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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고려시대 화장(化粧) 문화

영양대왕 2009. 5. 27. 00:11

통일신라의 뒤를 이은 고려는 태조(太祖)가 신라의 정치제도와 문화전통을 계승하는 정책을 시행하였고, 국교도 계속 불교를 받아들임으로써 화장 문화 또한 전대(前代)의 문화가 그대로 이어졌다.

 

국초부터 중국의 기녀(妓女) 제도를 본받아 교방(交坊)을 두는 등 기녀를 제도화함으로써 외형상 사치스러워졌고, 내면으로는 탐미주의(耽美主義)의 경향이 농후해졌다. 이는 재가인(在家人)을 위한 출가법 팔계제(出家法 八戒齊) 중에 도식향만(塗飾香鬗), 부저화영락(不著華瓔珞), 불향도신(不香塗身) 등의 항목에서 잘 나타난다. 즉 일부 계층에 한정되긴 하지만 신체와 머리카락, 옷에 향을 뿌리거나 발랐으며, 갖가지 보석장식을 패용하고 여러 가지 화장품을 진하게 발랐기 때문에 일부 사찰에서는 이러한 차림의 신자들을 출입금지 시키기도 하였다.

 

그러나『고려도경』에 나타난 부인들의 화장을 보면 ‘부인들이 몸치장에 있어 얼굴에 바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분만 바르고 연지를 쓰지 않으며, 버들잎 같은 눈썹을 그렸다.’고 하는 바 그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차이는 고려시대의 화장이 기생의 분대화장(백분을 바르고 눈썹을 그리는 화장법)과 여염집 부인들의 옅은 화장으로 이원화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기생과 구분되고자 하는 여염집 부인들의 반작용으로 교방에서 화장법을 교육시키고 관청에서 화장품을 배급하는 ‘분대(粉黛)’라는 독특한 화장 스타일을 이룬 반면 화장 문화 발전에 저해요인이 되기도 하였다(이경자 외 1991: 223-224).

 

그 밖에 모발관리에 굉장히 치중한 흔적들이 여럿 보이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원했던 모발상태는 ‘검고 윤기 나며 길고 숱이 많은 머리’였습니다. 단오와 유두에 창포 삶은 물에 머리를 감는 세시 풍속이 남아 있는 점, 머리카락이 용처럼 길어진다고 하여 정월 첫 윤날인 上辰日에 머리를 감는 점 등이 그러한데(류은주 1995: 75) 화장뿐만 아니라 모발에 대해서도 신경을 썼다는 점이 특징이 아닐까 합니다.

 

이상 고려시대 화장 문화에 대한 간단한 내용을 적어 봤습니다. 선행 연구들을 보면 우리나라 화장 문화의 시원은 상고시대에서 찾곤 합니다. 단군신화를 보면 곰과 호랑이에게 쑥과 마늘을 먹고 동굴에서 백일기도를 올리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를 두고 ‘흰 피부’로 변신하기 위한 주술을 묘사한 것이라는 견해가 있습니다(류은주 1995: 71). 예전에 아프리카 토인들이 어떤 의례행위를 할 때 몸에 하얀 분을 칠한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이 또한 신은 자신들과 다른 어떤 존재라는 의식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즉, 초창기의 화장 문화는 耽美의 목적이 아니라 變身 혹은 扮裝의 의미가 강했다고 생각합니다.

 

실제『삼국지』의 읍루인들이 추위를 이기기 위해 돼지기름을 바른다는 기록,『후한서』의 말갈인들은 사람 오줌(人尿)으로 손과 얼굴을 씻었다는 기록 및『삼국지』의 마한과 진한 사람들이 어로 · 사냥시 큰 물고기를 위협하기 위해 文身을 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앞의 2가지 사례는 오늘날의 ‘스킨로션’을 생각하면 될 것 같고, 후자는 오늘날 패션 아이템의 하나로 주목받는 ‘타투 아티스트’와 큰 차이가 없을 듯합니다. 물론 과거에는 耽美보다는 기능성에 주목했다는 차이점은 있지만요.

