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생각

고구려에 수정성이 있다는 해동역사 기록.

영양대왕 2008. 3. 19. 18:09

한치윤의 해동역사는 고대사 연구에 있어서 보물과 같은 책이다.

이 책을 읽다가  발견한 글귀에 크게 눈이 떠진다.

고구려 왕궁 안에 수정성이 있다는 내용이다. 수정성이라. 다양한 상상을 가능하게 한다. 이제 다음 수순은 한치윤이 인용한

[양사공기]를 찾는 일일터. 한번 찾아보자. 이 글을 일고, 이 기사가 무조건 사실이라고 무모하게 인용하지 말라. 

역사 연구는 천천히 끈덕지게, 그리고 악날하게 진실을 찾아가는 과정이지, 하나 발견했다고 끝이 아님을....

해동역사(海東繹史) 제29권    

 

  궁실지(宮室志) 

  

성궐(城闕) 관부(官府), 정(亭), 관(館)을 붙임 

 

○ 진한(辰韓)에는 성책(城柵)과 가옥(家屋)이 있다. 《후한서》

○ 부여(夫餘)의 백성들은 토착 생활(土着生活)을 한다. 목책(木柵)을 둥글게 쌓아서 성(城)을 만들며, 궁실(宮室), 창고(倉庫), 뇌옥(牢獄)이 있다. 《상동》 ○ 《삼국지》에, “부여는 성책을 모두 둥글게 만들어서 마치 뇌옥과 같다.” 하였다.

○ 고려(高麗)는 오직 왕궁과 관부(官府), 불려(佛廬)만 기와로 덮었다. 《신당서》 ○ 삼가 살펴보건대, 고려는 바로 고구려이다.

 고구려의 왕궁 안에는 수정성(水晶城)이 있는데, 사방이 1리가량 되며, 날씨가 좋지 않아도 밝기가 대낮과 같다. 갑자기 성이 보이지 않으면 문득 월식(月食)이 일어난 것이다. 《양사공기(梁四公記)》

살펴보건대, 삼국(三國)의 궁실에 대한 자취가 중국인이 기록한 서책에는 보이지 않는다. 이에 지금 우리나라의 사서(史書)에 실려 있는 것을 상고하여 여기에 대충 기록한다. 고구려의 경우, 동명왕(東明王)이 구제궁(九梯宮)을 건립하였고, -평양(平壤)의 영명사(永明寺) 안에 있는데, 통한교(通漢橋), 연우교(延祐橋), 청운교(靑雲橋), 백운교(白雲橋) 등 4개의 다리가 있다.- 유리왕(琉璃王) 3년(기원전 17)에 양곡(涼谷)의 이궁(離宮)을 건립하였고, -동궁(東宮)과 서궁(西宮) 두 궁궐이 있어서 화희(禾姬)와 치희(雉姬)를 나누어 거처하게 하였다.- 22년(3)에 위나암성(尉那巖城)의 궁실을 건축하고서 도읍을 옮겼고, 29년(10)에 두곡(豆谷)의 이궁을 지었다. 산상왕(山上王) 2년(198)에 환도성(丸都城)의 궁실을 축조하여 도읍을 옮겼고, 동천왕(東川王) 21년(247)에 평양성(平壤城)의 궁실을 축조하고서 도읍을 옮겼으며, 고국원왕(故國原王) 13년(343)에 동황성(東黃城)의 궁실을 건축하고서 또 도읍을 옮겼다. -옛터가 평양의 목멱산(木覓山) 안에 있다.- 양원왕(陽原王) 8년(552)에 장안성(長安城)의 안학궁(安鶴宮)을 건축하였다. -평원왕이 옮겨 도읍한 옛터가 지금 평양부의 북쪽에 있는 구룡산(九龍山) 위에 있다.-

백제(百濟)의 경우는, 시조(始祖) 원년(기원전 18)에 위례성(慰禮城)의 궁실을 건축하고서 도읍하였고, 13년(기원전 6)에 또 한산(漢山)의 궁실을 건축하여 옮겼으며, 근초고왕(近肖古王) 26년(371)에 남평양성(南平壤城)의 궁실을 건축하였고, -진사왕(辰斯王), 개로왕(蓋鹵王), 문주왕(文周王) 세 왕이 중수하여, 모두 아주 장대하고 아름답게 꾸몄다.- 문주왕 원년(475)에 또 웅진(熊津)의 궁실을 건축하였고, 성왕(聖王) 16년(538)에 사비성(泗沘城)의 궁궐을 영건하여 도읍을 옮겼다. 또 신궁(新宮) -시조(始祖)가 건립하였다.-, 남궁(南宮) -고이왕(古爾王)이 이곳에서 정사를 보았다.-, 구원궁(狗原宮) -진사왕이 건립하였다.-, 임류각(臨流閣) -동성왕(東城王)이 건립하였다.-, 망해정(望海亭) -의자왕(義慈王)이 건립하였다.- 등이 있다.

