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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고구려의 자연재해 발생상황 및 영향

영양대왕 2007. 11. 25. 18:36
'변강사지연구중심' 기관지에는 가끔 이런 글도 발표됩니다. 하지만 고대 중국의 사상이 고구려에도 그대로 적용될지는 의심이 가는군요. 또한 자연과학적 연구성과와 대조했으면 더 좋았을 것 같습니다. 나머지 백제, 신라의 자연재해기록과 대조해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이상 옮긴이의 말.



『中國邊疆史地究』20054 pp.37~42 (中國社會科學院 中國邊疆史地究中心)

 

 

고구려의 자연재해 발생상황 및 영향

高句麗自然災害發生狀況及影響

On the Occurrence Situation of Natural Calamity and Its Influence in Gaogouli

 

 

王利群(WANG Liqun), 李樂營(LI Leying)

(通化師範學院 歷史系)

 

 

摘 要:本文對高句麗自然災害的發生狀況及其影響進行了探討. 認爲高句麗自然災害以氣候災害爲主, 大致經歷了五個時期, 2-153, 154-253, 254-389, 390-492, 493-581, 竝對高句麗疆域, 經濟發展, 思想文化等形成了重要影響.

關鍵詞:高句麗; 自然災害; 階段劃分; 影響

王利群: 通化師範學院 歷史系副

李樂營: 東北師範大學 博士究生•通化師範學院 歷史系.

 

 

재해사연구는 재해재난 연구의 기본적인 과제로서 역사지리학의 중요한 알맹이다. 중국의 경우 재해사에 대한 과학적인 연구는 20세기 30년대에 시작되었고, 그 시작을 알린 것은 등운특(鄧雲特) 선생의『중국구황사(中國救荒史)』출판이었다.1 그러나 (당시) 체재의 제한 탓으로 이 책은 구체적인 왕조시대의 연구까지는 미처 전개하지 못했거니와 우리나라 고대 동북지방 소수민족지역의 재해사도 다루지 못했다. 고구려는 우리나라 동북지방의 고대민족정권인데, 서기 37년부터 서기 668년까지 존속했었고, 오늘날의 중국 요녕성과 길림성 동남부 지역, 그리고 한반도 북부지역이 활동지역이었다. 이 글은 고구려의 자연재해에 대한 기본적인 상황, 특징을 검토하고, 이것이 미친 사회•정치•경제적 영향 등을 두고 초보적인 논의를 한 것이다.

 

 

1

 

고구려의 자연재해에 관한 사서기록은 많지만 주로『삼국사기』,『위서』,『삼국지』,『북사』따위에 보이고 나머지 문헌에도 군데군데 보인다. 필자의 근거에 따르면, 유리명왕 21(서기 2)부터 평원왕 23(서기 581)까지의 579년 동안 다해서 56년 만큼의 자연재해가 일어났었다. 가지가지 자연재해가 모두 75번이었는데 평균해서 10년에 1.3번 꼴로 자연재해가 일어났었다. 재해유형과 회수를 아래와 같이 나타내었다.:

 

가뭄 12

바람 4

 

 

 

 

합계: 75

지진 19

우박 6

서리 8

6

메뚜기 7

돌림병 4

  6

기타 재해 3

 

상술한 통계는 고구려 자연재해의 기본적인 상황을 얼추 드러내지만, 겉에 드러난 것만으론 그릇된 판단에 이르게 할것이므로, 구체적인 분석을 거친 자료를 통해 결론지어야 하겠다.

 

먼저, 우리는 통계 시기구간을 일정하게 골라내었다. 시기 고구려 제1대왕 동명성왕 기간은 자연재해 기록이 없는데, 이 때는 고구려 초창기이므로 여러가지 제도가 아직 다 갖추어지지 않은 것과 관련될 것이다. 2대왕 유리명왕 중기(서기 2)가 되자 사서에 자연재해 기록이 나타나고, 때문에 이 글에선 자연재해 발생의 기점을 서기 2년으로 하여 통계를 내렸다. 고구려 후기, 특히 평원왕 23(581)부터 고구려가 멸망하기까지 87년 동안엔 겨우 3번의 자연재해 발생이 기록되었지만<보장왕 4(645), 보장왕 6(647), 그리고 보장왕 9(650)>, 객관적인 실제정황을 나타낸 것일 순 없다. 때문에 이 글에선 자연재해발생에 대한 통계 종료 시기를 평원왕 23(581)으로 정했다.

