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생각

재조명이 필요한 2차 고-당 전쟁 (1)

영양대왕 2006. 7. 6. 00:09

SBS 연개소문 홈페이지에 두번째 글을 올렸습니다.

그 글을 여기에 올립니다.

 

 

재조명이 필요한 2차 고-당 전쟁 (1)


고-당 전쟁은 고-수 전쟁과 더불어 한국사 최대의 전쟁이었다. 따라서 많은 이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어왔다. 그렇지만 아직까지 고-당 전쟁의 전체 상황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이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2차 고-당 전쟁의 진행과정과 의의”라고 할 수 있다.

필자는 이 문제에 대해  2004년 [민족문화] 27집에 논문을 게재한 바 있다. 그 논문은 검색하여 다운을 받아 읽어볼 수도 있다.

이번 글에서는 2차 고-당 전쟁이 왜 재조명이 필요한지를 언급해보고자 한다.


먼저 고-당 전쟁의 상황을 우선 표로 읽어보기로 하자.

년도

전쟁 지역

당군의 규모와 주요 지휘자

전쟁 상황

644

영주

영주도독 장검

당나라 전진기지를 고구려군이 선제 공격, 당군의 반격

645

요동 일대

당태종 친정군,요동도행군, 평양도행군 등 수십만

신성, 요동성, 백암성, 건안성, 비사성 등 요동 일대에서 전개. 당군의 참패

647

석성, 적리성, 남소성

청구도행군 1만

요동도행군 3천+영주부병

당군이 요동반도 남단 기습,남소성 일대의 방어망 교란. 고구려군의 반격 받고 퇴각

648

압록강, 박작성, 역산, 오호도

청구도행군 3만

당군의 압록강 하구 기습. 오골성, 안지성 등에서 군대를 동원해 방어

655

귀단수, 신성

영주도독 정명진과 소정방

귀단수에서 전투, 고구려군 1천 죽음. 당군이 성 외곽과 촌락에 불 지르고 퇴각

658

적봉진,

거란 거주지

정명진, 설인귀

당군이 고구려 적봉진 공격 함락,

고구려 두방루가 3만 군대로 반격

659

횡산, 석성, 토호진수

계필하력, 양건방, 신문릉, 위대가, 설인귀

고구려군이 토호진수에서 신문릉군 기습, 고구려 온사문군 횡산에서 당군과 전투

661

662.2

압록강, 대동강 하구, 평양일대

평양도행군 등 6개행군 35군

약 35만44만

압록강과 대동강 하구 전투에서 당군 승리, 연개소문이 당의 옥저도행군 전멸시킴

666

668

부여성, 압록강, 신성, 평양일대

계필하력군 50만, 학처준

풍사본, 이세적의 본진 

신성과 부여성 함락, 당군의 압록강 방어망 돌파 및 장안성 함락. 고구려 멸망


이 표를 보면 년대에 따라 전쟁 상황이 결전(決戰)과 국지전(局地戰)으로 구분됨을 알 수가 있다. 즉 결전은 당나라가 전력을 다해 큰 승부를 내자고 공격함으로써 벌어진 전쟁이고, 국지전은 장차 결전에 대비하여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거나, 적을 교란시킬 목적으로 벌어지는 비교적 소규모의 전쟁이다. 고-당 전쟁의 결전은 3번 있었다. 이를 1차, 2차, 3차 전쟁으로 구분하기로 하겠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고-당 전쟁에 대한 관심은 지나치게 645년 1차 전쟁에 집중되어 왔다. 또 667년에서 668년에 벌어진 전쟁의 경우도 고구려 멸망이라는 엄청난 결과 때문에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다른 연도에 벌어졌던 전쟁에 대해서는 별다른 연구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특히 661년에서 662년 2월까지 벌어진 2차 고-당 전쟁은 필자가 주목하기 전까지는 단 한번도 단독 논문의 주제가 되어 본 적이 없었다.