신라(新羅)의 경우는, 시조(始祖)가 금성(金城)의 궁실을 영건하였고, 자비왕(慈悲王)이 명활성(明活城)의 궁실을 축조하였으며, 소지왕(炤知王)이 월성(月城)의 궁실을 건설하여서 모두 도읍하였다. 또 성남(城南)의 이궁(離宮) 및 요석궁(瑤石宮), 영창궁(永昌宮), 본피궁(本彼宮), 선천궁(善天宮), 월지궁(月池宮), 청연궁(靑淵宮), 병촌궁(屛村宮), 부천궁(夫泉宮), 갈천궁(葛川宮), 홍현궁(弘峴宮), 선평궁(善坪宮), 이동궁(伊同宮) 등이 있었고, -또 신궁(新宮), 회궁(會宮), 양궁(壤宮), 수궁(藪宮), 대궁(大宮), 양궁(梁宮), 예궁(穢宮)이 있었다.- 조원전(朝元殿), 강무전(講武殿), 임해전(臨海殿), 숭례전(崇禮殿), 서란전(瑞蘭殿), 평의전(平議殿), 동례전(同禮殿) 등의 전(殿) 및 망사루(望思樓), 명학루(鳴鶴樓), 월상루(月上樓), 의풍루(倚風樓) 등의 누(樓)가 있었으며, -또 고루(鼓樓)가 있다.- 천천정(天泉亭), 포석정(鮑石亭), 금송정(琴松亭) 등의 정자가 있었고, -또 남구당(南口堂), 월정당(月正堂)이 있다.- 문(門)에는 임해문(臨海門), 인화문(仁化門), 현덕문(玄德門), 무평문(武平門), 준례문(遵禮門) 등의 이름이 있었는데, 그 창건한 시기와 명명(命名)한 뜻은 모두 상세하게 알 수가 없다.

 

 

양사공기를 사고전서(四庫全書) 찾았더니 무려 52회나 등장한다. 

당장설이란 자가 만든 책인듯한데,  양나라 천감(502-519) 년간에  활동한 沈約(441-513)과도 관련이 있는 듯하다.

송사 예문지, 문헌통고 등에서 등장하는데,  그 내용이 다소 망녕하고 궤탄한 내용이 많다는 평을 받는다. 

그래서 52건을 찾아보니, 문제는 수정성이 고구려와 부상국 두 나라에 나온다는 사실이다.  

 

唐張說  梁四公記曰 梁天監中 杰公嘗與諸儒言 句麗國 王宫内 有水精城 可方一里 天未曉而明如晝城 忽不見其月便蝕

御定淵鑑類函 卷三百四十 居處部一居處總載 (居處總載城櫓) - 청나라 강희 49년에 만든 책인데, 청나라에서 한림원의 학사등을 동원해 십년 넘게 만든 책이다.   

梁四公記 扶桑王宫内 有水精城 天未曉而明如晝城忽不見其月便蝕

格致鏡原 卷九 大學士 陳元龍撰  坤輿 五  - 청나라 강희제 때 대학사를 지낸 진원룡이 찬술한 책이다. 

 

두 기록이 다르다.  분명 청나라 정부에서 만든 위 책이 더 신빙성이 높아보이기는 하는데, 단정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다시 더 찾기로 했다. 수정성을 검색해 보니 11건이 나왔다.  

예상한 것처럼 부상국과 구려(고구려)에 대한 두 기록이 서로 다른 책에 나왔다.

 

句麗國 蠶變小如中國蠶耳 其王宫内 有水精城 可方一里 天未曉而明如晝 城忽不見其月便蝕

說郛 卷一百十三上 元 陶宗儀撰  - 원나라 도종의가 편찬한 설부. 

梁四公記扶桑有水精城可方一里天未曉而明如晝城忽不見其月便蝕

玉芝堂談薈 卷十  明  徐應秋撰 - 명나라 서응추가 편찬한 옥지당담회.

扶桑王宫内 有水精城天未曉而明如晝城忽不見其月便蝕 四公記

廣博物志 卷七 明董斯張撰  - 명나라 동사장이 편찬한 광박물지.

 

여기서도 다시 원나라 기록과 명나라 기록이 다르다. 역시 원나라 기록이 시대가 앞서니 우선이다.

그래도 마음에 들지 않아 마지막 까지 찾으니, 드디어 나왔다.

 

句麗國 蠶變小如中國蠶耳 其王宫内有水精城可方一里天未曉而明如晝城忽不見其月便蝕

太平廣記 卷八十一  : 송나라 태종의 명으로 977년에 편찬된 500권의 분량을 자랑하는 책이다.

 

정답은 고구려가 맞았다. 그것도 태평광기에 기록된 것이다.

한치윤이 본 것은 태평광기는 아니다. 태평광기에는 양사공기가 직접 인용되어 잇지 않다.

그렇다면 한치윤은 태평광기 이후에 만들어진 책을 보고 썼을 가능성도 있고, 아니면 직접 양사공기를 보았을 수도 있다.

양사공기란 책이 보고 싶다. 이 책은 사고전서에도 실리지 않는 책이다. 찾아볼까.

한 가지 확인한 것은, 수정성에 대한 이야기는 부상국이 아닌, 고구려와 관련된 내용이라는 것이다.

비록 그 내용이 양사공기란 책이 신빙성에서 의심스럽고, 태평광기 역시 소설이나 괴담을 전문적으로 모은 책이라서 다른 사서에 비해 신뢰성은 떨어지는 책이라는 점이 아쉽기는 하지만, 충분히 소설 등에서는 사용이 가능하다고 본다.

앞으로 사료적인 측면에서 인용을 하려면, 분명한 전제 조건을 달고서, 제한적으로 사용을 해야 한다.

이런 이야기도 있다 정도로.

확실하게 고구려에 수정성이 있었다는 확증을 하려면, 좀 더 충분한 자료를 찾아야 한다. 가능성을 크게 열어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