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용글들

삼국시대 특산물 - 잣, 다사마, 미역, 상추

영양대왕 2007. 11. 28. 10:37
아래 주소에서 인용해왔다.

 

패사(稗史)라는 말이 있다. 正史가 아닌 野史를 일컫는 또 다른 말이다. 하지만 또한『稗史』는 책 이름이기도 하나보다. 박순영의 논문을 읽다보니『稗史』에 대한 언급이 있었다. 그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고 한다.

 

신라의 사신들이 중국에 올 때마다 잣을 많이 팔았다

 

그리고 이수광의『지봉유설』에도 신라의 사신들이 중국에다 많은 잣을 팔았다는 기록이 있어 신라 이전부터 이 지역에서 질 좋은 잣이 산출되고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통일)신라시대 서원경(청주) 부근의『향촌장부(鄕村帳\簿)』에 기록된 '사해점촌(沙害漸村)'에서는 원래 있던 잣나무가 86株였는데 지난 3년간 더 심은 것이 34株로 모두 120株로 늘었다는 기록도 있다.『신라민정문서(新羅民政文書)』혹은『신라장적(新羅帳籍)』으로 더 널리 알려져있는 문헌인데 이때 잣나무에 대한 기록이 있는 것은 알았지만 그때는 크게 신경쓰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지금 보니 그 잣이 신라 특산품이라고 한다. 잣은 해송자(海松子) · 백자(柏子) · 송자(松子) · 실백(實柏)이라고도 한다. 솔방울처럼 생긴 구과(毬果)에 들어 있는데 속에 있는 흰 배젖[胚乳]은 향기와 맛이 좋으므로 식용하거나 약용한다고 한다. 성분은 지방유(脂肪油) 74%, 단백질 15%를 함유하며 자양강장의 효과가 있어 각종 요리에 고명으로 쓰이며, 죽을 끓여 먹기도 한다. 한마디로 몸에 좋은 식품이라는 소리다. 주인장도 평소에 잣을 즐겨먹지는 않지만 신라의 특산품 중에 잣이 있다는 사실은 또 처음 알았다. 물론 그동안 주인장이 주의깊게 살펴보지 않은 탓이겠지만 말이다.

 

그나저나 박순영이 참고문헌에도 당당히 인용했다고 쓰고 있는 이『稗史』라는 문헌이 궁금했다. 하지만 인터넷에서는 그냥 야담, 야사의 다른 말 정도로만 적고 있었다. 그나마 네이버 블로그 하나에서 작은 단서를 하나 건질 수 있었다. 고려 말기의 문신인 우탁(禹倬)이라는 사람이 쓴 책으로『역동문집(易東文集)』이 있다고 한다. 책머리에 '단양우씨명현록(丹陽禹氏名賢錄)'이라 하여 시중령공사적(侍中令公事蹟) 1편이 있고, 이어『역동문집』이 있다. 그 안에는 등과홍패(登科紅牌) 1편, 시 3수,필적(筆蹟) 1편, 동국사전(東國史傳) 2편, 열성조포양록(列聖朝褒揚錄), 동국제현찬양록(東國諸賢遡揚錄), 역동서원사적(易東書院事蹟) 기(記) 각 1편, 서원사적(書院事蹟) 3편, 의(議), 청문묘종향소(請文廟從享疏) 각 2편, 유지(遺趾), 묘소(墓所), 적성군사적(赤城君事蹟) 각 1편, 양호당문집(養浩堂文集) 상하 2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 중 저자의 작품은「제영호루(題暎湖樓)」,「잔월(殘月)」,「사인암즉경(舍人巖卽景)」 등 시 3수 뿐이다. 그 중에「동국사전」은『여사(麗史)』「본전(本傳)」,『동국통감』,『동사(東史)』「열전(列傳)」,『패사(稗史)』 등에서 저자와 관련된 사실을 발췌한 것이라 한다. 그렇게 봤을때 이『패사』라는 책이 있었다는 사실 정도는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이상은 알 수 없었다.

 

암튼 신라의 특산품으로 잣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상당히 흥미로웠다.

