 일본에서는 그러질 못 했고 대신 음양도가 활발하게 그 세를 키웠다고 한다. 그 업무를 관장하던 음양사들이 달력을 만들어 판매하거나 부적을 만들어 배포했는데 이를 통해 봤을때 니시노츠찌 유적은 쿠고닌, 음양사, 대장장이, 석공, 어부, 도살업자 등이 한데 어우러져 살던 곳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즉, 이들만의 자치적인 성격을 지닌 공간이었다는 소리가 된다. 베쓰호 선생님은 이러한 고고학적 자료를 통한 계층에 대한 연구가 한국에서도 가능한지 궁금해했고, 동물뼈와 같은 자료들을 찾기 위해서 한국을 방문했다고 밝혔다. 마침 연구소에서 아산 갈매리 유적을 발굴하고 있었고 그곳 저습지에서 엄청난 분량의 동물뼈 등이 출토되었던 터라 그 뼈들을 조사할 겸 연구소에 들려 강의를 하셨던 것이다.

 

강의를 듣고 주인장이 했던 몇몇 질문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중앙정부 입장에서 봤을때 쿠고닌의 진상품과 일반 백성의 세금의 비율은 어느 정도였나~에 대한 대답은 쿠고닌의 진상품이 압도적으로 많다였다. 즉, 쿠고닌이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는대신 독점적인 부와 권리를 획득한 결과, 중앙정부는 엄청난 물량의 수공업 제품들을 진상받았던 것이다. 그 다음으로 천민 신분임에도 엄청난 부를 축적한 쿠고닌들이 국가 운영에 있어 어떤 역할들을 했는지를 질문했었다. 실제 쿠고닌들이 축적한 부는 문헌상 확인이 가능하며 이들 쿠고닌은 15세기 무렵 사회의 중요 계급으로 떠오른 무사계급과 크게 대립하게 된다고 한다. 16세기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정책적으로 쿠고닌을 없애려고 하였고 그들을 '좌(座)'라는 새로운 편제로 개편했다. 하지만 좌는 여전히 힘을 길렀고 메이지 유신때 중앙 정부를 지원하여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게 되었다고 했다. 즉, 쿠고닌이야말로 일본 근대 경제사에 있어 가장 주목해야 할 주역이라 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니시노츠찌 유적에서 보이는 유물양상들과 일반 주거지에서 보이는 유물양상들 사이에 큰 차이가 없는데 그 유적을 쿠고닌의 근거지로 보는 것은 조금 무리가 있지 않은가~라는 질문을 했다. 그에 대해 동물 두개골을 깨는 망치는 오직 이 유적에서만 나왔는데 당시 죽은 동물들이 어린 나이였음을 감안했을때 그 동물들은 자연사가 아닌 도살에 의해 죽은 것이라는 것이 선생님의 답변이었다. 또한 손도자는 많이 출토되지만 철낫(鎌)은 많이 발견되지 않는다고도 덧붙였다. 이 부분은 한국과는 조금 달라서 그냥 넘어갔다.

 

지난번 김용만 선생님의 생활사 강의 2번째 - 기술자와 상인을 듣고 문득 떠올라 언젠가 글을 한번 써야지~했는데 이제야 올린다. 쿠고닌에 대해서는 국내에서 많은 연구가 진행되지 않은 것 같았으며 하물며 일본 고고학계에서도 연구자가 별로 없는 것 같았다. 그때 따로 발표문을 받은 것은 아니고, 선생님이 세계고고학대회에서 영문으로 제작해 발표했던 파워포인트를 보면서 필기한 것이어서 이 부분에 대해 보다 자세히 알려면 따로 논문이나 연구자료들을 찾아봐야 할 것 같다. 그때 사진이라도 찍어놓든가 해야하는데 그런 것도 없어서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굉장히 아쉽다. 암튼 차후 선생님의 연구에 있어 도움이 될만한 자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을 갖고 이만 글을 마치도록 하겠다.

출처 : 우리역사문화연구모임(역사문)
글쓴이 : 麗輝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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