현재 한국 역사학계의 통설을 가장 잘 반영한 것으로 평가되는 국사편찬위원회 간행 ꡔ한국사ꡕ에는 고-당 전쟁에 대해 초기 전쟁, 중기 전쟁, 말기 전쟁으로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중기 전쟁을 647∼665년으로 크게 묶어서 설명하고 있다. 그 가운데 660년부터 662년까지의 전쟁은 1쪽에도 못 미치는 분량만을 서술하고 있다. 이는 초기 전쟁이나 말기 전쟁에 비해 지나칠 정도로 소략하다. 또한 전쟁 시점 구분도 대단히 모호하다. 이러한 2차 고-당 전쟁에 대한 학계의 평가는 1959년 출간된 진단학회 간행 ꡔ한국사ꡕ, 1976년 출간된 이병도의 ꡔ한국고대사연구ꡕ 등의 인식에서 크게 진전된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에서 고-수, 당 전쟁에 관하여 심도 있는 연구를 진행하여 이와 관련한 여러 책을 출간하였다. 이 가운데 ꡔ고구려 對수․당전쟁사ꡕ는 고-수, 고-당 전쟁의 결론을 고구려가 전쟁에서 승리한 원인을 분석하는 것으로써 끝냄에 따라, 649년 당태종의 죽음이 그 서술의 하한이 되고 말았다. 이러한 책 구성은 2차 고-당 전쟁이 곧 3차 고-당 전쟁과 함께 고구려의 멸망 전쟁 또는 삼국통일전쟁으로 이어진다고 보는 선입견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2차 고-당 전쟁은 위 책의 후속편 격인 ꡔ나당전쟁사ꡕ에서 다루어지고 있다. 그런데 2차 고-당 전쟁을 <나-당 연합군의 고구려 침공> 편에 다루고 있다. 따라서 2차 고-당 전쟁에서 신라의 역할이 크게 부각되기는 했지만, 전쟁 상황 전체를 파악하는 데 실패하고 있다.

또 ꡔ한민족전쟁통사ꡕ에서는 647648년에 걸쳐 당군이 남소성, 석성, 박작성 등지를 공격해온 국지전을 2차 고-당 전쟁으로 보고 이를 645년 1차 전쟁과 더불어 기술하고 있다. 반면 661662년 전쟁은 나-당 연합군의 고구려 침공으로 간략하게 기술하면서 이를 나-당 전쟁의 배경으로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661662년 전쟁에서 신라군은 당군에게 군량을 보급해주는 부수적인 역할만을 담당했을 뿐이다.


2차 고-당 전쟁은 민족주의 사학의 대표자인 단재 신채호의 ꡔ조선상고사ꡕ에서도 무시되었다. 단재는 연개소문을 대단히 높게 평가하였으나, 연개소문의 대표적인 전공인 사수(蛇水)전투를 비롯한 2차 고-당 전쟁은 언급하지 않았다.


중국학계도 2차 고-당 전쟁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중국학계가 내놓은 최초의 본격적인 고구려 통사라고 인정되는 통사인 ꡔ중국고구려사ꡕ(경철화 저)는 645년 당태종의 고구려 정벌과 정벌의 결과와 영향에 걸쳐 자세한 분석을 해놓고 있다. 그러나 2차 고-당 전쟁에 대해서는 1페이지 미만의 분량으로 주요 사건의 발생을 나열해 서술하고 있을 뿐이다. 2차 고-당 전쟁을 독립된 성격의 전쟁이 아닌, 고구려 멸망의 과정으로 인식하고  662년 2월 당군의 퇴각과 666년 6월 당군의 활동을 연이어 적고 있다.


이처럼 2차 고-당 전쟁이 소홀하게 취급된 것은 무엇보다 전쟁 상황을 전해주는 사료의 부족이 첫 번째 원인이다. ꡔ구당서ꡕ <고려열전>에는 655년과 658년, 659년의 국지전과 660662년에 이르는 2차 고-당 전쟁을 하나로 묶어서 당고종이 임아상, 소정방, 계필하력 등에게 명하여 전후로 고구려를 토벌하게 하였으나, 모두 큰 공을 세우지 못하고 돌아왔다고 짧게 기록했다.

1차 고-당 전쟁은 당태종의 친정(親征)이란 면에서, 3차 고-당 전쟁은 고구려 멸망으로 이어진다는 면에서 각각 상세한 전후 과정이 기록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2차 고-당 전쟁을 기록한 당나라측 사료는 전쟁 결과에 불만을 가진 당나라의 입장 때문에 자세히 기록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두 번째 요인은 단재 신채호를 비롯한 여러 연구자들이 이 전쟁을 고구려의 멸망과정, 또는 삼국통일의 한 과정, 나-당 전쟁의 한 부분으로 판단하고, 특별한 의미부여를 하지 않았던 탓도 있다. 즉 지나친 결과론적 해석에 의해 2차 고-당 전쟁은 지금까지 무시되어 왔던 것이다.


그렇다면 2차 고-당 전쟁은 정말 아무런 의미도 없었던 것일까?

그렇지가 않다. 이 전쟁은 우리가 주목해야 할 많은 것들을 담고 있는 중요한 전쟁이었다.