 

다음으로, 서천왕 4(273), 고국양왕 6(389), 그리고 안원왕 7(537)에는 자연재해 유형에 대한 뚜렷한 기록이 없지만『삼국사기/고구려본기』에 백성들이 굶주렸으니 곳간을 열어 이들을 도왔다 [民飢, 發倉賑之]고 적혀있으므로 자해재해로서 통계에 집어넣었다.

 

이러한 시기구간 선택은 보다 객관적으로 고구려 자연재해의 기본상황을 나타낸다. 통계수치를 볼 때, 고구려에서 일어난 자해재해 年수는 명확하게 오늘날보다 적거니와 동시에 같은 시기 중원지역보다도 적다. 그러나 정작은 이와같지 않은데, 우리는 사료를 낱낱이 살펴서 고구려 자연재해 기록의 아래와 같은 몇가지 특징을 발견했다.

 

첫째, 지역으로 따진다면, 고구려 도성지역에 대한 피해기록이 기타 지역보다 뚜렷하게 많다. 이 지역은 고구려의 정치, 경제, 그리고 군사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었음을 훤하고 쉽게 볼 수 있는데, 고구려는 이 지역의 안정과 발전에 힘을 기울였기 때문에 이 지역에 대한 기록이 가장 상세한 것이다. 도성지역에서 일어난 71변의 자연재해는 자연재해 총 횟수(통계 총수, 이하 동) 94.7%나 점유하되 나머지 지역은 4번만 기록되어 5.3% 만큼 점유하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고구려의 자연재해 기록이 보다 적은 원인의 한가지다.

 

둘째, 고구려의 자연재해로는, , 가뭄, 바람, 우박, 서리, , 메뚜기, 돌림병, 그리고 지진재해 등 아홉 가지가 있지만, 이 가운데 가뭄과 지진이 주된 것이어서 자연재해 총 회수의 41.3%을 점유한다. 우리는 아홉가지의 자연재해를 세가지로 나눌 것이다: 기후재해, 지질재해, 그리고 생물재해. 기후재해는 물, 가뭄, 바람, , 서리, 그리고 우박 따위의 여섯가지 재해를 말하는데, 다해서 42번 일어나서 자연재해 총 회수의 56%을 차지한다. 지질재해는 주로 지진을 가리키는데, 다해서 19번 일어나서 총 회수의 25.3%를 차지한다. 생물재해는 주로 메뚜기와 돌림병인데, 다해서 11번 일어나서 14.7%을 차지한다. 이밖에도 3번의 자연재해로서 유형이 확실치 않은 것이 총 회수의 4%을 차지하고 있다. 자연재해는 기후재해가 주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셋째, 끼친 영향의 정도에 따라서 볼 때, 일반적인 자연재해, 다소 무거운 자연재해, 그리고 심각한 자연재해로 나눌 수 있다. 우리는 사료에 곳간을 열어 백성들을 구했다[發倉賑之]고 적힌 예를 다소 무거운 자연재해로 삼았는데, 다해서 12번 일어났고 자연재해 총 회수의 16%을 차지한다. 이 가운데 기후재해는 9, 생물재해는 2, 그리고 지질변화는 1번으로, 역시 기후재해 위주다. 또한 우리는 사료에 백성들이 굶주려 사람들이 서로를 먹었다[民飢, 人相食]고 적힌 예를 심각한 자연재해로 삼았는데, 다해서 3번 일어났고 자연재해 총 회수의 4%을 차지한다. 이것들은 봉상왕 9(300), 소수림왕 8(378), 그리고 고국양왕 6(389)때 각각 일어났는데 모두 자연재해가 일어난 해에 뒤이어 발생했었다. 일반적인 재해는 모두 57번으로 자연재해 총 수의 76%을 차지한다. 이밖에 3번의 자연재해로서 영향을 끼친 정도를 확정할 수가 없는 것이 자연재해 총 수의 4%를 차지한다.

