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백제 건국한 견훤 36년만에 고려에 항복
견훤이 쌓았다고 전해지는 경북 상주시의 견훤산성. |
그는 상주를 떠나 신라의 수도인 금성에 와서 군인이 되었습니다. 용맹한 견훤은 서남해 지역을 방어하는 장수로 임명되었는데, 이 때부터 해적들을 물리치면서 유명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전투 경험이 많은 군사들을 가진 견훤은 각 지역에서 힘을 키운 호족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큰 힘을 갖게 되었습니다.
●지방에 관리 파견 호족 감시…통치력 강화
견훤은 5000 명의 군사를 이끌고 옛 백제 지역인 광주 일대를 장악한 뒤, 신라로부터 독립을 선언했습니다. 하지만 이 당시 신라는 견훤을 공격할 능력마저 없었습니다. 견훤은 광주ㆍ전주 지역이 옛 백제의 땅인 만큼, 이 지역의 호족들과 백성들의 지지를 받기 위해 백제를 부활시키겠다고 했습니다. 견훤은 900년에 전주 지역을 점령하고 이 곳을 도읍으로 정한 뒤 후백제를 건국했습니다.
후백제 지역은 평야가 많고 농업과 해상 무역이 발달한 곳입니다. 견훤은 군사들이 농사를 짓는 땅인 ‘둔전’을 두고, 저수지를 만드는 등 적극적으로 부자 나라를 만들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후백제를 건국한 견훤의 무덤인 견훤왕릉. |
견훤은 외교의 중요성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다 건너의 여러 나라와도 폭넓은 외교 관계를 맺었습니다. 견훤은 6두품 출신인 최승우를 비롯한 훌륭한 인재를 얻어 나라의 관리로 삼는 일에도 열심이었습니다. 나라가 안정되자 견훤은 영토를 확장하기 시작했습니다. 920년에는 1만 기병으로 신라 남부 지역을 얻었고, 이어 925년 조물성과 거창 등 20여 성을 빼앗는 등 소백 산맥을 넘어 영토를 많이 넓혔습니다.
견훤은 927년에 신라의 수도로 쳐들어가서 경애왕을 죽이고 경순왕을 신라의 왕위에 앉혀 버렸습니다. 그러자 신라는 고려의 왕건에게 구원을 요청했습니다. 고려군은 대구 주변인 공산(팔공산)에서 후백제와 전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전투에서 후백제군은 고려군을 크게 물리쳤고, 929년까지 이어진 고려군과의 전투에서 거듭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신라 공격해 민심 읽고 후계자 계승 실패
금산사. 견훤은 아들 신검에게 쫓겨나 이 곳에 감금되었다가 고려로 탈출한다. |
게다가 견훤은 후계자 문제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큰아들인 신검 대신 네 번째 아들인 금강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신검이 이를 알아채고 신하들의 도움을 받아 아버지 견훤을 금산사에 강제로 머물게 하고 왕위를 차지해 버렸습니다. 화가 난 견훤은 몰래 금산사를 탈출하여 적국인 고려에 항복해 버렸습니다.
후백제는 또 930년 고려와 치러진 고창(현재의 안동)전투 이후 계속 패배를 했습니다. 935년에는 신라가 고려에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견훤마저 고려에 항복했으니, 후백제의 운명은 결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마침내 후백제는 936년 고려의 공격을 받아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김용만 우리역사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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