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사연재글

2006년 소년한국일보 신라사연재 24회 - 원효

영양대왕 2007. 7. 8. 21:33
[신라 1000년의 비밀] 귀족들만의 신앙에서 백성의 '불교'로 발전


●원효대사, 불교 대중화에 앞장

532년 법흥왕이 불교를 공식 종교로 인정한 뒤 신라 불교는 크게 번창했습니다. 삼국유사에도 '절과 절이 별처럼 벌여져 있고, 탑과 탑이 기러기가 나는 것처럼 늘어섰다.'고 기록될 만큼 경주의 유명 사찰은 100 곳이 넘었습니다. 또한 6세기 이후 신라 유적ㆍ유물 중에는 불교와 관련된 것이 무척 많습니다.

그런데 당시 화려한 사찰과 금 불상ㆍ돌을 다듬어 만든 석탑 등은 모두 재물이 넉넉한 왕실과 귀족들이 시주해서 만든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신자들도 대개 왕과 귀족이었습니다. 특히 화엄경ㆍ법화경ㆍ금강경 등 많은 경전을 제대로 공부하려면 우선 글을 알아야만 했습니다.

따라서 일반 백성들이 불교를 배우기란 처음부터 쉽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스님이 된다는 건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스님은 당시에는 무척 높은 신분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불국사. 불교의 나라 신라의 가장 아름다운 사찰이다.

불교는 이처럼 일반 백성들에게는 가까이하기에 너무 먼 종교였습니다.

그런데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무렵 등장한 원효대사(617년∼686년)가 불교를 백성들도 알기 쉽도록 전파합니다. 원효는 29 세에 출가해 황룡사 등에서 불교를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650년에는 의상대사와 함께 유학길에 올랐다가 고구려 순찰대에 붙잡히기도 했습니다. 그는 이후에도 포기하지 않고 661년 의상대사와 다시 유학길에 오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비를 만나 토굴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습니다.

잠을 자다 갈증이 나 일어난 원효는 토굴 속의 물을 마시게 되었는데, 그 물맛이 너무나도 달고 시원했습니다. 그런데 아침에 깨어나 보니 그 곳은 토굴이 아닌 무덤이었고, 물이 담긴 그릇은 바로 해골바가지였습니다.

해골에 담긴 썩은 물을 먹었다는 사실을 안 원효는 구역질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그는 크게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마음이 생기면 만물의 갖가지 현상이 생기고, 마음이 없으면 무덤과 해골물도 둘이 아님을 알겠구나.' 모든 게 마음 먹기에 달렸음을 깨달은 원효는 의상대사를 당나라로 떠나 보내고 자신은 발길을 돌려 신라로 돌아왔습니다. 불교란 반드시 경전을 통해 익혀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후 그는 오랜 기간 분황사에서 홀로 불교 교리를 연구하면서 계율과 격식에 얽매이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의상대사 등 숱한 고승 등장

원효대사 영정. 귀족 불교를 대중화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어느 날 원효는 거리에서 "누가 자루 빠진 도끼를 허락하겠는가? 내가 하늘을 받칠 기둥을 깎으련다."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이를 전해 들은 왕은 원효대사가 귀부인을 얻어 현명한 자를 낳고 싶어한다고 여기고, 요석궁에 홀로된 공주와 만나게 해 주었습니다.

이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사람이 바로 '설총'입니다.

이렇게 계율을 어긴 원효는 스님의 직위를 잃게 됩니다. 이후 그는 광대들과 전국 곳곳을 다니며 어려운 교리를 풀어 놓은 '무애가'를 지어 부르면서 백성들을 가르칩니다. 이러한 그의 노력으로 가난한 사람과 어린이까지도 모두 부처님의 이름을 알고 염불을 할 수 있게 됐습니다.

그러나 그는 결코 불교를 쉽게 가르치는 데에만 그치지 않았습니다. 당시 신라에 들어온 불교의 여러 교리들을 정리하는 작업에도 힘을 기울였습니다. 또 '대승기신론소'ㆍ'십문화쟁론' 등 여러 불교 서적도 펴냈습니다.

신라가 오늘날 '불교의 나라'로 불리고 있는 것은 이처럼 원효대사의 공이 컸습니다. 이와 함께 화엄종을 크게 발전시킨 의상대사를 비롯해, 법상종을 연 진표, 계율종의 자장 등 숱한 고승들이 등장했습니다.

그 결과 신라는 귀족은 물론 일반 백성들도 불교를 열심히 믿게 됐습니다.

/김용만(우리역사문화연구소장)


입력시간 : 2006-08-29 13: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