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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태왕의 위대한 길 (대구일보) 소개

영양대왕 2011. 8. 10. 14:37

정복 군주 광개토대왕, 진정한 꿈은 무엇이었나

외세의 침략이 유난히 많았던 우리 역사에서 유독 눈에 띄는 군주가 있다. 고구려 광개토태왕이다. 18세에 즉위해 39세로 세상을 뜰 때까지 그는, 동으로는 연해주 서로는 중원에 육박하고 남으로는 김해에 이르렀던 대제국을 이뤘다. 제국을 연 왕이라는 의미의 태왕으로 불리는 이유다.
19세기 후반까지만 하더라도 광개토태왕은 평범한 고구려의 왕으로 기억되고 있었다. 그러나 20세기를 거치면서 그는 한국 역사상 최고 영웅으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그를 재발견하게 된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광개토태왕릉비’의 발견이었다. 1883년 일본 육군 참모본부의 밀정 사코 가게아키 대위는 만주 지역을 정탐하던 중 광개토태왕릉비를 발견한다. 그리고 그는 비문을 탁본을 만들어 일본으로 가져간다.
그 후 1905년 ‘황성신문’에 ‘광개토태왕릉비문’ 내용이 보도됐고, 단재 신채호 등의 연구, 1972년 ‘일본 참모본부 비문 조작설’로 비롯된 학술 논쟁, 1980년대의 민족주의 사학 열풍, 2002년 시작된 중국의 동북공정, 2007년 광개토태왕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TV 드라마 ‘태왕사신기’ 방영 등을 거치면서 그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은 지속적으로 높아져만 갔다.
고구려 역사 전문가로 최근 ‘광개토태왕의 위대한 길’을 펴낸 김용만 우리역사문화연구소 소장은 “이 같은 지나친 유명세 때문에, 오히려 광개토태왕의 진면목이 제대로 알려지지 못했던 면이 있다”고 말한다. 광개토태왕의 업적 가운데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물론 정복 활동이지만, 그것이 오히려 그의 업적을 한정 짓게 해 그가 이룬 다른 성과들이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 왔다는 설명이다.
저자에 따르면 광개토태왕은 정복 군주라는 타이틀을 얻기 위해 전쟁터에 나선 것은 아니었다. 고구려 사람이 주변의 적들로부터 자존심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는 평화롭고 강력한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전쟁이 필요했을 뿐이다.
정복 활동의 결과 고구려의 영토는 크게 늘어났고, 늘어난 영토는 곧 식량 생산의 증대로 이어져 백성의 수가 증가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또 고구려의 구민뿐 아니라 새롭게 편입된 주변의 다양한 종족을 다스리는 나라가 되었다. 그렇게 고구려는 하나의 왕국이 아니라 제국으로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광개토태왕의 정복 활동이 일단락된 후, 고구려는 5∼6세기에 걸쳐 오랜 기간 평화와 안정을 누릴 수 있었다.
고구려는 광개토태왕의 정복 활동으로 획득한 포로, 가축, 농경지, 목초지, 삼림 등을 경제적 기반으로 삼아 이후에 주변 나라들의 정치, 경제, 문화, 기술, 외교의 중심국이 될 수 있었다. 이러한 점 때문에 광개토태왕을 ‘고구려 역사의 새 길을 연 군주’로 평가할 수 있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이 책은 광개토태왕이 왜 정복 활동에 나서게 되었고, 그가 정복 활동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지, 그리고 그가 이룬 성과와 의미를 알기 위해 고구려인의 입장, 광개토태왕의 입장, 상대방의 입장에서 그 시대를 돌아봤다. 정복 군주라는 단편적인 면만 부각된 광개토태왕이 어떤 인물이고, 그의 진정한 꿈은 무었이었으며, 그것이 어떻게 고구려 역사를 바꿔갔는지 확인할 수 있다.
김도훈 기자 hoon@idaegu.com

김용만 지음/역사의아침/392쪽/1만5천원.