 

우리나라는 삼국시대가 되면 상고시대의 화장 문화 위에 외래문화(주로 중국문화)의 도입으로 새로운 화장 문화가 발전하게 됩니다. 久下司의「化粧」에 의하면, ‘연지가 일본에 들어온 것은 推古天皇 18년(610) 9월 고구려의 승 담징이 그 종자를 가지고 왔다.’고 적혀 있는데 이는 당시 고구려에서 일본으로 연지 문화를 전파해줄 정도로 보편화되어 있었음을 말해줍니다. 그 밖에 고구려 고분벽화를 보면 고구려의 화장 문화에 대해 알 수 있는 자료가 굉장히 많습니다(이경자 외 1991: 222-223). 또한『삼국사기』를 보면 巫女와 樂工이 이마에 붉은 칠을 했다는 곤지 풍습도 확인됩니다(류은주 1995: 72).『本草綱目』에 의하면 한의 장건이 서역에서 돌아오면서 처음으로 종자를 가져왔다고 하는데 언지산에서 갖고 왔다 하여 그 이름이 유래했다고 합니다. 전반적으로 고구려와 달리 백제와 신라에서는 화장 문화가 크게 발달하지 않았다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인데 이는 백제, 신라의 화장 문화가 전체적으로 옅은 화장을 했기 때문이라고도 합니다. 하지만 화랑 같은 아름다운 남성들에 대한 기록도 있기 때문에 백제, 신라 역시도 짙은 화장과 옅은 화장법 2개가 다 존재했다고 생각합니다.

 

동시대 중국에서도 화장 문화는 꾸준히 발전하게 되는데 최전성기를 이룬 시기는 바로 唐代라고 합니다. 중국에서 원시 화장 문화가 싹을 틔운 것은 선진시대로 문신과 눈썹 화장의 흔적이 확인됩니다. 이후 진-한 시대가 되면 서역문화가 유입되면서 화장 문화가 변화하는데 이와 맞물려 사치풍조가 만연하면서 귀족 중심으로 화장 문화가 크게 발전 · 유행하게 됩니다. 위진 시대가 되면 중국 사회 전반에 자유혁신의 풍조가 퍼지기 시작한 시기로 기본적인 틀은 한대 화장 문화의 제도를 이어받았지만 불교의 도입 등으로 색채나 화장법 등에 큰 변화가 생겨납니다(안인희 2005: 70-71).

 

당대 화장법을 살펴보면 첫째 피부 화장으로서 鉛粉을 바르고, 두 번째 臙脂를 바르며 세 번째 오늘날의 눈썹 화장인 眉黛를 그리고, 네 번째 花鈿(이마의 장식)을 붙이고 다섯 번째 面靨(보조개 장식)을 그리고 여섯 번째 斜紅(관자놀이 장식)을 그리고, 일곱 번째 點唇(입술 장식)을 칠하였습니다. 이 중 연분과 연지, 미대, 점진은 오늘날 현대 여성 메이크업과 큰 차이가 없으며, 화전이나 면엽, 사홍 등은 현대에 부분적으로 변천하여 뷰티 패치나 크리스탈류 등 얼굴의 부위를 장식하여 돋보이게 하는 화장법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배형자 외 2005: 63). 당대의 이러한 화장법은 굉장히 이국적인 문화인데 궁중에서부터 사회 전반적으로 퍼져나갔다고 합니다. 당시 수입된 여러 화장품은 궁중의 후궁들부터 일반 시녀들에게까지 매달 지급되었다고 하니(전혜숙 외 2008: 72) 화장 문화가 번성하지 않았을 리 없었겠죠.

 

 

그럼 다시 고려시대로 돌아와서 당시 화장법에 대해 잠깐 알아보겠습니다.

 

1. 고려시대 기녀는 아름다운 자태로 남성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 ‘살짝 머리를 왼쪽 어깨에 내려 드리우고 나머지 머리는 아래로 내려 댕기로 묶고 비녀를 꽂았다.’고 합니다(金恩珠 1989: 42). 여기에 덧붙여 기녀는 ‘백분을 바르고 눈썹을 그리는’ 분대 화장을 했습니다(류은주 1995: 74).

 

2.『고려사절요』에 의하면 ‘婦人들이 몸치장에 있어 얼굴에 바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분만 바르고 연지를 쓰지 않으며 버들잎 같은 눈썹을 그렸다.’고 합니다. 이를 두고 류은주는 바로 전대까지 유행하던 연지 바르는 풍습이 고려에 이르러 퇴색했다고 해석했으며(1995: 74), 金恩珠는 이전 시대에 유행하던 것이 갑자기 사라질리 없기 때문에 고려인들 역시 연지 바르는 풍습이 있었다고 해석했습니다(1989: 42). 뭐 저 역시 갑자기 연지 바르는 풍습이 사라졌다기 보다는 유행이 변화한 것 정도로 이해하고자 합니다. 고려가 500년 가까이 유지됐는데 화장 문화의 유행이 그 과정에서 수도 없이 바뀌었을 것이라는 것은 당연한 이치니까요.

 

3. 고려 여인의 눈썹 화장은 ‘눈썹에 그리는 물감으로 검다 못하여 푸른 아청이나 진한 자주빛의 대, 褐 등으로 눈썹을 그리되 그 모양으로 초승달과 같은 초생미, 꾀꼬리의 아미, 당미 등으로 그녀 나름의 생김에 맞추거나 기호에 따라서 그렸다.’고 합니다(이승만 1977: 111).

