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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해상무역을 담담한 세력

영양대왕 2007. 11. 23. 11:37
이상의 제세력중에서 해상무역을 담당한 세력에 대해서 논의를 전개해 보겠다. 우선은 지방세력이 아닌 중앙권력층의 무역경영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전통적으로 중화(中華)의 사상(思想)을 가지고 있던 중국은 주위의 제세력에 대해서 대등한 국교를 인정치 않았다. 따라서 그 사절의 파견은 반드시 번속국(藩屬國)의 종주국(宗主國)에 대한 입공(入貢)의 형식을 채택하였고, 공물(貢物)에 대하여 반드시 회사(回賜)의 명분으로 물품을 하사(下賜)하였다. 공사양물간의 경제적 평가는 반드시 균형을 이루지 않았고, 중국천자의 은혜를 과시하는 의미로 많은 양을 하사(下賜)하였다. 그래서 이것은 공사(公事)에 있어서 무역관계를 구성하여 공무역(公貿易)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신라의 사신선(使臣船)도 다른 나라의 경우와 같이 국제수호의 외교목적과 함께 무역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중국황제에게 바쳐지는 조공품(朝貢品)은 황제개인의 수입으로 되었으므로, 국가재정(國家財政)이 아니라 제실재정(帝室財政)으로 되었다. 회사품(回賜品)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조공국(朝貢國)의 국왕(國王)이나 수장개인수입(首長個人收入)으로 되었다. 따라서 신라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상의 중앙권력층에 의한 무역은 정창원(正倉院)에 있는 ‘매신라물해(買新羅物解)’라는 문서를 통해서도 살펴 볼 수가 있다. 이 문서는 관등 5위 이상의 일본귀족들이 신라로부터 들여올 상품을 구입하기에 앞서 그들이 필요로 하는 물건의 품목·수량·가격 등을 기록하여 대장성(大藏省) 또는 내장료(內藏寮)에 제출한 ‘매물해(買物解)’, 즉 구입허가신청서이다. ‘매물해(買物解)’가 제출된 날짜는 경덕왕 11년(752)의 6월 15·16·17·20·21·23·24·26일이다. 이는 신라왕자 김태렴(金泰廉) 등의 사절단 일행이 평성경(平城京)에 머물고 있었던 기간과 일치하고 있다.

그런데 주목할 만한 일은 김태렴 일행 가운데는 일본에서의 무역을 목적으로 온 사람들, 즉 상인들이 많았다는 사실이다. 752년에 온 신라사신은 7척의 배에 700여인을 헤아린다. 이 대규모의 신라사신단 중에는 상당수의 무역상인이 있었던 듯하다. 김태렴에 의하면 경덕왕은 370명을 일본에 파견했다고 한다. 신라의 공식적 사신 370명과 거의 동수(同數)에 가까운 왕성(王城)의 상인 또는 도중에 합류한 무역상인(貿易商人)이 다수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다음은 앞에서 언급한 지방세력층의 무역경영이다. 여기에 속하는 부류로는 장보고(張保皐)·왕건(王建)·왕봉규(王逢規)·이언모(李彦謨) 등을 들 수 있다. 청해진의 폐쇄이후에 각지에서 군소해상세력들이 독자적으로 대중국무역을 전개하였다. 강주지역(康州地域; 오늘날의 경상남도 진주)에서 독립된 세력으로 성장한 왕봉규(王逢規)는 924년(경명왕 8년)에 후당(後唐)에 사신을 보내어 자신을 절도사로 칭하였다. 이는 대외적으로는 이전부터 추진해 오던 서해안 무역활동을 원활하게 전개하여 경제적인 부를 획득함으로써 이를 토대로 군사력을 강화하고자 한데에 그 목적이 있었다. 강주의 전역으로 세력기반을 확대해 나가던 왕봉규(王逢規)는 927년(경애왕 4년) 4월 이후부터 928년(경순왕 2년)사이에 벌어진 고려와 후백제간의 공방전 속에서 몰락하고 강주(康州)는 928년(경순왕 2년) 견훤에 의해 점령되었다.