 

넷째, 재해가 출현하는 재해기와 무재해기가 번갈아가며 나타나는 특징이 있다. 무거운 재해기는 일반적으로 3년 지속되는데 모두 5번 발생했고, 무재해기는 일반적으로 20년 지속되었다. 그러나 평원왕 23(581) 이후 자연재해는 두드러지게 감소하는 추세에 있었다. 수나라 왕조가 시작되는 무렵부터 기후가 온난기로 접어들면서 기후재해가 확연하게 감소했기 때문에 직접적인 자연재해의 수가 줄어들었던 것이다. 또한 581년부터 고구려와 중원은 비교적 긴장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자연재해에 대한 기록을 다소 소홀히 했을 것이다.

 

이로써 고구려의 자연재해에 대한 문헌기록은 어느 정도 편향되어있으며 누락된 것도 적지 않음은 긍정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이런 기록으로 고구려의 자연재해를 총체적으로 파악하더라도 커다란 착오는 저지르지 않을 것 또한 긍정할 수 있다. 고구려 자연재해의 기본특징을 이해하고, 고구려 자연재해의 기본상황을 정확히 파악하여, 고구려 자연재해 연구를 깊이 벌리기 위해서 이런 문헌기록은 결코 빠질 수 없는 1차자료이거니와 대단히 높은 사료가치를 가진다.

 

 

2

 

고구려 자연재해의 발생은 대체로 다섯 단계를 거친다.

 

1단계: 유리명왕 21(서기 2)부터 차대왕 8(153)까지 153년 동안에 일어난 23연차의 자연재해 기록. 이 중에서 가뭄이 2, 지진이 7, 물난리가 3, 바람재해가 1, 메뚜기가 2, 눈이 2, 그리고 우박이 2번 있었다. 평균해서 10년에 1.5번씩 자연재해가 발생했는데 평균수준보다 높다. 다소 무거운 자연재해는 4번 발생했는데, 각각 민중왕 2(45), 모본왕 2(50), 태조대왕 56(108), 그리고 태조대왕 66(118)이다. 이 기간은 재해가 많은 시기였음을 알 수 있다. ㅤㅎㅜㅌ어보면 이 기간에 기후재해는 13, 지질재해는 7, 그리고 생물재해는 3번 발생했었다. 이 기간에 지진이 7번 발생하여 이 시기 재해 총 수의 30.4%을 차지하는데, 이는 이 시기가 동북지방의 지진활동기였음을 말해준다.

 

2단계: 차대왕 9(154)부터 중천왕 6(253)까지 99년 동안의 겨우 3번 뿐인 자연재해 기록. 여기에는 눈이 1, 서리가 1, 그리고 지진이 1번 있었다. 평균해서 10년에 0.3번 자연재해가 발생했는데, 평균수준보다 굉장히 작다. 이 기간은 재해가 적은 시기였음을 알 수 있다.

 

3단계: 중천왕 7(254)부터 고국양왕 6(389)까지 134년 동안 자연재해가 23번 발생했다. 이 중에서 지진이 8, 가뭄이 4, 서리가 3, 메뚜기가 1, 우박이 1, 바람이 1, 눈이 1, 그리고 돌림병이 2번 일어났고, 재해유형이 분명치 않은 2번의 재해가 기록되어 있다. 평균해서 10년에 1.7번 자연재해가 발생했는데, 평균수준보다 높다. 이 기간에 일어난 심각한 자연재해는 모두 사람을 먹을[人相食]정도였는데, 그 시기는 각각 봉상왕 9(300), 소수림왕 8(378), 그리고 고국양왕 6(389)때였다. 그렇지만 이 기간에 거듭해서 많이 발생한 자연재해를 ㅤㅎㅜㅌ어보면, 기후재해 10, 지질재해 8, 생물재해 3, 그리고 분명치 않은 자연재해 2번가 발생했었다. 이 기간은 재해가 많은 시기였다.

 

4단계: 고국양왕 7(390)부터 문자명왕 원년(492)까지 102년 동안 발생한 자연재해 3. 그 중에는 가뭄이 1, 눈이 1, 그리고 물이 1번 있었다. 발생시기는 각각 광개토왕 5(406), 장수왕 2(414), 그리고 장수왕 7(419)이었다. 평균해서 10년에 0.3번 자연재해가 일어났는데, 평균치보다 굉장히 적다. 이 기간은 재해가 적은 시기였다.

