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용글들

고제석 묘지명( 인용글)

영양대왕 2013. 7. 4. 15:41

당나라서 태어난 고구려 이민자 2세 묘지명 발견


고구려 이민자 2세 고제석 묘지명

고구려 요동성 대수령 증손녀

(서울=연합뉴스) 신창용 기자 = 당(唐)에서 태어나 고구려인과 혼인한 고구려 이민자 2세의 묘지명(墓誌銘)이 새롭게 발견됐다.

김영관 제주대 사학과 교수는 5일 '고구려 유민 고제석(高提昔) 묘지명에 대한 연구' 논문을 통해 고제석 묘지명을 학계에 최초로 소개했다.

이 묘지명은 청석(靑石)으로 만든 정방형 모양의 개석(蓋石·가로 38×세로 38㎝)과 지석(誌石·가로 38×세로 38㎝)이 한 조를 이룬다.

지석에는 대당(大唐) 우효위(右驍衛) 영녕부(永寧府) 과의 도위(果毅 都尉) 천부군(泉府君)의 돌아가신 부인 고씨의 묘지라고 쓰여 있다.

고구려 국내성 출신의 고씨로 이름은 제석인 묘주는 649년에 태어나 당 고종(高宗) 함형(咸亨) 5년인 674년 6월 4일에 내정리(來庭里)의 사제(私第)에서 2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내정리는 지금의 중국 서안 기차역 남쪽으로 서안성벽의 안쪽에 해당한다.

고구려 이민자 2세 고제석 묘지명

김 교수는 묘지명의 기록과 고구려·당의 전투가 담긴 '삼국사기'(三國史記) 고구려본기를 토대로 고제석의 조부인 지우(支于)가 당 태종(太宗) 정관(貞觀) 19년(645) 요동성(遼東城) 전투 때 군사를 거느리고 항복했다고 분석했다.

그는 고지우의 고구려에서 관직이 기록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부친인 고복인(高伏人)이 요동성 대수령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요동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을 것이라고 부연했다.

그는 "고제석의 조부인 지우가 당에 투항한 것이 645년이 분명하므로 묘주인 고제석은 고구려에서 태어나 자라다가 당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다. 고제석은 부친이 당에 들어간 뒤인 649년에 태어난 고구려 이민자 2세가 되는 것이다"고 설명했다.

눈여겨볼 점은 고제석이 비록 고구려 멸망 이전인 649년에 조부와 부친이 당 태종에 투항해 당으로 이주하고 나서 태어나기는 했지만 묘지명에는 고구려인이라는 의식이 분명히 드러나 있다는 사실이다.

다른 묘지명에서 볼 수 없는 '국내성인'이라고 적혀 있는 것은 그 예다. 게다가 고제석의 조부의 관력에 대해 '당나라의 이주자사(易州刺史)를 지냈다'고 기록한 것도 눈길을 사로잡는다.

'이주자사'를 지냈다고 하면 될 것을 굳이 '당이주자사'(唐易州刺史)라고 기록해 '당'에서 '이주자사'를 지냈다고 밝힌 것이다.

김 교수는 "이는 고제석 가문이 비록 당에 투항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의도한 것이 아닌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는 것을 드러내는 표현으로 받아들이기에 충분할 것이다"고 해석했다.

고구려 유민 고제석 묘지명 공개 (서울=연합뉴스) 최근 발견된 고구려 유민 고제석의 묘지명 중 본문인 지석(誌石). 2013.6.5 << 김영관 제주대 교수 제공 >> changyong@yna.co.kr

이러한 상황은 고제석의 혼인 관계를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고 김 교수는 지적했다. 당에 들어가서 굳이 천씨 가문과 혼인을 한 것은 당에 동화되지 않으려는 의식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고구려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고씨 집안은 고구려의 명문 귀족인 천씨와의 혼인을 택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풀이했다.

김 교수는 "사실 왕성인 고씨 가문이 고구려 말기의 최고 귀족인 천씨 가문과 혼인을 한 기록은 거의 찾을 수 없었다. 두 가문이 혼인관계를 맺었다는 확실한 증거가 바로 고제석 묘지명"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는 지금까지 고구려 말기 왕족과 최고 귀족가문과의 혼인 관계를 추정만 했을 뿐 확정하지 못하고 있었던 상황에서 명백한 자료가 된다"면서 "이들 두 가문의 혼인은 고구려 멸망 전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지만, 왕족 고씨와 당대 최고 집권귀족세력인 연개소문 가문과의 혼인을 뜻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김 교수는 이 논문을 8일 대전 한밭대에서 열리는 '제133회 한국고대사학회 정기발표회'에서 발표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