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한 분으로 부터 고구려시대의 고씨가 과연 우리의 고유 성인지, 그 근거가 무엇인지, 중국에서는 고씨가 없는지, 고씨의 기원은 언제인지 등에 대한 질문을 받았습니다.
고구려 시대 고씨가 우리의 고유 성씨인가? 그 근거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은 결국
고씨의 기원은 언제인가? 또 고구려 고씨는 중국 고씨와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닌가 라는 질문과 연결됩니다.
흔히 성씨는 중국에서 기원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중국을 사대하는 경향이 짙었던 조선시대에는 중국의 전설시대마저도 사실이라고 오리혀 추어주는 경향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중국의 경우 신화시대까지 올려서,
- 신농씨(神農氏)의 어머니가 강수(姜水)에 있었으므로 강(姜)씨라고,
- 황제(黃帝)의 어머니가 희수(姬水)에 있었으므로 성을 희(姬)씨로,
- 순(舜)의 어머니가 요허(姚虛)에 있으므로 성을 요(姚)씨로 한다는 것을 사실처럼 여기는 반면,
우리 역사에서는
- 고구려는 장수왕시대(413~490)부터,
- 백제는 근초고왕시대(346~375)부터,
- 신라는 진흥왕시대(540~576)부터 성을 쓴 것으로 추정하는 연구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견해는 비록 우리가 성씨를 처음 사용한 것은 아니지만, 지나칠 정도로 중국측 자료만을 신빙하고, 우리측 자료를 부정하는 견해에서 나온 것이라고 비판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먼저 중국측 자료를 찾아보면, 고씨의 기원을 신화시대로 올리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www.greatchinese.com(중화인)에서 중국 中華百家姓一覽이란 자료를 찾아보니, 강태공의 후손에서 고씨의 유래를 찾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제나라 혜공의 자손이 처음 고씨를 사용했다고 한다면, 혜공의 재위 기간이 서기전 609-599년이라 하므로, 기원전 6세기에 처음으로 고씨가 시작되었다고 볼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여기서 시작한 고씨가 고구려 고씨와 관련 있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고구려의 성씨는 추모왕이 나라를 건국할 때에, 재사, 묵거, 무골에서 각기 극씨, 중실씨, 소실씨를 하사하고, 추모왕이 나라를 세운 후, 고씨로 자기 성을 삼았다는 것이 최초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삼국유사에는 기이편 북부여조에
自稱名解慕慕漱, 生子名扶婁, 以解爲氏焉 라고 하여 부여에서 해씨가 존재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고구려조에
國號高句麗, 因以高爲氏[本姓解*<氏,也>, 今自言是天帝子, 承日光而生, 故自以高爲氏.]
라고 하여 추모왕의 성씨가 본래는 해씨인데, 나중에 나라를 건국한 후에 고씨로 성을 바꾸었다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측 기록을 근거로 한다면 적어도 기원전 시대에 고씨가 존재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신라의 경우
신라의 경우 진흥왕의 4대 순수비, 진지왕 3년의 무술오작비, 진평왕 시대의 남산 신성비 등에서 성씨가 구체적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에, [북제서]에 보이는 김진흥을 기점으로 성씨가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고구려와 신라는 그 상황이 다릅니다.
중국측 기록에서 고구려 사람 가운데 최초로 성씨가 보이는 인물은 장수왕으로 고연(高璉)이란 이름으로 [송서]에 처음 등장합니다. 송서는 제 무제 연간(487-488)에 심약이 쓴 책이므로, 적어도 고구려에서는 장수왕 연간에는 최소한 고씨라는 성을 쓰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위서]에서는 고구려가 나라 이름에서 왕의 성씨를 고씨라고 했다는 것까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기록을 볼 때 고구려는 장수왕 연간에는 고씨라는 성을 사용했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송서에 따르면, 장수왕이 고연이란 이름으로 등장하는 시점이 413년이며, 이때 고익이란 인물이 등장합니다. 과연 고구려가 장수왕 년간에 처음 성씨를 사용했을까? 그것은 분명 문제가 많습니다.
