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생각

고구려는 왜 신라와 달리 당나라와 전쟁을 했을까?

영양대왕 2006. 7. 9. 18:05

드라마 연개소문 홈페이지 자문위원방에 올린 3번째 글.

 

 

고구려는 왜 신라와 달리 당나라와 전쟁을 했을까?


  상당수의 사람들이 고구려가 수, 당과 싸운 것이 현격한 국력차이를 무시하고, 무모하게 전쟁을 하였기에 패망을 하게 된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을 보았다. 실제로 고구려 연구자들 가운데 이런 생각을 갖고 글을 쓴 분들도 있다. 신라처럼 능동적으로 당나라에게 유화정책을 펼쳤더라면, 고구려가 멸망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판단하는 경우를 보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판단에는 문제가 많다. 결과론적으로 고구려가 멸망했으니까, 신라가 더 현명한 것이 아니냐고 생각하는 것은 언뜻 보기에는 옳다. 그러나 7세기 당시 고구려인의 입장에서, 또 신라의 입장에서 생각해본다면, 이러한 판단을 틀렸다고 볼 수밖에 없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라고 묻는다면,

  고구려와 신라와 국제정치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틀리기 때문이라고 답을 하겠다.

  강대국과 약소국이 흔히 제 3의 강대국으로부터 위협에 직면하였을 경우, 약소국은 그 제 3의 강대국과 동맹을 맺으려 하거나, 유화적 태도를 보이거나, 중립적 입장을 취하거나, 무관심을 표명하거나, 혹은 자신의 무력함을 인식시킴으로써 그 위협적인 상황에서 벗어나려는 경향이 있는 반면, 강대국은 같은 상황에 놓여 있다 할지라도 약소국의 경우와는 달리 자신의 무력함을 보일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무관심한 태도를 보일 수도 없다. 오히려 그 위협적인 제 3의 강대국에 대한 자신의 열세를 만회함으로써 적의 공격을 억제하려는 경향이 있다.#1 (박용옥, 「강대국정치 속에서의 약소국정치-약소국의 적응형태를 중심으로」, 『국제정치학논총』17집, 1977년. 참조)


  7세기 신라는 약소국이었기에 당나라에게 밀착하여 고구려와 백제를 견제해달라고 요청한다고 해도, 자국의 위상에 변화가 없다. 또한 그것은 자위수단으로 충분히 고려할 수 있는 방식이다.

  하지만 고구려는 그럴 수가 없다. 그것은 고구려는 당나라에 위협적인 기존의 강대국이었기 때문이다. 고구려는 5∼6세기 동아시아 4대 강국으로 국제질서를 주도하던 나라의 하나였다. 또한 수나라를 물리쳤던 경험을 갖고 있던 나라였다.

  때문에 당나라에게 고구려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강대한 나라였다. 당태종 스스로도 말했듯이 오직 자신이 굴복시키지 못한 나라가 고구려 하나뿐이었기에 더 더욱 굴복시키고 싶은 나라였다. 당시 왜국이나 동남아의 여러 나라들, 그리고 백제와 신라까지도 당나라에게는 애써 전쟁을 일으키며 굴복시키고 싶은 나라에 포함되지도 않았다. 중원의 통일세력은 언제나 주변의 나라들 가운데 여러 세력을 거느린 통합된 세력을 우선 공격 목표로 삼아 그들을 제압함으로써 천하의 지배자의 자리를 꿈꾸게 된다. 천하의 패권을 쥐려면 강자 몇몇만 굴복시키면 되는 것이지, 어느 세월에 작은 나라까지 다 정복하겠는가.

  고구려는 휘하에 여러 부족과 나라들을 거느린 나라였다. 실위, 물길(말갈), 거란 등 고구려가 장악하고 있는 부족들에게 고구려가 당나라에 싸워보지도 않고 굴복하는 모습을 보일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온건주의자로 알려진 영류왕도 고구려가 갖고 있는 질서체계를 지키기 위해서 장성 축조를 명령했던 것이다.

  고구려는 당나라에게 완전히 무력함을 보여주어 당에게 위협의 대상이 아님을 인식시킨다고 해도, 결국에는 공격을 받을 수밖에 없는 나라였다. 어차피 당에게 고구려는 수나라를 물리친 전력이 있는 잠재적 위협국이기 때문이다. 642년 9월 연개소문의 혁명보다 훨씬 전인 641년 8월에 이미 당나라 이세민은 고구려 침략 의지가 있음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기존의 강대국인 고구려는 적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열세인 조건을 만회하기 위한 조치들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최선이었다. 598년 신흥 강대국 수나라의 등장에 대해 고구려 영양왕이 요서지역을 선제공격한 목적은 양국간의 충돌을 미리 예상하고, 적에게 열세인 조건을 만회하기 위한 적의 전진기지를 파괴하기 위함이었다. 마찬가지로 고구려도 천리장성의 축조도 양국의 충돌에 대비하여 열세인 조건을 만회하기 위한 대책이었고, 644년 연개소문이 당나라 유성을 선제공격하기 위한 조치를 취한 것도 마찬가지였다.


국제정치는 각국의 이익추구의 경연장이다. 국가간에는 결코 평등하지 않은 힘의 차이가 있으며, 약육강식이란 불평등의 질서는 계속되어 왔다. 강대국들은 자신들이 이익을 정의하고 이 이익을 반영하는 국제체제의 존속을 추구한 반면, 약소국은 이러한 체제 속에서도 생존을 추구해야 한다.

  약소국은 강대국의 틈바구니 속에서 체제유지와 생존, 경제적 번영을 목표로 정책을 시행하게 되며, 강대국의 동향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강대국이라도 상황에 따라서는 약소국보다 더 선택의 폭이 좁은 경우도 있는 것이다.

  신라는 7세기 자신이 처한 상황을 충분히 이해하고, 적을 잘 이용하여 자국의 안정과 번영을 확보했다. 그것은 충분히 높은 평가를 받아야 한다. 그러나 고구려는 당나라를 물리치는 것으로써 자국의 안정과 번영을 추구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고구려는 그 길을 제대로 걷고 있었다. 다만 마지막 결과가 내부 분열과 배신으로 인한 멸망이었을 뿐이다. 결과가 최악이었다고 해서, 그것이 신라와 다른 길을 걸었다는 때문이라고 비난을 받아야 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고구려가 신라처럼 행동하지 못한 것에 대한 비판은 무엇보다 국제정치학의 기본 개념만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절대하지 않을 어리석은 선입견에 불과하다. 고구려는 당나라가 고구려에 대한 적개심을 갖고 있는 한, 싸울 수밖에 없었고, 싸워야 했으며, 싸워서 이겨야 생존이 보장되었다. 고구려는 그 길을 충실히 걸었던 것이다.

  고구려는 신라는 물론 오늘날 남한이나 북한과도 전혀 다른 조건을 갖고 있었다.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고구려와 신라, 심지어 고구려와 북한을 동일한 조건에서 비판하는 어떤 이의 글을 보고서 씁쓸한 생각에서 글을 적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