 

4. 고려 후기 화장 경향을 알 수 있는 자료가 경남 밀양에서 발견되기도 하였습니다. 경남 밀양시 청도면 고법리에 있는 송은 박익(1332~1398)의 무덤석실 내부에서 고려 후기의 벽화가 발견되었는데, 여기에 보면 반달형의 가는 눈썹은 이전 시기와 동일하지만 붉은색 저고리를 착용한 여인의 붉은 입술색에서 당시 상류층 여인들이 고려 중기의 화려하고 사치스러웠던 화장법을 답습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이연희 외 2004: 59). 즉, 고려 시대에는 전체적으로 귀족 여성들은 화려한 화장을 꾸준히 선호했던 것 같습니다. 

 

5. 서울에 있는 무녀와 관비를 남장으로 가장하여 배우화하여 남장이라 부르면서 노래를 가르친 것으로 보아 남장에 따른 기녀 화장법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에는 面藥을 사용하여 피부 관리에도 힘썼는데『고려도경』을 보면 송대 正使, 副使, 都轄官, 提轄官의 자리에 銀製의 면약고를 두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면약은 덜어서 사용하기 용이한 액상의 안면용 화장품을 지칭하는 것입니다(김완길 1987: 47). 지금으로 치면 콤팩트 화장품과 비교할 수 있겠네요.

 

6.『규합총서』에 ‘黑髮長潤法’이 기록되어 있는데, ‘기름 두되에 무르익은 오디 한 되를 병에 함께 넣어 볕이 안 드는 첨하에 담아 두었다가 석 달 만에 바르면 검게 칠한 듯 하고 푸른 깻잎과 호두 껍데기를 한데 달여 머리를 감으면 길고 검어진다.’고 합니다. 또『증정현토산림경제』를 보면 ‘천궁, 액리, 산호각 한 냥, 만평차, 영능, 향부자 각 단 돈을 명주로 만든 자루에 넣어 부순 후, 이것을 청량유에다 21일 동안 담갔다가 기름을 내서 하루에 3번씩 머리가 나지 않는 부위에 문지르면 머리털이 나며, 또한 술에다 담근 천초 양제를 머리 빠진 부위에 문질러도 머리털이 나온다.’고 적고 있습니다(류은주 1995: 75). 저도 머리숱이 얼마 없는데 한번 해보고 싶을 정도로 자세하게 적혀 있네요. ^^

 

뭐 대략 이 정도면 정리가 됐을라나 모르겠습니다.

 

제가 남자인데다가 화장에 큰 관심이 없어서 나름 정리는 했는데...도움이 되셨을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래 참고문헌을 정리했으니깐 한번 읽어보시고요, 혹시 제가 잘못 알고 있거나, 잘못 서술한 부분이 있으면 지적해주세요. 이 부분은 제가 자신이 없어서요. ^^ 그럼 이만~

 

참고문헌

 

김완길, 1987,『화장문화사』, 열화당.

金恩珠, 1989,「韓國 傳統 化粧風俗史에 관한 硏究」『服飾』13, 韓國服飾學會.

류은주, 1995,「韓國 古代 傳統 皮膚管理 및 化粧文化에 關한 硏究」『한국미용학회지』1권 1호, 한국미용학회.

배형자 · 김영현, 2005,「中國 唐代 女性의 化粧文化에 關한 硏究」『한국인체예술학회지』6권 3호, 한국인체예술학회.

안인희, 2005,「중국 고대 여성화장 문화연구」『한국디자인문화학회지』11권 2호, 한국디자인문화학회.

이경자 · 송민정, 1991,「우리나라 傳統 化粧文化에 關한 硏究」『服飾』17, 韓國服飾學會.

이승만, 1977,『풍류세시기』, 중앙일보 동양방송.

이연희 · 류광록, 2004,「화장 문화 고찰(1)-화장의 기원과 고대 한국, 중국을 중심으로-」『한국디자인문화학회지』10권 4호, 한국디자인문화학회. 

전혜숙 · 이애련, 2008,「唐代 묘실벽화에 나타난 化粧文化 연구」『한복문화학회 추계학술대회 발표자료집』, 한복문화학회.

 

첨부파일 한국 전통 화장풍속사에 관한 연구-김은주(19.pdf

첨부파일 한국 고대 전통 피부관리 및 화장문화에 관.pdf

첨부파일 中國 唐代 女性의 化粧文化에 關한 硏究-배.pdf

첨부파일 화장문화 고찰-화장의 기원과 고대 한국,중.pdf 

출처 : 뿌리아름역사동아리
글쓴이 : 麗輝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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