 

5단계: 문자명왕 2(493)부터 평원왕 23(581)까지 88년 동안 발생한 자연재해 23. 이 중에는 가뭄 5, 지진 3, 서리 1, 메뚜기 3, 2, 우박 3, 바람 2, 1, 그리고 돌림병이 2번 있었다. 1번은 안원왕 7(537)에 있었지만 자연재해 유행에 관한 기록이 없었다. 쭉 ㅤㅎㅜㅌ어보면, 기후재해 14, 지진재해 3, 생물재해 5, 그리고 1번의 자연재해유형을 알 수 없는 기록이 있다. 이 단계는 기후재해 위주임을 알 수 있는데, 자연재해가 이 단계 총 수의 60.9%을 차지하여 평균해서 10년에 2.6번 꼴로 자연재해가 발생했다. 평균수준보다 대단히 높고, 재해가 많은 시기였다.

 

상술한 바에서 알 수 있지만, 고구려의 자연재해는 명확히 주기성 파동을 가진다. 통상적으로 약간의 연차 재해성 해()가 나탄난 뒤로 십 몇 년간은 재해가 있는 해가 없다. 이렇게 재해가 많은 기간과 재해가 적은 기간이 번갈아가며 분포하는 특징을 가진다. 그러나 재해가 없는 해가 재해가 있는 해보다 분명히 많은데, 이는 고구려 통치기간이 상대적으로 자연재해가 적은 시기였음을 말해준다. 지진, 가뭄, 서리, 그리고 메뚜기가 고구려때 가장 높은 비율로 발생한 재해인데, 자주 잇달아 발생하든지 동시에 발생하며 나타난다. 즉 집단발생성 특징을 가진다. 예컨대 가뭄과 함께 자주 메뚜기가 나타난다든지, 큰물 뒤에 자주 가뭄이 출현한다든지, 큰 재해 뒤엔 항상 돌림병이 잇다른다든지 따위를 들 수 있다.

 

사료를 분석해서 우리는 대무신왕 24(41)부터 기후가 이상거동을 보이며 출현하는 것을 발견했는데, 한랭성에 관련된 기록이 부쩍 늘어났다. 대무신왕 24(41) “가을 9월에 서리가 내려 곡식을 죽였다 [秋九月, 隕霜殺穀]”,2 모본왕 2(49) “3월에 사나운 바람이 불어 나무를 뽑았다. 여름 4월에 서리가 떨어지고 우박이 비오듯 내렸다 [三月, 暴風拔樹. 夏四月, 隕霜雨雹]”.3 태조대왕 25(77) 11, “서울에 눈이 3척이나 쌓였다 [京都雪三尺]4, 태조왕 66(118) 가을 9, “메뚜기와 우박이 곡식을 해쳤다 [蝗雹害穀]”,5 차대왕 8(153) 여름 6서리가 쌓였다 [積霜]”.6 차대왕 13(158) 이후로 기온이 도로 상승해서 중천왕 때까지 이어졌다.

 

서천왕 때부터 다시 한랭한 날씨가 더욱 빈번하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서천왕 3(272) “여름 4, 서리가 내려 보리를 해쳤다. 6월엔 큰 가뭄이 들었다 [夏四月, 隕霜害麥. 六月, 大旱]”,7 봉상왕 7(298), “가을 9, 서리와 우박이 내려 곡식을 죽이니 백성들이 굶주렸다 [秋九月, 霜雹殺穀, 民饑]”,8 봉상왕 9(300), “2월부터 가을 7월까지 비가 오지않아 흉년이 드니 백성들이 서로를 먹었다 [自二月至秋七月, 不雨, 年饑, 民相食]”9, 미천왕 원년(301) 겨울 10, “누런 안개가 끼어 사방이 막혔다. 11월에 바람이 서북쪽으로부터 불어와 엿새 동안 모래를 날리고 돌을 굴렸다  [黃霧四塞. 十一月, 風從西北來, 飛砂走石六日]”,10 고국원왕 5(335) 가을 7, “서리가 내려 곡식을 죽였다 [隕霜殺穀]11, 고국원왕 13(343), 겨울 11, “눈이 다섯 척이나 내렸다 [雪五尺]12, 소수림왕 7(377) 겨울 10, “눈이 내리지 않고, 백성들은 돌림병에 걸렸다 [無雪, 民疫]13, 소수림왕 8(378) 가뭄이 들어 백성은 굶주려 서로를 먹었다 [民饑相食]14, 고국양왕 5(388) 여름 4, “크게 가물었다. 가을 8, 메뚜기떼가 나타났다 [大旱. 秋八月,  ]”15. 이런 상황은 고국양왕 말년까지 쭉 잇달아 있었다.