한편 금주(金州; 오늘날의 경상남도 김해)의 군사책임자인 이언모(李彦謨)는 ‘사마(司馬)’인 동시에 중국 등주(登州)의 지후관(知後官)으로 장보고의 세력기반이었던 적산촌이 속해있던 등주(登州)와 금주(金州)와의 연락업무를 맡아보면서 금주(金州)의 경제적인 무역활동은 물론 신라의 외교적인 연락사무도 맡아보았다. 당시 이언모(李彦謨)로 하여금 무역활동을 추진케 한 김해의 호족세력은 소율희(蘇律熙)로써 그는 특히 선종을 적극적으로 육성하여 효공왕대에 이르러 김해지방이 선종의 요람지로써 명성을 날리게 했다. 이들 김해지방의 호족세력들은 풍부한 자원을 바탕으로 중국과의 경제적인 무역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시켜 부를 축적하고 이를 토대로 군사력을 강화시켜 자신들의 세력기반을 유지하고자 하였다.

개성지방에서 해외무역을 포함한 상업활동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은 신라가 당과의 대립기간을 지나 안정된 700년경이며, 800년경부터는 중앙정부와 귀족세력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이 중국각지와 사무역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개성은 신라 서북지방의 중심지로서 강대한 지방세력을 이루고 있었으며 왕건의 집안은 이 지방 제일의 재력을 배경으로 하여 지도적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그리고 왕씨집안은 대대로 이 지방 각처의 부호들과 혼인관계를 맺음으로써 개성지방 세력의 단결을 공고히 하고 기반을 튼튼히 하였다. 한편 이 지방의 상업세력은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궁예가 나타나자 재빨리 귀순함으로써 그들의 무역기반을 유지할 수 있었으며 이것은 후에 고려시대의 벽란도활동으로 연결되었다.

나주지역에서도 해상무역을 통한 정치세력이 형성되어 있었다. 특히 왕건의 부인이었던 나주오씨(羅州吳氏)의 집안은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한 경우로 보인다. 그리고 고려의 건국에 있어 이 지역이 중요하였던 것은 왕건이 궁예의 장군으로 강력한 해군력을 토대로 후백제의 배후인 나주지역에 군사적 거점을 마련하여 후백제를 고립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왕건의 비(妃)인 신혜왕후(神惠王后)의 정주유씨(貞州柳氏)도 해상세력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즉 왕건이 정주를 군사기지로 삼고 나주지역을 정벌하고자 하였을 때 왕건의 군사들을 머물게 하여 매우 풍족히 먹였을 뿐 아니라, 이후에도 대규모의 전함을 수리하고 병사들을 묵게 할만큼 재력이 풍부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정주유씨가 기반하고 있었던 정주지역은 한강과 임진강, 그리고 예성강이 합류하는 지역으로 서해로 나가는 길목이었다.

한편 수도 경주의 외항으로서 일찍부터 활발한 국내외 무역의 중심지로 기능하고 있던 울산에서는 10세기 초반경에 호족으로 등장하고 있던 박윤웅이 달천철광과 수공업장을 장악함으로써 군사적 기반과 경제적 기반을 확보하여 호족장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이상에서 살펴본 장보고등은 지방관으로써 최고급의 권력층에 속하는 경우였다. 이외에 사료에는 전하지 않지만 군장관이하의 지방권력층들도 무역을 했으리라 생각된다. 서남해연안(西南海岸沿岸)에는 많은 섬이 있어서 해상진출에 적합한 근거지를 제공해 주기 때문에 배를 가지고 있던 자들은 가능했으리라 생각된다.

그밖에 민간무역업자들도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사실에 관해서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권34, 만경현조(萬頃縣條)가 주목된다.

군산도(群山島)는 만경현의 서쪽바다에 있는데, 주위는 60리이다. 벼랑이 있어 선박을 감출 만하며, 무릇 조운(漕運)으로 왕래(往來)하는 자는 모두 이곳에서 순풍을 기다린다. 섬 가운데는 마치 군주(君主)의 릉(陵)과 같은 대총이 있다. 근세에 이웃 고을 수령이 그 무덤을 파내어 금은 그릇을 많이 얻었는데, 사람들이 고발하자 도망쳤다.

해로의 요충인 고군산도에 군주의 릉(陵)과 같은 대총(大塚)이 있고, 거기에서 많은 금은기명(金銀器皿)이 나왔다고 한다. 이 대총(大塚)은 지방의 관료가 아니라 호민(豪民)이었을 것이고, 그 호민(豪民)이 해상무역에 기반을 두었다면 바다의 호족이었을 것이다.