첫째 양국 모두 14년 이상 준비한 동아시아 대전이었다. 647년 이후 당태종은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해 엄청난 배를 건조하도록 시켰다. 본래 당태종이 고구려와의 재결전을 준비한 시점은 649년이었다. 그러나 그해에 그가 죽자, 전쟁이 미루어진 것이었다. 당태종의 뒤를 이은 당고종은 고구려와의 결전을 서두르지 않고, 치밀한 준비를 했다. 당태종이 한 것처럼 수천 척을 배를 만들고 거란을 정벌하여 고구려와의 전쟁에 교두보를 확보하고, 신라와의 동맹을 강하게 추진하여 먼저 백제를 멸망시키는 등 고구려와의 결전에 대비한 만반의 준비를 했다. 연개소문 역시 당나라의 재침을 막기 위해 천리장성을 보수하는 등 철저한 준비를 하였다.


둘째 2차 고-당 전쟁은 결전 중의 결전이었다. 즉 660년 당나라의 백제 공격도 이 전쟁을 위한 사전 준비였다. 당군이 13만 군대를 대략 1900척에 싣고 백제를 멸망시킨 후, 대부분의 군대를 다시 당으로 되돌아오게 한 것은 고구려를 다시 공격하기 위함이었다. 당군은 고구려의 강력한 요동방어망을 피해 해상 침투를 통한 평양성 직공 작전을 펼쳤다. 이를 위해 엄청난 비용이 소모되었다. 이 전쟁에서 패배하자 당나라 역시 과다팽창의 결과로 인해 나라가 휘청거릴 정도였다. 그래서 663년에 당나라는 고구려와 전쟁 중지를 선언할 정도였다.

고구려도 요동과 압록강, 평양 등지에서 당군을 막느라 전국력을 동원해야 했다. 1차 고-당 전쟁에 피해 전쟁터가 훨씬 넓어져 고구려가 치러야할 전쟁 비용 또한 급증하였다. 동원된 병력 또한 1차 고-당 전쟁과 비슷하거나, 이를 상회하는 규모였다. 2차 고-당 전쟁은 예고된 결전답게 양국의 운명을 가르는 대전쟁이었다.


셋째. 과거와 다른 새로운 전쟁 양상이 벌어졌다. 즉 612년, 645년 전쟁과 달리 적군은 겨울철에도 철수하지 않고 전쟁을 지속하였고, 요동이 주된 전쟁터가 아니라 압록강과 평양 일대가 그 중심이었던 점도 과거와 달랐다. 또한 고대 동아시아 해양사 최대의 전쟁이기도 했다. 즉 고구려와 중원세력과의 전쟁 양상에서 시간과 공간의 파괴를 가져온 신 개념의 전쟁이었다.


넷째. 고구려와 연개소문을 이해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전쟁이었다. 연개소문을 거론할 때에 1차 고-당 전쟁에서 당태종 이세민과의 문제를 가장 많이 다루어진다. 하지만 1차 고-당 전쟁에서 연개소문이 준비할 수 있는 시점은 불과 2년 정도였다. 그의 역량이 다 발휘되는 전쟁은 14년가량 준비하여 치룬 2차 고-당 전쟁이었다. 전쟁은 장기적으로 국력의 싸움이다. 고구려가 어떤 역량을 지녔는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전쟁이 바로 2차 고-당 전쟁이라고 할 수 있다.

연개소문의 최고의 전공인 사수대첩. (종종 살수대첩과 혼동하는 예를 본다. 그 만큼 사수대첩이 덜 알려진 탓도 있다.) 이 전투에는 연개소문은 당나라 방효태의 옥저도행군을 전멸시키고 패강도행군 등을 궤멸로 몰고 간 것은 당나라에게 다시 한번 고구려에 대한 두려움을 심어주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즉 장군으로서의 연개소문의 역할은 1차 고-당 전쟁보다 도리어 2차 고-당 전쟁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찾아볼 수 있다. 또한 연개소문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전쟁 또한 바로 2차 고-당 전쟁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전쟁을 10년 이상 준비하면서 연개소문은 당을 막기 위해 거란 쟁탈전, 사마르칸트의 강국(康國)에까지 사신을 보낸 외교전, 첩보전, 백제와의 동맹관계 유지 등 많은 일을 했다. 연개소문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2차 고-당 전쟁을 이해해야 한다.


널리 알려진 645년 1차 고-당 전쟁이 고구려와 당나라의 전쟁의 전부가 아니다. 우리는 또 하나의 전쟁을 통해 고구려와 연개소문을 찾아볼 수가 있다.

2차 고-당 전쟁의 진행과정과 전쟁의 결과에 대해서는 연개소문 드라마가 중반 이후 2차 고-당 전쟁을 언급하는 시점에서 다시 글을 쓰기로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