 

옛 기후를 이야기하자면 축하정(竺可楨)선생의「근 5천년간 중국의 기후변동에 대한 초보적 연구(中國近五千年來氣候變遷的初步硏究)」란 글을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을 것이다. 축하정 선생은 물후(物候)방법으로 고대기후를 연구해서 중국기상학 역사연구의 기틀을 다지고 기상학사상 시대적인 의미의 획을 그었던 것이다. 축하정 선생은 동한(東漢)시대 우리나라의 날씨는 한랭화하는 추세에 있었다고 생각했었다. 이와 같은 기후에 대한 총제적 결론은 오늘날 우리들을 납득시킴은 물론 정확하지 않을 수 없다. 축하정 선생은 서력(A.D.) 초기까지 심각한 추위가 나타났다고 이야기했지만, 정작 동한 때 출현한 한랭현상에 대해선 다루지 않았었다.16 상술한 자료를 미루어보아 우리나라 동북지방의 기후는 동한이 시작될 무렵에 추운 날씨로 바뀌고 있으되, 추위와 더위가 번갈아가는 형식을 띠면서 전체적으로 한랭화 쪽으로 발전하고 있다.

 

황병유(黃秉維), 정도(鄭度), 그리고 조명다(趙名茶) 등이 쓴『현대자연지리학(現代自然地理學)17에서, 황병유 선생에 따르면, 발전된 현대지리학으로 볼 때 인간은 지구상의 대기권(大氣圈), 수권(水圈), 암석권(巖石圈), 그리고 생물권(生物圈)과 서로 맛물려 상호작용하며 전체를 이루고, 이 가운데서 어느 한가지 권역에 조금이라도 변화가 발생하면 나머지 모든 권역에 또한 변화가 생긴다. 그리고 기후는 자연계의 각 요소 중에서 가장 활발한 요소로서 기후에 변화가 발생하면, 특히 기후변화가 갑자기 일어났을 때, 그 영향은 더욱 크다.

 

온대에 자리한 고구려의 통치지역은 한랭•온난기단의 작용이 강력한 지역에 속한다. 기후변화가 발생할 때 온난•한랭기단은 각각 북진하고 남하함에 따라 모두 해당 지역의 강수량과 기온에 맹렬한 변화를 일으킨다. 한랭기단이 신속하게 남하하면 해당 지역의 강수량은 감소하되 가뭄과 서리 냉해가 유발된다. 온난기단이 신속하게 북상하든지 아니면 온난•한랭기단이 해당 지역에서 상당한 세력을 떨치든지 할 경우엔 언제나 해당 지역에 강수량을 집중적으로 증가시키거니와 비가 올 확률도 크게 증가하여 물난리가 일어난다.

 

이로써 알 수 있지만, 기후는 각 자연요소가 주된 팩터이고, 기후는 각종 자연재해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다. (고구려의) 각종 자연재해가 기후재해 위주였던 까닭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겠다.

 

 

3

 

자연재해는 일정지역의 자연팩터가 해당지역에서 갑작스레 일으킨 변화작용에 의해 사회•경제적 손실을 끼치는 일종의 재해유형이다. 인류의 생명과 재산에 대한 파괴와 위협은 물론이고 사회•경제적 영향 또한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겉으로 드러난 자연재해의 작용과 영향일 따름이다. 본질적으로, 인류사회에 대한 자연재해의 영향은 전면적이고 깊숙해서 정치, 경제, 사회, 사상, 그리고 문화 따위의 각 측면에 맞물려있다. 자연재해와 人文팩터가 결합되어있다면 인류사회에 대해 끼친 손실 또한 더욱 클 것이다. 고구려로 말하자면, 자연재해의 영향은 주로 아래와 같은 여러가지 방면에서 몸통을 드러냈다.