우금리에 사는 가난한 여자 보개(寶開)에게 장춘(長春)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바다의 장사꾼을 따라 나가더니 오래 되어도 소식이 없었다. 그의 어머니가 민장사(敏藏寺) 관음보살(觀音菩薩)앞에 가서 7일 동안 기도했더니 장춘이 갑자기 돌아왔다. 그 동안의 연유를 물으니 장춘이 대답했다. “바다 가운데서 회오리바람을 만나 배는 부서지고 동료들은 모두 죽음을 면치 못했지만, 저는 널판쪽을 타고 오(吳)나라 바닷가에 닿았습니다. 吳나라 사람이 저를 데려다가 들에서 농사를 짓도록 하였습니다. 어느날 이상한 스님 하나가 마치 고향에서 온 것처럼 은근히 위로하더니 저를 데리고 같이 가는데, 앞에 깊은 도랑이 있어 스님은 저를 겨드랑이에 끼고서 도랑을 뛰었습니다. 저는 정신이 가물가물하는데 우리 집 말소리와 우는 소리가 들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덧 여기에 와 있었습니다.” 저녁때에 오나라를 떠났는데, 이곳에 도착한 것이 겨우 술시(戌時)였다. 이때는 바로 천보(天寶) 4년(745) 4월 8일이었다.
『삼국유사』권3 탑상(塔像)4 민장사조(敏藏寺條)

우금리에 살던 보개라는 여인의 아들인 장춘이 상인을 따라 중국에 갔다는 내용이다. 해상에서 활약한 호민(豪民)은 해도나 연해안의 요지에 근거를 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주로 선박 등을 소유하고 해상생활자사이에서 지배적인 힘을 가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무역을 통한 이윤은 그들 자신의 치부(致富)나 관료권력층과의 결합 강화 등에 쓰였고, 관료와의 결합을 바탕으로 해상생활자사이에서 세력을 확장했을 것이다.

결국 8세기 이후 정치적 혼란을 틈타 신라각지에서 지방세력이 성장하고 있었고, 그 중에서 장보고로 대표되는 해상세력의 성장은 사무역발달의 결정적 계기였다. 당시 무역경영층은 크게 중앙 및 지방관료층과 해상호민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중앙관료층은 전시기와 마찬가지로 조공이라는 공식적인 통로를 통해 이윤을 얻을 수 있었고, 지방관료층들은 독자적인 루트를 통해 해상무역을 전개하여 부(富)를 축적하였다.

다음으로 살펴 볼 것은 청해진 혁파 뒤의 대일무역의 상황이다. 정관기(貞觀期; 860년대)까지 신라와 일본 양국관계를 주도해 온 자는 당나라의 산동반도 또는 한반도의 서남부에 근거한 지역세력, 즉 민간상인층이었다. 이들 신라상인은 한반도의 서남해를 거점으로 하여 당나라와 일본을 왕래하면서 교역활동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러나 841년에 장보고가 죽자, 신라의 소란과 무역관계의 파산에 의해 다자이후(大宰府)나 세토나이카이(瀨戶內海)지역에 혼란이 생겨 정부는 842년(승화 9년) 8월에 신라인 입경(入境)을 금지하고, 홍려관에서 신라인과의 무역관계를 폐쇄하는데 이르렀다. 이리하여 승화 9년 교역통제에 의해 다자이후 홍려관에서 배제된 신라연해지역의 상인집단 일부는 다른 교역장소를 찾거나, 해적이 되어 일본 연해안에 출몰하였다.

반면에 당상인(唐商人)이 정관기(貞觀期; 860년대)부터 당나라와 일본간을 본격적으로 왕래하면서 교역을 행하게 됨에 따라 당나라와 신라의 상인간에는 보이지 않는 경쟁관계에 돌입하게 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벌어진 사건이 바로 869년의 신라인 해적사건이다.

