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고구려와 신라 문제에 대해서 몇가지만.

영양대왕 2005. 12. 13. 12:59

최근 게시판에 올라오는 글들을 보면서, 카페지기로서 몇가지 꼭 언급해 두어야 할 말이 있군요.

 

우선 게시판에 올라오는 모든 글들이 다 학문적 엄밀성을 필요로 하는 글이 아님은 분명합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몇몇 글들에서는 조금만 신경써서 기초 자료를 조사하고 글을 썼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 글들이 있습니다.

 

몇가지만 언급하겠습니다.

1). 연개소문은 백제 부흥운동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러므로 지도자 자격이 없다. (3813번 글)

  -> 삼국사기 필부열전에 보면, 660년 11월 고구려가 신라 칠중성을 공격해 함락시킨 사건에 대해,

       신라가 당과 더불어 백제를 멸망시킨 것에 대한 보복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구려의 칠중성 공격으로 인해, 백제 부흥군은 숨통이 열려 사비성을 공격하는 등 일시 기세를 올릴 수가 있었습니다. 신라군이 백제 부흥군을 막는 군대를 이동시켜야 했기 때문이지요.

  -> 일본서기에 따르면 661년 왜국에서 고구려를 구하러 간 장수들이 백제 가피리 해안에서 배를 대고 불을 피웟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왜국이 고구려의 요청을 받고 백제 지역에서 활동한 사실의 단초가 보입니다.

    662년 3월 기록에는 고구려가 왜국에 구원을 요청하여, 장군과 군사들을 보내어 소유성에 웅거했다는 기록이 보입니다. 여기서 소유성은 주류성으로, 백제 부흥군의 거점이 됩니다. 즉 고구려가 백제 구원을 위해 일본에 적극적으로 파병요청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는 자료입니다.

    663년 5월 기록에는 견상군이란 자가 달려가 군사에 관한 일을 고구려에 보고하고 돌아왔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이것은 고구려와 왜국이 백제 부흥을 위해 공동 작전을 펼쳤음을 보여주는 기록이기도 합니다.

    이외에도 여러 방증들이 있습니다. 물론 고구려는 661년 여름부터 당나라 대군과 맞서 2차 고-당 전쟁을 662년 2월까지 치루어야 했기 때문에, 백제를 대규모로 도울 여력이 없었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무관심했던 것은 아닙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카페지기가 쓴 [새로쓰는 연개소문전], 바다출판사, 2003년, 242-251 쪽과, 정효운 저, [고대한일정치교섭사연구], 학연문화사, 1995년 책을 참고가 될 것입니다.

 

2) 신라 입장에서는 백제의 최대 경계였던 대동강 선에서 당과 협상을 한 것이죠. (중략)
    왕건을 중심으로 고려를 탄생시킴으로서 그 때부터 진실로 고구려가 우리의 역사로 편입된 시기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뒤 생긴 조선은 고려를 그대로 계승하였고 특히나 이성계가 지금의 함경도 지역(함흥)의 호족이었기 때문에 사실 상 신라 이후 북쪽의 고구려 후손들이 정권을 잡으면서 고구려가 우리의 역사로 편입되었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3809번 글)

 -> 이 글은 문제가 여러가지 인데, 영토를 중심으로 신라 계승론을 따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강원도는 대체 누구의 땅이었지요. 죽령과 조령 이북의 땅에 대해서는 신라인들의 생각은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아무런 생각이 없군요.

   시간을 극히 끊어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당시 죽령과 조령 이북, 즉 현재의 경기도와 강원도 땅은 모두 고구려 땅이었습니다. 삼국사기가 신라 중심으로 편찬되어 있고, 김부식이 신라정통론자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그의 인식 속에서는 현재의 경상북도의 2/3 이상이 옛 고구려 땅이었다고 보았습니다.

  삼국통일을 한 신라인의 입장에서는 단지 백제 영토를 차지한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옛 고구려의 영토, 즉 강원도와 경기도 일대 모두가 다 고구려 땅이었는데, 그것을 통일했다는 인식이 강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온달이 그토록 되찾고자 열망했던 땅. 연개소문이 신라에게 내놓으라고 했던 땅.

  그것을 신라가 영원히 갖게 되었는데, 그 업적에서 어찌 고구려를 배제할 수 있었을까요.

  이미 신라인의 마음 속에서는 고구려도 자신들이 통합했다는 인식이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한 국가가 자기 영역이라고 생각하는 연대는 시기별로 틀리지요. 고구려의 입장에서는 550년 이전의 영역, 즉 신라와 백제에게 한반도 중부지역을 빼앗기지 않은 상태를 자기 영역으로 생각했고, 신라는 그것을 차지한 후부터의 영역을 자기 영역으로 생각했습니다. 이때 교차하는 영역을 한쪽에서 영원히 차지하게 되었을 때(상대가 멸망함으로써) 그 지역에 대한 연고권은 주장하는 수준은 아주 달라지기 마련입니다. 신라인의 마음으로 돌아가 보지 못한 체로, 660년 경의 신라 영역만을 갖고 삼국통일에 대한 견해를 말하는 것은 다소 성급합니다.

  또한 645년 황룡사 9층 탑 건립에서 고구려(예맥)도 신라가 통합해야 할 나라로 명시한 만큼, 신라가 고구려에 대한 통일의지가 없었다고 보는 것은 잘못일 것입니다.

 

  또 변한이 가야이므로, 신라의 일통삼한은 백제, 가야를 통합한 것이라고 보는 것 또한 잘못입니다. 이미 신라에 입장에서는 가야는 통합한 지 100년이 흘렀습니다. 새삼스럽게 일통삼한에 가야가 들어갈 필요가 없었지요. 후대에 변한이 가야이고, 마한이 백제와 관련이 있다고 논증이 되었지만, 신라인(특히 최치원) 삼한인식에는 마한이 고구려, 변한이 백제라고 지금의 우리와 다른 인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비록 잘못 연결된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 그 시대 사람들의 생각임을 우리가 인식해야 합니다.

  삼국사기 문무왕 8년, 9년 기록에 등장하는 축문이나 조서는 사료적 가치가 특히 높은 것인데, 여기에 보면 아주 분명하게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려는 의지가 잘 드러나 있습니다.

  686년에 건립된 청주시 운천동 사적비의 경우에 民合三韓而廣地 라는 말이 등장하는데, 여기에 삼한은 고구려와 백제를 의미한다고 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서는 여러 참고자료들이 많은데, 이호영, [신라삼국통합과 려,제패망원인연구], 서경문화사, 1997년 에 수록된 <통일의식과 일통삼한 의식의 성장> 편 정도가 쉽게 볼 수 있는 자료가 될 것입니다.

 

** 카페 회원님들께 특별히 당부드리고 싶은 것은, 고구려와 신라 두 나라 가운데 누가 우리 역사의 주류나 아니냐는 논란은 현재 동북공정을 추진하고 있는 중국에게만 유리한 기회를 제공해준다는 점을 좀 인식해주셨으면 합니다.

  언젠가 한 회원님이 말씀한 바와 같이, 중국은 여러 종족이 합쳐진 복합민족국가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과거로 부터 단일민족의 역사인 것 처럼 자기 역사를 주장하고 있는 반면, 한국은 도리어 단일한 역사전통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순수한 핏줄, 적자가 누구냐는 주장에 따라 스스로 한국사의 폭을 좁혀가는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한번 생각해주셨으면 합니다.

  고구려를 높인다고, 신라를 폄하하는 것도 안될 일이지만, 신라를 내세우기 위해 고구려나 발해를 깍아내리는 것도 찬성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 모든 역사를 다 계승한 후손들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