외세의 침략이 유난히 많았던 우리 역사에서 유독 눈에 띄는 군주가 있다. 고구려 광개토태왕이다. 18세에 즉위해 39세로 세상을 뜰 때까지 그는, 동으로는 연해주 서로는 중원에 육박하고 남으로는 김해에 이르렀던 대제국을 이뤘다. 제국을 연 왕이라는 의미의 태왕으로 불리는 이유다.
19세기 후반까지만 하더라도 광개토태왕은 평범한 고구려의 왕으로 기억되고 있었다. 그러나 20세기를 거치면서 그는 한국 역사상 최고 영웅으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그를 재발견하게 된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광개토태왕릉비’의 발견이었다. 1883년 일본 육군 참모본부의 밀정 사코 가게아키 대위는 만주 지역을 정탐하던 중 광개토태왕릉비를 발견한다. 그리고 그는 비문을 탁본을 만들어 일본으로 가져간다.
그 후 1905년 ‘황성신문’에 ‘광개토태왕릉비문’ 내용이 보도됐고, 단재 신채호 등의 연구, 1972년 ‘일본 참모본부 비문 조작설’로 비롯된 학술 논쟁, 1980년대의 민족주의 사학 열풍, 2002년 시작된 중국의 동북공정, 2007년 광개토태왕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TV 드라마 ‘태왕사신기’ 방영 등을 거치면서 그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은 지속적으로 높아져만 갔다.
고구려 역사 전문가로 최근 ‘광개토태왕의 위대한 길’을 펴낸 김용만 우리역사문화연구소 소장은 “이 같은 지나친 유명세 때문에, 오히려 광개토태왕의 진면목이 제대로 알려지지 못했던 면이 있다”고 말한다. 광개토태왕의 업적 가운데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물론 정복 활동이지만, 그것이 오히려 그의 업적을 한정 짓게 해 그가 이룬 다른 성과들이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 왔다는 설명이다.
저자에 따르면 광개토태왕은 정복 군주라는 타이틀을 얻기 위해 전쟁터에 나선 것은 아니었다. 고구려 사람이 주변의 적들로부터 자존심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는 평화롭고 강력한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전쟁이 필요했을 뿐이다.
정복 활동의 결과 고구려의 영토는 크게 늘어났고, 늘어난 영토는 곧 식량 생산의 증대로 이어져 백성의 수가 증가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또 고구려의 구민뿐 아니라 새롭게 편입된 주변의 다양한 종족을 다스리는 나라가 되었다. 그렇게 고구려는 하나의 왕국이 아니라 제국으로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광개토태왕의 정복 활동이 일단락된 후, 고구려는 5∼6세기에 걸쳐 오랜 기간 평화와 안정을 누릴 수 있었다.
고구려는 광개토태왕의 정복 활동으로 획득한 포로, 가축, 농경지, 목초지, 삼림 등을 경제적 기반으로 삼아 이후에 주변 나라들의 정치, 경제, 문화, 기술, 외교의 중심국이 될 수 있었다. 이러한 점 때문에 광개토태왕을 ‘고구려 역사의 새 길을 연 군주’로 평가할 수 있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이 책은 광개토태왕이 왜 정복 활동에 나서게 되었고, 그가 정복 활동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지, 그리고 그가 이룬 성과와 의미를 알기 위해 고구려인의 입장, 광개토태왕의 입장, 상대방의 입장에서 그 시대를 돌아봤다. 정복 군주라는 단편적인 면만 부각된 광개토태왕이 어떤 인물이고, 그의 진정한 꿈은 무었이었으며, 그것이 어떻게 고구려 역사를 바꿔갔는지 확인할 수 있다.
김도훈 기자 hoon@idaegu.com

김용만 지음/역사의아침/392쪽/1만5천원.

기사 입력시간 : 2011-07-31 21:0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