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사연재글

2007년 소년한국일보 연재 38회 - 백제를 되돌아보며

영양대왕 2007. 12. 18. 16:42
[해양 강국 백제를 찾아서] '화려한 문명' 역사 속으로 '백제 혼'은 우리 곁에 생생
견훤, 나라 이름 후백제라 정해…몽촌토성 등 곳곳에 흔적 남아
' 백제의 자만' 현대인에 교훈


백제의 대표 유적인 몽촌토성. 오늘날 시민들의 휴식처가 되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백제의 건국부터 멸망까지 살펴보았습니다.

고구려로부터 갈라져 나온 백제는 한강 유역에 정착해 농업과 해상 활동을 전개하며 빠르게 성장했습니다. 마한의 54 개국 가운데 하나로 출발했지만 결국은 마한을 물리치고 강한 나라로 성장한 것이지요.

8대 고이왕 때 제도를 정비한 백제는 13대 근초고왕 시절 남과 북으로 영토를 크게 넓히며 전성기를 맞았습니다. 고구려를 제압하고 삼국 가운데 가장 먼저 강대국이 되었고, 세련된 문화를 발전시키기도 했지만, 멸망도 제일 빨랐지요.

나라가 망한 뒤 백제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충남 연기군에서 발견돼 국보 106호로 지정된 ‘계유명전씨아미타삼존불비상’ 앞과 옆면에는 주목할 글이 적혀 있습니다. 내말, 대사, 소사 등 신라 관등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백제 성씨와 관등인 전씨ㆍ진씨, 달솔인 사람들이 모여 함께 불상을 만들었다는 내용이지요.

그런데 이 불상은 백제가 망하고 10 년이나 지난 673년에 만들어졌습니다. 백제 부흥 전쟁은 끝났지만, 여전히 과거를 잊지 못하는 사람들이 백제에서 받은 관등을 불상에 새겨놓은 것입니다. 하지만 불상의 글에서 보듯 신라인과 어울려 살면서 하나가 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결국 백제인은 신라 사람이 된 것입니다.

충남 연기군 남면 송원리에서 최근 발견된 초대형 백제 귀족 무덤

백제는 사라졌지만, 쉽게 잊혀지지 않았습니다. 백제가 멸망하고 230 년이 지난 뒤 다시 백제를 부활하자는 소리가 나왔답니다. 바로 견훤의 후백제였습니다. 견훤이 나라 이름을 백제라고 한 것은 백제 부활이 그 지역 사람들에게 가장 호소력 있었던 것이지요.

백제의 흔적은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이 열렸던 올림픽 공원은 백제 몽촌토성이 있던 곳입니다.

백제 시대 성벽을 비롯해 나무로 만든 임시 방어벽인 목책을 볼 수 있지요. 이는 물론 현대에 와서 다시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도읍이었던 공주와 부여뿐 아니라 옛 백제 땅 곳곳에도 백제인의 흔적은 남아 있답니다. 백제는 사라졌지만 연구자들에 의해 다시 부활하고 있지요.

1971년 무령왕릉 발굴, 1993년 백제금동대향로 발견, 그리고 1997년 풍납토성의 재발견 등이 그 증거입니다. 불과 한 달 전에는 신행정도시 후보지인 충남 연기군에서 백제 시대 귀족의 초대형 무덤이 발굴돼 사람들을 놀라게 했지요. 앞으로도 새로운 유물이나 기록 발견은 계속될 것으로 기대됩니다.

백제는 해양 활동을 하기에 좋은 조건을 갖고 있었던 나라입니다. 일찍부터 바다를 활동 무대로 삼아 대륙의 문물을 받아들이고, 동남 아시아와 교역도 했지요. 일본 열도에 문화를 전파한 개방적이고 활기찬 나라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백제의 개방적인 사회 분위기는 우리가 본받아야 할 점입니다.

백제에는 신라인, 고구려인을 비롯해 대륙과 일본 열도에서 온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 살았습니다. 다양한 문화를 포용할 줄 알았기에 줄곧 문화적으로 앞선 나라, 경제적으로 풍요한 나라가 되었던 것이지요.

반면 백제는 너무 자만했습니다. 개로왕은 강적 고구려를 앞두고 거대 건축물을 만들면서 국력을 낭비한 탓에 도성이 함락되고 죽임을 당하는 수모를 겪었지요. 의자왕도 신라와의 전쟁에서 크게 이긴 뒤 나라를 돌보지 않다가 결국 나라가 망하는 모습을 보아야 했습니다. 지나치게 방심한 탓에 당나라가 쳐들어올 것에 대한 대비를 전혀 하지 않았지요.

백제의 역사는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줍니다. 여러분이 백제에 많은 관심을 기울여주길 기대하며, 연재를 마치겠습니다. 즐거운 방학 보내세요. <끝>

/김용만(우리 역사 문화 연구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