 

그리고 하나만 더 언급하자면 '신라에서는 허리에 새끼줄을 매고 바다 속에 잠수하여 심해의 대엽조를 채취한다'는 기록이 당 개원(開元)때의 사람 진장기(陳臟器)가 저술한『본초습유(本草拾遺)』라는 책에 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말하는 대엽조(大葉藻)가 미역인지 다시마인지 분명치는 않으나 해조류임은 분명하다. 본래 대엽조라는 단어는 깊은 바다에 사는 잎이 큰 해조류인 '큰잎말'을 의미한다고 한다. 즉, 우리가 흔히 아는 해조류들은 일반적으로 대엽조라고 불러도 무방한 셈이다. 또한『남해약보』에는 당시 신라인이 다시마를 채취하여 중국에 수출한 기록도 있어 이 당시의 수출품 중 하나로 신라의 해조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외국에 알려질 정도로 식생활에도 많이 사용되었으며 그 질도 매우 우수하였음도 알 수 있다. 물론 동해안의 동예에서는 해표(海豹 : 바다표범)의 가죽인 반어피(班魚皮)도 났었고 사어(상어의 고어)의 가죽인 사어피(沙魚皮)도 나 이후 신라시대까지도 특산품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다시마나 미역 등의 해조류에 대해서는 신라 이전시대에 특산품이었다는 기록은 없는 듯 싶다.

 


 

그렇게 봤을때 이들 해조류는 신라시대에 이르러 새로운 채취방법에 의해 얻어졌고 그것이 바로『본초습유』에 기록된 잠수 방법이 아니었나 싶다. 동해가 깊고 파도가 높았기에 아마도 허리에 새끼줄을 매달지 않고는 잠수하기가 곤란했을 것이다. 오늘날 제주도에서 볼 수 있는 해녀(海女)의 모습을 연상케 하는데 당시 이런 방법으로 해조류를 채취하는 지역은 많이 없었던 듯 싶다. 개원때면 당 현종때로서 시대는 713~741년까지이다. 즉, 8세기 초중반까지도 신라인들과 같이 해조류를 채취하는 지역은 흔치 않았던 듯 싶다. 이는 다시 말하면 동해안에 존재했었던 동예나 옥저 등의 집단은 이런 식으로 해조류를 취득하지 않았다는 의미도 된다.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연안의 바닷가에서도 이런 해조류들을 채집할 수는 있지만 심해에 있는, 사람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 자란 해조류들이 더 품질이 좋았던 것 같다. 

 

덧붙이자면 미역은 이미 고려시대때부터 널리 알려져 중국에 수출했고 미역에 대한 부분은『고려도경』에 자세히 나와있다고 한다. 그에 따르면 고려인들은 미역을 귀천의 구분없이 먹었다, 고 적고 있어 미역이 어느 정도로 널리 애용되었는지를 알게 해 준다. 그렇게 봤을때 고려 이전, 신라때부터 미역이 특산품으로서 중국에 수출되었다는 사실은 분명 주목할만한 사실이라 하겠다. 암튼 이 부분에 대해서 심도있게 공부해볼 여건이 되지 않아서 이 정도만 정리해보겠다.

 

전체적으로 고구려에서 상추가 중요한 수출품 중 하나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신라에서는 잣과 미역이 중요한 수출품이었다고 한다. 예전에 차(茶)에 대한 공부를 하면서 우리가 모르는 우리의 식문화가 굉장히 많다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던 적이 있다. 그동안 막연히 이런이런 것들을 먹었겠지~라고 하는 내용들이 사실 따지고보면 그간 중요하게 취급되지 않았을 뿐, 여러 문헌들에 다양하게 나오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이번에도 역시 마찬가지였고 말이다. 이렇게 놓고 보면 그때나 지금이나 몸에 좋은 음식을 즐겨찾고 필요하다면 해외에서도 수입해와서 먹는 건 똑같은 것 같다. 최근 FTA 타결로 농산품 부분에 대해 말들이 많은데 고구려나 신라 상인들이 이런 특산품을 해외에 수출해 막대한 이익을 챙겼으리라는 생각을 하니 내심 흡족해지기까지 한다. 앞으로 이런 식문화에 대해서도 보다 심도있는 연구가 진행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과 함께 이만 글을 마치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