다자이후(大宰府)가 “지난달 22일 밤, 신라해적선 2척이 하카다(博多, 지금의 후쿠오카)를 침입하여 부젠(豊前, 지금의 후쿠오카현의 동반부와 오이타현의 북부지방)국의 연공(年貢)인 견면(絹綿)을 탈취하여 도망하였으므로 병사를 동원하여 추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고 보고하였다.
(『일본삼대실록(日本三代實錄)』 869년(정관 11년) 6월 15일조)

이날 다자이후(大宰府)의 관리를 문책하는 칙령을 다음과 같이 내렸다. “제국(諸國)의 공조사(貢調使)들은 동시에 같이 출발하여야 하며, 서로 거리를 두지 말고 무리를 지어 항해를 하여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젠국 만은 혼자서 먼저 출발하여 신라해적의 표적이 되어 약탈을 당하게 되었다. 이것은 단순히 관물(官物)을 잃어버린 것만이 아니라 국가의 위신을 추락시킨 것이다. 이러한 사건이 이전의 역사에 있었는지 살펴보아도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다. 후세에 면목이 없다.(이하생략)”
(『일본삼대실록(日本三代實錄)』 869년(정관 11년) 7월 2일조)

정관기까지 양국관계에 있어서 신라의 해적행위는 869년의 한 건 밖에 보이지 않으나, 일본의 지배층에 미친 영향은 상당히 심각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위와 같은 신라해적사건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그 당시 다자이후에 거주하면서 순수한 교역활동에 종사하고 있던 신라상인들까지도 이 해적사건에 연루되어 일본정부로부터 철저한 탄압을 받았던 것이다.

다자이후(大宰府)에 칙령을 내려, 신라인 윤청(潤淸)·선견(宣堅) 등 30명과 원래부터 다자이후 관내에 거주하던 무리들이 통과하는 지방에서는 그들의 양식을 공급하여 경도(京都)로 압송하게 하였다. 이에 앞서 다자이후에서, “신라흉적이 공면(貢綿)을 약탈하였을 때 윤청 등에게 그 혐의를 씌어 그들을 구금하였다. 하지만 다이죠강(太政官)은 인은(仁恩)을 베풀어 그들에게 양식을 제공하여 추방토록 하였다. 그러나 윤청 등은 순풍을 얻지 못하고 귀국을 하지 못하였다. 그때 대마도사(對馬島司)가 신라인 7명이 표착하였다는 신라의 소식을 보고하였다. 다자이후에서는 예에 따라 식량을 주어 돌려보냈습니다. 다만 좁고 작은 신라가 흉독함이 이리와 같이 사나우며, 또한 최근 대마도사람인 우라베노 오또크소마로(卜部乙屎麻呂)가 신라에 구금되어 있다가 도망을 와, 신라병사들이 훈련을 받고 있다는 보고를 하였다. 그의 말을 참조한다면 대마도에 표착한 7명은 정탐을 하기 위해 일부러 표착하였다고 말하였을 가능성도 있지 않는가. 게다가 윤청 등은 오랫동안 일본에 머물면서 교역활동을 하였기 때문에 일본의 경비가 허술함을 잘 알고 있다. 따라서 지금 그들을 보낸다면 적에게 우리의 약함을 알려주는 것이다. 또한 다자이후에 거주하고 있던 많은 무리들도 겉으로는 귀화한 것처럼 행동하나 속으로는 언제나 역모를 품고 있어 만약 침입이 있으면 반드시 내응할 것이다. 따라서 바라옵기는 천장(天長) 원년(824) 8월 20일의 격지(格旨)에 의거하여 그들을 모두 무쯔(陸奧, 현재의 일본 동북지방)의 빈땅으로 이주시켜 그들의 간악한 마음을 끊도록 하십시오.”라고 하여, 이에 따랐다.
(『일본삼대실록(日本三代實錄)』 870년(정관 12년) 2월 20일조)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869년의 신라해적사건을 직접적인 계기로 하여 일본 지배층은 신라상인들을 탄압하여 무쯔(陸奧, 일본의 동북지방) 등으로 강제이주시켰으며, 다자이후에서 신라상인과 교섭을 가졌던 일본인 관인들과 호족층 조차도 모반사건에 연루시켜 추방령을 내렸던 것이다.

이러한 일본정부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신라인들은 『일본삼대실록』에 의하면 계속 일본에 가고 있다. 결국 신라인의 내일(來日) 내지는 표착이 870년대의 신라인 입국금지책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 양국간의 지역간 교류는 계속되어 왔으나, 일단 공식적인 일본지배층의 반응은 어느 경우에도 신라인을 모두 추방한다는 방침임을 엿볼 수 있다.