 

첫째, 파괴성이 기본특징인 자연재해와 고구려 정치 사이에는 필연적인 관계에 있다. 왕조정치의 흥망은 여러가지 팩터의 작용에 따른 결과이다. 안정한 사회질서, 합리적인 정치적 조치, 그리고 생산발전의 유효수단 따위는 모두 왕조흥망을 이루는 인문팩터가 기본 내용이다. 파괴성이 기본특징인 자연재해는 왕조흥망의 자연팩터를 구성하여 영향을 끼친다. 일반적으로, 왕조흥망에 대하여 결정적인 작용을 하는 것은 인문팩터이고, 자연팩터의 주된 작용은 인문팩터를 통해 나타나게 된다. 왕조통치가 비교적 안정한 상태라도 자연재해가 다소있으면 왕조통치 안정에 끼치는 영향은 상승한다. 자연재해가 상대적으로 적은 기간은 자연에 의한 압력이 낮으므로 왕조치정의 조치와 생산자의 노동성과는 쉽게 보장되고 정치도 보다 안정된다. 이는 특히 중국의 고대시기에 그러했는데, 자연계에 대한 이해력이 부족하고 한계가 있는 상황하에 사람들은 어떤 소박한 생각에 가치관을 두었다. , 고대 중국인은 하늘과 사람이 합쳐 하나다[天人合一]란 사상관념을 이끌어 내어서『역경/繫辭上』은 하늘이 象을 드리워 길흉을 보인다 [天垂象, 見吉凶]고 말했었다. 정작 이것은 자연계의 자연변화와 인간세상의 사회변화는 직접적으로 맞물려 일어난다고 이해한 것으로, 인간세상의 사회변화는 필연적으로 자연계의 변화를 통해 드러난다고 생각한 것이다. , “하늘[]이 인간세상의 결과를 심사해서 하늘의 뜻을 상벌[天意賞罰]로 눈에 보이게 드러낸다는 것이다. 사서에 따르면, “봉상왕 9년 봄 정월, 지진이 있었다. 2월부터 가을 7월까지 비가 오지않았다. 이 해는 굶주려 백성들이 서로를 먹었다. 8월에 왕은 나라 안의 15살 이상의 남녀를 징발하여 궁실을 수리하였는데, 백성들은 먹을 것이 모자른데다 일도 고달퍼서 뿔뿔이 달아났다. 창조리(倉助利)가 간하였다. ‘재난이 거듭 닥쳐 이 해는 곡식을 많이 거두지 못해 백성들은 살 곳을 잃어 버려, 장정들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늙은이와 어린 아이가 구덩이에서 뒹굴고 있소. 이제는 참으로 하늘을 두려워하고 백성을 생각하여, 삼가 두려워하며 되돌아보아야 할 때요. 대왕께서 일찍이 이것을 생각치 않고 굶주린 사람들을 몰아 토목 일로 못살게 구는 일은 백성들의 부모된 뜻에 몹시 어긋나오. 하물며 이웃에 힘이 굳센 적이 있는데, 우리가 어지러운 틈을 타서 쳐들어 오기라도 한다면 사직과 백성은 어찌 되겠소? 바라건대 대왕께서는 깊이 헤아리시오.’  [烽上王九年春正月, 地震. 自二月至秋七月, 不雨, 年饑, 民相食. 八月, 王發國內男女年十五已上, 修理宮室, 民乏於食, 困於役, 因之以流亡. 倉助利諫曰: 天災荐至, 年穀不登, 黎民失所, 壯者流離四方, 老幼轉乎溝壑, 此誠畏天憂民, 恐懼修省之時也. 大王曾是不思, 駈饑餓之人, 困木石之役, 甚乖爲民父母之意, 而況比隣有强梗之敵 若乘吾弊以來, 其如社稷生民何? 願大王熟計之”].18 여기서 알 수 있지만, 자연재해가 비교적 심각할 무렵에 봉상왕이 궁전을 크게 수리하자 필연적으로 백성은 달아났고, 따라서 생산에 영향을 미쳤고, 주변에 또한 강적까지 있어 정치적 불안정을 일으켰다. 직접 혹은 간접적인 영향이 통치계급에 의한  통치정책의 개혁과 개선까지 미친 것이다.