흔히 고씨에 대해서 [晋書] <慕容雲>전에서 등장하는
慕容雲字子雨, 寶之養子也. 祖父和, 高句驪之支庶, 自云高陽氏之苗裔, 故以高爲氏焉.
고양씨의 후손이라는 것을 내세워 4세기에 고운이 처음으로 고씨를 성으로 내세웠다고 하는데, 이는 지나친 중국적인 부회라고 밖에는 볼 수 없습니다.
고운이 스스로 고양씨라고 말한 것은 그 자신이 북중국에 살면서 漢族들 속에서 자신의 가문이 명문가임을 내세우기 위해서 고양씨라고 주장한 것일 뿐입니다. 고운 스스로 자칭한 것이지, 고구려 사람들이 고양의 후손이란 기록은 위 기록에서도 보이지 않습니다.
보장왕의 손자였던 高震의 묘지명에도 그가 부여의 귀족이요, 발해인이란 글귀는 보여도, 고양씨의 후손이라는 명칭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또한 고구려에는 高慈의 묘지명에서 보듯 왕실로부터 賜姓을 받은 고씨들도 있습니다. 따라서 고자의 조상까지 중국에서 유래된 고씨라고는 볼 수는 없습니다.
고구려의 성씨가 등장하는 중국측 기록의 시작은 [송서]가 최초라고는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중국측 자료의 정확성을 100% 인정한 상태에서 그렇게 말하는 것이고, 동시에 [삼국사기]를 비롯한 국내 자료를 다 무시하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삼국사기를 토대로 고구려에서 성씨로 추정되는 사람을 우선 정리해보면,
추모왕의 부하인 부분노와 부위염의 扶씨,
송양왕의 딸인 송씨 왕후(유리명왕의 부인)의 松씨
그리고 부정씨(대무신왕에게서 받음), 락씨(부여에서 탈출한 대소왕의 동생), 대실씨(추발소가 받음),
등 고구려 초기까지 올라갑니다.
무엇보다 확실한 고구려에서 성씨 사용의 예는 2세기에 살았던 명림답부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
명림답부와 같은 성씨를 가진 인물로 명림어수와 명림홀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을소, 을파소, 을두지 등 乙씨도 고구려 초기부터 고구려에 성씨가 있음을 알려주는 자료가 됩니다. 아울러 고국원왕의 왕후인 周씨의 경우는 이미 고운 이전에 고구려에 성씨가 있음을 중국측 자료에서 알려주는 경우가 됩니다. [자치통감]에 342년에 이미 고구려 왕모 주씨가 등장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수왕 연간에 처음 고구려에서 성씨를 사용했다는 것은 틀립니다.
또 高慈의 20대 조상인 고밀의 경우 모용외가 침입했을 때 공을 세워 고씨 성을 받았다고 하므로,
적어도 고구려의 왕실에서 성씨를 사용한 시점은 최소한 고국원왕 시점임은 너무도 분명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명림답부가 활약했던 신대왕, 고국천왕 연간 이상으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나아가 고구려 초기의 성씨 사여 기록도 무시할 수는 없으며, 사실이라고 보는 것이 좋을 것 입니다.
고양씨가 고구려 고씨의 조상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북중국에서 살고 있던 고운 개인의 주장일 뿐, 고구려의 성씨 유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문제로 삼아야 할 것은 발해고씨 입니다.
발해고씨의 경우 고구려인의 상당수가 북중국에 건너가서, 자칭 타칭 발해고씨로 불리게 됩니다.
이들의 경우 한나라 시대의 명문가라고도 하는데, 이들에 대한 조사를 다시 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현재 이들에 대한 연구는 서병국 교수 정도만이 논문 한 두편을 쓴 정도이므로, 앞으로 많은 연구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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