『일본기략(日本紀略)』과 『부상약기(扶桑略記)』에 의하면, 첫째, 신라해적의 습격은 893·894년에 집중해 있다는 점, 둘째로 그들은 처음에 마쯔우라(松浦)군·대마도(對馬島) 등 서해도(西海道)지역을 습격하였으나, 점차 산은도(山隱道)·산양도(山陽道)까지 북상하고 있다는 점, 셋째로 여전히 신라해적의 습격이 일본지배층에 상당히 심리적으로 위협을 주고 있다는 점등을 알 수 있다.

893년경부터 활발히 전개되기 시작한 신라해적의 움직임은 한반도에 있어서 후삼국시대의 국내사정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생각된다. 이에 대한 이유는 첫째로 이 시기 일본의 조정에서 의논된 견당사(遣唐使) 파견 정지의 문제와의 관련이며, 다른 하나가 실은 이쪽이 보다 중요하다고 생각되지만, 한반도의 국내정세의 현격한 변화이다.

당시의 조정에서 권력을 잡고 있던 일부분의 위정자에게 있어서, 신라해적의 습격을 강하게 의식시키는 요인이 존재하였으며, 그것이 결과적으로 893·894년의 신라해적이라는 돌출기사로서 나타난 것이 아닐까 한다. 환언한다면, 당시 일본 조정내에 있어서 귀족층의 의식이나 관념을 반영한 문제라고 생각되어진다.

830년대에 파견된 ‘承和견당사’의 예에서도 알 수 있듯이, 견당사에 임명되었다는 것은 생사의 기로에 서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며, 894년 ‘寬平견당사’로 임명된 사람들의 의식 속에도 당연히 그러한 관념이 있었다고 하여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고 하겠다. 따라서 그들이 당나라에 파견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고 한다면 하나의 수단으로서 신라해적 문제를 크게 부각시키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또 한가지, 해적습격이 일시적이었던 이유로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한반도의 정세 변화라고 할 수 있겠다. 892년부터 한반도의 혼란상태를 야기한 ‘재지세력(在地勢力)’ 또는 해상세력은 점차 고려와 후백제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으며, 그들은 후삼국간의 세력다툼에서, 특히 왕건과 견훤간의 해상전에 동원되었다. 그것이 관평기에 일본을 침입했던 해적집단이 감소된 또 하나의 이유라고 생각된다.

결국 후백제, 태봉(후고구려→고려), 신라에 의한 후삼국의 정립은 난립하던 해상세력의 재편을 요구하게 되었다. 각각의 해상세력들은 세 나라로 흡수 통합되어 간다. 하지만 후백제 지역에 있던 나주 오씨와, 영암 최씨는 왕건에게 협력하여 왕건의 나주공략에 적극 협조하게 된다. 이후 고려의 후삼국통일에 의해 중앙귀족화한 나주 오씨와 영암 최씨는 해상의 기반을 떠남으로서 서남해안의 무역활동은 소강국면으로 접어들게 된다.

해상세력 출신인 왕건은 누구보다도 무역에서 나오는 이익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후삼국통일후 무역에 관한 업무를 벽란도로 지정하여 통제함으로써 결국 무역에 대해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게 되었다. 이와 맞물려 북방유목민족국가인 요(遼)·금(金)·원(元) 등의 침략에 고전하던 송(宋)은 막대한 양의 전쟁 배상금(歲幣物)을 충당하기 위한 목적으로 외국무역을 정책적으로 장려하게 된다. 결국 중국(宋)의 적극적인 무역정책과 고려의 소극적인 자세는 동아시아 무역의 판도를 바꾸어 놓게 되었다.

요컨대 청해진의 혁파는 장보고에 의한 무역 독점의 해소를 의미한다. 청해진 혁파를 계기로 각지에 군소해상세력이 대두하게 되었고, 이들은 후삼국기를 거치면서 고려에 의해 통합되었다. 군소해상세력의 재편과 고려의 무역통제책, 중국의 무역장려책은 결국 무역의 주도권을 중국이 가지게 하였다.
출처 : Time is heals,,,
글쓴이 : 김민정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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