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사연재글

2007년 소년한국일보 백제사연재 31회 - 무왕과 익산

영양대왕 2007. 10. 24. 19:46
해양강국 백제를 찾아서] 무왕, 왕권 강화 위해 익산을 도읍으로 적극 개발
왕궁터 등 유적 다수 발견 도읍설 뒷받침
과학적 화장실·동양 최대 미륵사 '눈길'


왕궁리 5층 탑과 발굴 현장. 5층 탑은 신라가 백제 궁성터에 절을 세운 뒤 백제 양식으로 세운 것이다.

■ 익산, 경주·부여·공주와 함께 고도로 지정

현재 경주, 공주, 부여와 함께 전라 북도 익산시가 고도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고도(古都)’란 우리 민족의 삶의 터전이자 정치ㆍ문화의 중심지로서 역사상 중요한 지위를 가진 지역을 말합니다. 2004년 ‘고도 보존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된 이후 이 4 곳이 고도로 지정돼 문화 관리와 보존에 관한 지원을 받고 있지요.

익산시가 고도로 지정된 것은 이 곳이 마한과 백제의 옛 도읍으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익산은 백제 30대 무왕인 서동이 태어나고 성장한 곳입니다. 일본에서 발견된 불교 관련 서적 ‘관세음 응험기’에는 왕위에 오른 무왕이 639년에 익산(지모밀)으로 도읍을 옮겼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백제 말기 유적들도 많이 남아 있어 무왕이 이곳으로 도읍을 옮겼을 가능성을 뒷받침해 주고 있지요. 무엇보다 왕이 거처할 만한 왕궁터가 있습니다. 바로 익산시 왕궁면 왕궁리 오층 석탑이 있는 주변입니다. 조사 결과 궁성의 형태는 둘레 1460 m 정도의 직사각형으로, 화강암 벽 위에 기와를 이은 형태의 계획적인 궁성임이 밝혀졌습니다.

유적지 안에는 통일 신라 시대에 만들어진 사찰 유적이 발견돼 궁성이 아닐 것이라는 전문가들의 의견도 있었답니다. 하지만 국립 부여 문화재 연구소에서 1989년부터 18 차례에 걸쳐 전체 14만 ㎡의 3분의 2 가량을 발굴한 결과 백제 시대의 대형 건물지가 다수 발견되었지요.

익산 미륵사탑 복원 모습.

이 곳에서 발굴된 기와에는 최고의 관청을 의미하는 수부, 백제 도읍의 행정 지역을 나타내는 5 부의 명칭이 새겨진 것도 나왔습니다. 이 기와들은 익산이 백제의 또 다른 도읍이었을 가능성을 나타내 줍니다.

유적지 안에서는 유리 제품 제작용 도가니와 바람을 넣어주는 송풍관, 다양한 금ㆍ은ㆍ유리 제품이 발견되어 이곳에 대규모 생산 시설이 존재했음을 보여 줍니다.

이 밖에 오늘날의 정화조와 같은 과학적인 구조의 대형 화장실 3 기와 뒤처리용 나무 막대도 발견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화장지가 없던 시절 백제인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지요.

■ 선화공주, 연못 메워 절 세워

익산에는 왕궁리 유적 외에도 동양에서 가장 큰 사찰로 알려진 미륵사가 있답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무왕은 선화 공주와 함께 용화산 사자사에 가다가 산 아래 큰 연못에서 미륵 삼존 부처님이 나타난 것을 보자 수레를 멈추고 예를 올렸습니다.

선화 공주는 이 연못을 메워 큰 절을 세울 것을 원했고, 무왕이 이를 허락해 미륵사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 때 신라의 진평왕도 기술자들을 보내 절을 만드는 것을 도왔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왕궁리 측간 모형도.

미륵사는 현재 서탑과 주춧돌, 깃발을 세웠던 당간을 지탱해 주는 당간지주, 대형 목탑의 터와 복원한 동탑이 남아있습니다. 서탑은 많이 붕괴되어 다시 해체하고 복원할 준비를 하고 있지요.

익산에는 미륵사 외에도 제석사ㆍ사자사ㆍ오금사 등 백제 시대의 절과 금동관, 금동 신발이 발견된 입점리 1호분을 비롯한 많은 무덤들이 있습니다. 아울러 미륵산성을 비롯해 낭산산성, 오금산성 등 백제 시대에 만든 도성 방어 유적이 발견된 바 있지요.

익산은 무왕이 도읍을 옮기기 위해 개발한 도시였습니다. 다만 무왕이 이 곳으로 도읍을 실제로 옮겼는지, 또 몇 년간이나 백제의 도읍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백제가 멸망할 당시 수도는 여전히 사비 즉 부여였던 만큼, 익산이 백제의 중심지였던 시기는 그리 길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무왕이 왕권을 강화하고 백제를 보다 발전시키기 위해, 익산으로 도읍을 옮길 계획을 세우고 이를 실천하고자 많은 노력을 하였음은 분명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