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생각

고-당 전쟁의 변수 '설연타'에 대하여

영양대왕 2006. 7. 10. 14:56

연개소문 드라마 홈페이지 자문위원 컬럼에 4번째로 올리는 글입니다.

 

 

  연개소문 드라마 1회와 2회가 방송되었습니다. 필자 역시 방송을 주의 깊게 보았습니다.  아쉬운 점도 있었지만, 전체적으로는 괜찮은 드라마였다고 생각합니다. 역사적 사실과 다르게 묘사된 부분을 보니 이환경 작가가 향후 드라마 전개를 염두에 두고서, 그렇게 만들었다고 생각되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연개소문과 이세민이 안시성에서 굳이 만나도록 한 장면이 그것이겠지요.

  드라마 전개상에서 잘못도 물론 많았습니다. 예를 들어 고구려 군이 안시성에서 굶주리기 보다는, 당나라군의 식량사정이 더 나빴다고 보아야 합니다. 식량사정이 악화된 것은 당군 철수의 가장 중요한 계기였지요. 하지만 당태종과 연개소문이 만나야 하니 어쩔 수 없이 식량사정보다는 설연타의 하주 침공을 원인으로 제시한 것이라고 보입니다.

  그보다 더 문제는 왜 당나라 군대가 안시성에 발이 묶였는지, 왜 안시성을 피해서 다른 곳으로 가지 못했는지에 대해서 작가가 제대로 고민을 하지 않은 것 같아서 아쉬움으로 큽니다. 이런 문제를 고민했다면, 배우들의 대사부터 많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역사적 사실과 다른 점에 대해 문제점을 말하라고 한다면, 여러 가지를 지적할 수 잇겠지만, 이미 만들어진 드라마를 고칠 수 있는 것이 아닌 이상, 더 이상 언급은 하지 않겠습니다.

 

  대신 시청자들이 궁금해 할 수 있는 부분에 대해서 조금 해설을 하고자 합니다.

  연개소문이 설연타를 언급했습니다. 설연타. 설연타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부족이라서, 많은 이들이 궁금해 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대체 이들은 누구이고, 이들이 왜 등장하는지를 설명하겠습니다.

  조금 더 구체적인 것은 [새로쓰는 연개소문전] 203∼212쪽 등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설연타는 투르크족인 철륵의 한 부족으로 흉노의 별부였다거나, 정령 부족의 후예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들은 생활풍습이 돌궐과 유사한 전형적인 유목민들입니다. 돌궐, 당에게 신하 노릇도 했던 설연타는 628년 설연타의 수령인 이남(夷南)이 철륵의 여러 부족들의 추대를 받아 가한(可汗)이 되면서 세력을 크게 키우게 됩니다. 당은 그를 진주비가가한이라 부르며 자신들의 적인 동돌궐을 멸망시키는데 협조할 동반자로 삼았습니다. 630년 몽골초원을 지배하던 동돌궐을 당나라와 합세하여 멸망시키고, 설연타는 유목세계의 지배자가 됩니다. 이들은 한때 20만 대군을 가졌고, 동돌궐이 지배하던 영토도 가졌습니다.

  하지만 설연타는 한때 적이었던 돌궐인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이들을 추방했습니다. 게다가 설연타는 자기 부족만의 독재로 인해 다른 철륵 부족들로부터 점차 신망을 잃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설연타가 지닌 큰 약점으로, 유목국가들 가운데 상대적으로 단명한 원인이었다.

  당은 반대로 설연타에서 쫓겨난 동돌궐인 수십만을 받아들이고, 이들로 하여금 설연타에 반기를 들도록 은밀한 지원도 아끼지 않았습니다. 특히 당나라가 641년 설연타의 서역 진출 차단 및 견제의 목적으로 동돌궐의 잔여 무리 10만을 설연타와 가까운 초원지대로 강제 이주시켜, 설연타를 격분시켰습니다. 설연타는 동돌궐 무리들을 격파한데 이어 20만 명으로 당을 공격하기에 이르러 양국간에 전쟁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설연타와 고구려는 사이에는 서로 무력 침공을 한 기록은 찾을 수가 없습니다. 도리어 고구려에서 볼 때 설연타가 당과 대항할 동맹을 맺을 수 있는 좋은 상대였습니다. 당과 적대적 입장에 서게 된 설연타와 연합하여 당에 대항한다면 고구려로서는 보다 수월하게 당과 전쟁을 치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607년 영양왕이 사신을 동돌궐에 보내 수나라에 대항하는 연합전선 구축을 시도했듯이, 연개소문도 설연타에 이와 같은 연합을 제안합니다.