 

둘째, 고구려의 강역과 자연재해는 어떤 발맞춤과 잠재적으로 맞물려있다. 자연재해가 상대적으로 적은 기간엔 강역의 넓이가 드넓어지며, 자연재해가 빈번한 기간에는 강역의 넓이가 줄어들지만 궤멸적인 타격은 결코 입지 않는다. 고구려를 두고 말하자면, 고구려의 강역확장은 주로 광개토왕 때 집중되었다. 광개토왕 때는 바로 고구려 자연재해가 비교적 적은 시기였고, 그 경제번영과 사회안정은 능력을 외부로 확장케하여 그 강역을 최대로 달하게 만들었다. 광개토왕비문에 따르면, “무릇 614 성과 1400 촌락을 쳐부셨고 [凡所攻破, 城六十四, 村一千四百]”, 6(396) “병신날에 왕은 몸소 수군을 이끌고 잔국(殘國)을 무찔렀었다 [丙申, 王躬率水軍, 討伐殘國].”19 심각한 자연재해가 발생했을 때 그 강역은 줄어들었었다.『동국사감(東國史鑒)/고구려』에 따르면, 소수림왕 8(378), “가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려 서로를 먹었다. 가을 9, 거란이 북변을 침범하여 여덟 부락을 빼앗았다 [, 民饑相食. 秋九月, 契丹犯北邊, 陷八部落]”, 고국양왕 6(389), “봄에 기근이 들어 사람들이 서로를 먹으니 왕은 곳간을 열어 도와주었다. 가을 9월에 백제가 쳐들어와서 남녁 변두리의 부락을 약탈하고 되돌아갔다 [, , 人相食, 王發倉賑之. 秋九月, 百濟來侵, 掠南鄙部落而歸]”.

 

셋째, 자연재해는 고구려의 지역경제 발전을 균형있게 하는 작용을 하였다. 고구려 각 지역의 경제는 불균형하게 발전하여 도성지역이 비교적 발달했었지만, 자연재해 기록이 많이 보이는 도성에서는 자연재해가 발생할 때마다 도읍의 인구는 유실되었다. 게다가 인구유동은 재해지역의 재난복구 압력을 덜어주었을 것이다. 또한 비재해지역으로의 인구이동은 해당 지역의 경제발전에 아주 좋은 기회를 가져다 주었다. 사료에 따르면, 봉상왕 9(300) 봄 정월, “지진이 있었다. 2월부터 가을 7월까지 비가 오지않았다. 이 해는 굶주려 백성들이 서로를 먹었다. …… 재난이 거듭 닥쳐 이 해는 곡식을 많이 거두지 못해 백성들은 살 곳을 잃어 버려, 장정들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늙은이와 어린 아이가 구덩이에서 뒹굴고 있었다. [地震. 自二月至秋七月不雨. 年饑, 民相食……天災荐至, 年穀不登, 黎民失所, 壯者流離四方, 老幼轉乎溝壑].”20 이재민의 이동은 도성지역의 선진생산기술과 경험을 전파시켰고, 이주민은 해당지역의 경제에 새로운 생기와 활력을 주입하였다. 이로부터 일 수 있듯이 자연재해는 인구분포와 경제발전에 일정한 균형작용을 일으켰지만 이는 일종의 하향평준화 작용이었다.

