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사연재글

2006년 소년한국일보 신라사연재글 37회 - 신라의 과학기술

영양대왕 2007. 7. 8. 21:27
1300년 전 신라인, 우주를 꿈꾸다


■눈부시게 발달했던 과학 문물

신라에는 과학 기술을 담당하는 관청이 많았습니다. 신라가 발전과 번영을 누릴 수 있었던 이유 가운데 하나는 과학 기술을 발전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입니다.

신라의 왕궁에서 가까운 곳에는 천문대인 첨성대가 있습니다. 과학자들이 밤마다 별자리를 관측하고, 시간과 계절의 변화를 알아 내어 농사를 비롯해 생활에 필요한 여러 지식들을 연구하던 곳입니다.

●첨성대 별자리 관측…농사에 이용

왕과 귀족의 유흥을 의해 사용된 포석정.

무열왕은 655년 10월, 경주의 월성 안에 누각을 세운 바 있습니다. 이것은 북을 쳐서 시간을 알리는 시설로, 당시 시간을 담당하는 관리가 있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신라는 718년 누각전이라는 관청을 만들어 누각 박사 6 명을 두었습니다. 이 관청은 물시계, 해시계 등을 관리하며 시간과 천문학을 연구하는 곳이었습니다. 대표적인 사천대 박사(천문을 공부하는 박사)로 김유신의 후손인 김암이 있습니다.

신라는 682년 국립대학인 태학을 세워 귀족의 자제들에게 역사와 유교 경전,과학 등을 가르쳤습니다. 또 수학인 산학을 가르치기 위해 산학 박사와 조교등을 두었고, 교과서로 ‘구장산술’ 등이 있었습니다.

수학은 정교한 건축물을 만드는 데 폭넓게 활용되었습니다. 석굴암의 경우 건축을 할 때 기본 단위를 정하고, 사각형과 대각선, 원과 원주율 등 다양한 도형에 대한 정확한 지식이 동원되어 만들어졌습니다. 수학은 대칭과 조화가 필요한 종교적 건축물을 만들어야 하는 상황에서 발달된 것입니다.

●수학, 의학 발달 국민 복지 증진

신라인의 절교한 기술을 볼 수 있는 월정교 다리기둥 받침돌.

수학은 이 밖에 논과 밭의 넓이를 계산하여 세금을 거둘 기준을 정하는 등 나라를 다스리는 일에도 쓰였습니다.

신라 시대에도 돌림병을 비롯한 다양한 병을 치료하기 위한 의사가 필요했습니다. 신라는 ‘의학’이라는 국립 의과 대학을 세우고, 이곳에 의학 박사를 두어 외국의 의학 이론을 가르치거나 ‘신라법사방’ㆍ‘신라법사비밀방’이라는 의학책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또 약방의 일종인 ‘약전’이라는 정부 기관을 두어 백성들의 치료를 담당하기도 했습니다.

신라의 대표적인 과학 산물로는 다라니경이 있습니다. 다라니경은 706년 무렵에 만들어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본입니다. 신라에 불교가 널리 퍼지면서 불경을 읽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기 때문에 이를 보급하기 위해 인쇄 문화가 발전된 것입니다.

●종이 품질 뛰어나 당나라로 수출

신라의 천문학 수준을 나타내 주는 첨성대

신라의 종이는 주로 닥나무 껍질을 벗겨서 맷돌에 갈아 만들었는데, 특히 ‘백추지’라 불리는 신라의 종이는 품질이 뛰어나 당나라로 많이 수출되었습니다.

불교가 발전함에 따라 종 만드는 기술도 발전하였습니다. 가장 뛰어난 종으로는 에밀레종으로도 불리는 성덕 대왕 신종이 있습니다. 12만 근의 구리로 만든 이 종은 무게가 약 20 t이나 되는 큰 종입니다.

신라의 관청 가운데는 특히 조하방, 염궁, 홍전 등 옷감과 관련된 기관이 많았습니다. 이는 신라가 일찍부터 뽕나무 기르기와 삼베 짜기 등 의류 산업에 관심을 많이 기울여 다양한 옷감과 색상을 가진 옷을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어아금, 조하금(미리 실을 염색해 짜낸 직물) 등 다양한 견직물을 외국에 수출이 하기도 했습니다.

●안압지 등 물 관리 정책도 탁월

신라는 물을 관리하는 방법 또한 뛰어났습니다. 경주 안압지의 물은 수로를 통해 연못으로 폭포처럼 떨어지게 하여 물의 높이를 조절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이 밖에 반월성 주변 남천에는 일정교, 월정교와 같이 정교한 돌다리가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신라는 임금이 백성을 다스리기 위해 또 종교적인 건축물, 농업과 상업, 귀족들의 놀이 등에 활용하기 위해 과학 기술을 발전시켰던 것입니다.

<김용만 우리역사문화연구소장>


입력시간 : 2006-11-26 15: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