『자치통감』 645년 기록입니다.

  ꡒ이세민이 고구려를 정벌하려고 하자, 설연타가 사신을 보내 공물을 주었다. 이세민이 말하기를 너희 가한에게 말하라. 지금 우리 부자가 동쪽으로 고구려를 정벌하러가니 너희들은 능히 노략질을 하겠구나. 그래 빨리 오너라. 노략질 하러. 이 소식을 들은 진주가한이 몹시 놀라고 두려워서 사신을 보내 사죄하고, 또 군대를 보내 당나라 군대를 돕기를 청했으나, 이세민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세민의 군대가 주필산 전투에서 고구려를 패배시키자, 연개소문이 말갈을 시켜 진주가한을 설득시키면서 후한 보물로 달래었다. 진주가한은 당이 두렵고 복종하는 마음이 있어서 감히 결정을 하지 못했다. 9월 임신(7일)일에 진주가한이 죽었다.ꡓ


  설연타는 당의 눈치를 보면서 한동안 고구려를 제대로 돕지 못했습니다. 당나라는 당이 고구려를 공격할 때 설연타가 당나라를 공격할 수도 있음을 두려워하여 미리 설연타에 대해 경고하고 침략하지 못하게 조치를 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연개소문은 결국 설연타의 진주가한을 설득합니다. 그런데 고구려가 연개소문을 설득한 시점은 명확하지 않습니다.

  설연타는 고-당 전쟁의 추이를 보아가며 어찌 행동할 것인가를 고민했겠지요. 진주가한이 죽을 때까지 설연타는 고구려의 제의에 상응하는 구체적인 조치를 취하지는 못했습니다. 잠시 왕위를 두고 적자인 발작과 장자이지만 서자였던 예망 사이에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결국 발작이 예망을 죽이고 왕위를 계승하여 다미가한이 되었습니다. 다미가한은 곧 당은 하주(황하 중류의 오르도스 지방)를 공격하였습니다.

  『자치통감』에는 645년 12월조에 설연타가 당을 공격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12월에 설연타가 당을 공격한 것이라면 고구려와 아무런 관련이 없게 됩니다. 그렇지만 12월은 당군이 설연타를 물리친 시점에 불과합니다. 설연타의 공격은 이세민이 고구려를 공격하고 아직 돌아오지 않았을 때에 시작되었다. 다른 기록들에는 이세민이 요동을 공격한 후 설연타가 수만의 기병으로 공격했다거나, 이세민이 아직 요동이 있을 때 공격했다가 당의 전인회와 집실사력의 활약에 의해 실패로 돌아갔다고도 합니다.

  설연타의 하주 공격은 늦어도 이세민이 10월 21일에 임유관을 통과하여 만리장성 안으로 들어오기 전에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겠고, 아직 당군이 요동에 있었을 때에 공격했다는 기록에 주목한다면 9월 18일 퇴각 이전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설연타는 9월 7일 진주가한이 죽자마자, 내분이 일어났다가, 곧장 수습을 하고 당을 칠 전쟁을 준비한 것이 됩니다. 즉 드라마에서 이세민이 안시성에서 설연타의 하주 침략 소식을 듣고 철군을 했다는 표현은 조금 무리는 있지만, 그럴 개인성이 충분합니다.