 

넷째, 자연재해는 고구려의 사상문화에 영향을 끼쳤다. 재해가 동반하는 재산의 손실, 고향의 황폐화, 피붙이의 사망, 질서의 파괴 등등은 다 생명본질에 대한 의미를 담고있는 고통으로서 고구려사람의 마음 속 깊이깊이 각인되었고, 그래서 사회와 인생에 대한 각성이 허다하게 유발되었다. 고구려사람의 후한 장례는 자연재해가 만든 두려움에 대한 피드백을 사상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사료에 따르면, “남녀는 시집•장가 가자마자 곧 수의를 짓는다. 장례는 후하게 치르니, 금은재화를 다해서 장사를 치룬다. 돌무지를 쌓고, 소나무나 잣나무를 심어 늘어놓는다 [男女已嫁娶, 便稍作送終之衣, 厚葬, 金銀財幣, 盡於送死, 積石爲封, 列植松柏].”21 여기서 알 수 있지만, 고구려인은 후한 장례를 중시해서 혼인한 뒤에 곧 장례에 쓸 물건을 모았다. , “죽음을 준비하며 살아간다는 생각 [活爲死想]이다. 사료에 따르면, “고구려는 그 풍속에 먹을거리를 아끼는데 [高句麗其俗節食]22, “사람들은 모두 토착인데 산과 골짝을 끼고 살며, , 비단, 그리고 가죽으로 옷을 해입는다. 일굴 밭은 그다지 기름지지 못한데다 뽕농사도 모자라서 스스로에 대주기에도 넉넉치 못하다. 때문에 그 사람들은 먹을거리를 아낀다 [民皆士著, 隨山谷而居, 衣布帛及皮. 土田薄瘠, 蠶農不足以自供, 故其人節飮食.]23 고구려사람은 혼강/압록강 유역에서 무리지어 살았는데 큰 산과 깊은 골짝은 많되 평야는 보다 적어서 토지는 그다지 기름지지 못했고, 더군다나 자연재해마저 발생하기도 했기때문에 음식을 아끼는 관습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자연재해는 또한 고구려인이 정신적인 측면에서 해결방안을 찾도록 만들었다. 종교적 위안은 고구려사람이 일종의 공허한 해탈에 빠지지 않도록 했고, 그래서, 불교의 전입과 전파는 또한 심후한 정신적 기초로서 자리잡게 되었다. 소수림왕 2(372) 여름 6, “()진왕 부견(苻堅)이 사신과 스님 순도(順道)를 보내 불상과 경문을 보내주었다. 왕은 사신을 보내 답례했다 [秦王苻堅遣使及浮屠順道送佛像經文, 王遣使廻謝]24. 전진왕 부견이 고구려에게 스님과 경문 따위를 보내주어 불교가 고구려에서 전파되었던 것이다. 고국양왕 9(392)이 되자 “3, 가르침을 내리길, 불법을 믿어 복을 구하라고 했다 [下敎: 崇信佛法求福].”25 부처의 말씀을 숭상하여 복을 구하라고 사람들에게 권해서 불교의 지위를 올라가게 했던 것이다. 소수림왕과 고국양왕 시기야말로 고구려에서 자연재해가 비교적 심각했던 시기였다. 고구려사람은 신령을 숭배하게 되어 일종의 심리적 위안을 얻었던 것인데, 이는 고구려사람이 불가항력성을 가진 자연재해에 대하여 어쩌지못하고 순응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참고문헌

 

[1]鄧雲特:『中國救荒史』, 商務印書館1937年版.

[2][3]『三國史記』卷第13『高句麗本紀第一』.

[4]『三國史記』卷第14『高句麗本紀第二』.

[5][6][7]『三國史記』卷第14『高句麗本紀第二』.

[8][9][10][11]『三國史記』卷第15『高句麗本紀第五』.

[12][13][14][15]『三國史記』卷第16『高句麗本紀第六』.

[16]참조. 王子今:『秦漢時期氣候變遷的歷史學考察』,『歷史究』1995年第2.

[17]黃秉維、鄭度、趙名茶等:『現代自然地理學』,科學出版社1999年版.

[18]『三國史記』卷第15『高句麗本紀第五』.

[19]耿鐵華:『好太王碑新考』,吉林人民出版社1994年版, 88.

[20]『三國史記』卷第15『高句麗本紀第五』.

[21] 『三國志』卷30『高句麗傳』.

[22]『三國志』卷30『高句麗傳』.

[23]『北史』卷94『高句麗傳』.

[24]『魏書』卷100『高句麗傳』.

[25]『三國史記』卷第16『高句麗本紀第六』.

출처 : 뿌리아름역사동아리
글쓴이 : 麗輝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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