  주목할 것은 설연타를 막아낸 당나라 장군 집실사력이 고구려 원정군에 속한 요동도행군총관 이었다는 점입니다. 그는 설연타와 원한이 많은 돌궐 출신입니다. 그는 설연타를 막기 위해 하주로 돌아간 것으로 볼 수 있는데, 문제는 시간입니다. 집실사력이 후방부대를 지휘했다고 하더라도 요서에 위치했을 것이고, 여기서 하주로 이동하는 시간은 적어도 1달 이상은 됩니다. 그렇다면 이세민이 집실사력의 부대를 이동시킨 것은 고구려가 설연타와 동맹을 추진한다는 보고를 받은 시점, 즉 주필산에서 고구려군과 대치 중이던 8월 경일 가능성이 크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설연타의 하주 공격은 9월 이전부터 계획되었던 것 즉, 진주가한이 살아있을 때부터 준비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즉 설연타의 침략이 거의 확실했기 때문에 당군은 서둘러 고구려 원정군의 일부를 빼내어 하주로 돌려보낸 것이 됩니다. 설연타의 하주 공격은 당의 군대를 분산시켰으므로, 고구려에게 유리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띠라서 필자는 연개소문이 주필산 전투 이후가 아니라, 645년 1차 고-당 전쟁이 시작될 때부터 설연타와 동맹을 추진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설연타 역시 이세민과 당의 주력군이 아직 만리장성 안으로 들어오지 않은 상태에서 당을 공격한 것이 매우 그들에게도 유리했을 것입니다. 때문에 성질 급한 다미가한이 아직 내부 상황이 정리도 안 된 상태에서 급하게 당을 공격했던 것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이세민은 당의 주력군이 요동에 있었기 때문에 태자 이치(후에 고종)에게 후방을 맡겼습니다. 그런데 전인회의 부대와 함께 집실사력을 동원한 것은 요동에 나간 군대를 징발하지 않고서는 설연타의 공세를 막기가 쉽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드라마에서는 이세민이 설연타의 공격에 대해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으로 나왔지만, 실제로는 고구려보다 당나라에서 먼저 알았다고 봐야겠지요.)


  [신당서] 에는 이세민의 군대가 아직 요동에 있을 때에 설연타 군대가 당을 공격하자, 이세민은 이도종을 삭주에, 설만철과 아사나사이를 승주에, 살고오인을 령주에 각각 주둔시키고, 집실사력과 돌궐군 변경에 주둔하게 하여 설연타로 하여금 방비가 철저하다는 것을 알게 하여 퇴각하게 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주목할 것은 고구려 원정에 나섰던 주요 장군들이 즉시 설연타 방어에 나섰다는 점입니다. 이도종의 경우는 요택을 건너 돌아올 때 후방을 맡았던 자이므로, 그는 10월 11일 영주로 돌아오자 곧장 삭주로 이동해갔을 것으로 보입니다.

  설연타의 공격이 당에게 두려운 것은 그들이 공격하는 하주가 곧 황하 중류지역으로 여기를 통과하면 곧장 낙양이나 장안을 공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당군은 재빨리 주력군을 이쪽으로 이동시켜서 당의 심장부를 지켜야 했습니다. 이렇게 당군이 분산될 때 고구려군이 보다 쉽게 만리장성을 넘지 못한 당군을 물리치는 것은 더 쉬웠을 것입니다.

  즉 설연타는 고구려의 우방의 역할을 했던 유목제국입니다. 드라마에서 표현된 것처럼 고-당 양국간의 전쟁 추이를 보면서 누가 더 유리한가를 따지던 나라입니다. 설연타가 움직인 것은 결국 고구려가 당군을 물리치는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또 설연타의 입장에서는 고구려가 당군을 잘 물리치고 있었다고 확신했기 때문에, 약화된 당나라의 배후를 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설연타는 646년 당나라의 공격을 받고 멸망합니다. 당은 646년에는 고구려를 공격하지 않고, 설연타 공격에 집중했습니다. 설연타가 멸망한 것은 물론 당군의 공격이 주 원인이지만, 설연타의 수장인 다미가한의 성격이 편벽되고 급해서 아버지 때의 여러 귀족들을 죽이고, 족당정치를 펼쳐 철륵의 여러 부족들로부터 신임을 잃었다는 점도 중요하게 작용했습니다. 설연타를 멸망시킬 때 회흘부, 복골부, 동라부 같은 철륵족의 여러 부족들은 도리어 설연타를 공격하여 당을 도왔습니다. 철륵의 여러 부족들장들은 당으로부터 벼슬을 받았고, 그 땅은 명목상 당의 속주가 되고 맙니다. 당은 연연도호부와 한해 등 6개도독부 9개주를 설치하여 유목세계의 지배자로 자리 잡게 됩니다.

  당은 이로써 고구려를 제외한 주변의 여러 나라들을 다 복속시켰습니다. 그래서 다시 647년과 648년 다시 고구려를 공격해왔고, 649년 대규모 공격을 감행하려고 준비하다가 이세민이 죽는 바람에 그 전쟁은 661년으로 미루어집니다.

  설연타의 멸망은 고구려에게는 너무도 큰 손실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고구려와 당과의 전쟁은 단지 양국간의 전쟁, 또는 신라와 백제가 관련된 전쟁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는 그 보다 더 커다란 국제정세와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고-당 전쟁은 양국간의 전쟁이 아닌 국제 대전이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