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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요서 경략에 대한 잡생각

영양대왕 2010. 10. 24. 23:40
백제의 요서(遼西) 경략을 역사에서 지우려하지 마라 / 이도학 한국전통문화학교 한국고대사 교수

 

방금 인터넷에서 우연히 이도학 선생님의 칼럼을 검색해봤다.

오늘 서울신문에 실린 칼럼인데, 오랜만에 신문에서 보는 역사 관련 칼럼이라서 한번 들여다봤다.

그런데 그 안에 일부 생각해야 할 부분이 있어서 몇 자 적으려 한다.

 

한반도를 공간적 범위로 해서 고구려와 자웅을 겨루던 백제가 무대를 바꿔 요서 지역에 진출하게 된 것은 양국 간의 전쟁과 역학 구도가 국제성을 띠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광개토왕릉 비문에 보이는 신라 구원을 명분으로 한 400년 고구려군 5만명의 낙동강유역 출병도 기실은 백제의 사주를 받은 왜 세력의 신라 침공이라는 유인책의 덫에 걸린 것이었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후연(後燕)이 고구려의 배후를 기습하여 서쪽 700여리의 땅을 일거에 약취하고 말았다. 고구려의 낙동강 유역 진출은 이로 인해 실패로 돌아갔다.

 

─ 이도학 선생님은 고구려의 낙동강 유역 진출을 실패로 보고 계신다. 혹시 다른 논문이나 책에서 이런 얘기를 하신 적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암튼 처음 보는 견해라서 눈에 띈다(다른 학자들 중에도 이런 얘기를 하는 사람이 있나 모르겠다). 

 

단순히 낙동강에 진출해서 얻은 영토가 없는 반면에 후연에게 서쪽 700리의 땅을 뺏겼으니 이건 실패다.

 

정말 이도학 선생님이 이렇게 단순하게 생각하셨는지 의문이 갈 정도다. 당시 고구려가 영토확보를 위해서 낙동강에 진출한 것이 아닐텐데, 후연에게 뺏긴 서쪽 700여리의 땅 때문에 실패라고 하는 것은 조금 의문이다. 당시 상황을 살펴보면 고구려에게 겁나 두들겨 맞은 백제는 풍비박산 난리가 나고, 한강 유역까지 고구려의 입김이 닿게 된다(조금 편년이 이른 보루들은 이때 임시적으로 설치한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장수태왕때처럼 금강 지역으로 백제 지도층이 대거 이주하지는 않았지만, 백제왕의 동생과 대신들이 대거 잡혀갈 정도로 당시 백제가 입은 타격은 결코 작지 않았다(장수태왕이 명해 만든 광개토태왕릉비에 자랑스럽게 적힌 공파당한 성의 갯수 한번 살펴봐라. 결코 작은 타격이 아니다). 그 상황에서 백제는 한반도 내의 금강 유역, 영산강 유역, 낙동강 유역, 일본 열도 내의 모든 전력을 총동원해서 고구려와 싸웠는데, 그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 바로 낙동강 유역에서 신라와 관련해 일어난 왜인 출몰 기사가 아닐까 싶다.

 

여기서부터가 중요하다. 신라는 고구려에 왜인들을 몰아달라고 요청을 했다. 왜인들의 존재나 그들이 낙동강 유역에 출몰한 원인(혹자는 그들이 왜군 혹은 왜구로서 신라를 약탈하기 위해 왔다고도 하며, 어떤 이는 고구려의 남침으로 인한 충격에 밀려 일본 열도로 이동하는 백제인들의 유민집단으로 보기도 한다. 뭐 어쨌든, 둘 다 맞는 말이라 생각한다. 엄청난 집단이 떼거지로 몰려 다니면서 지나가는 곳을 폐허로 만들다시피 약탈하고, 힘이 약한 대상을 만나면 아예 점령해 버리는 일이 허다하게 일어났지 않은가? 그렇게 보면 두 견해는 적절히 조화해서 이해하면 될 듯 싶다)은 일단 제쳐두고 보자. 중요한 것은 이미 392년에 실성을 고구려에 인질로 보내고 고구려의 보호국으로 들어간 신라가 자국의 보안과 관련된 부탁을 청해왔다는 사실이다. 다 허물어져가는 명나라가 뭣하러 미쳤다고 겨우겨우 없는 병력 짜내서 조-일전쟁 당시 조선을 구원해 줬겠는가(그렇게 왔으니 외국 군대의 폐해가 여기저기 장난이 아니었지만). 바로 보호국의 요청을 들어줌으로써 고구려의 천하를 유지하려고 했던 것이다.

 

낙동강 유역 400년 '경자대원정' 당시 고구려가 보기 5만이라는 대군을 동원한 것만 봐도 그렇다. 필자가 주욱 보면 당시 고구려가 보기 5만이라는 대군을 동원한 것을 두고, 그 숫자에 주목하는 경우가 많다. '우와! 이렇게나 많이 보냈어? 한반도에서 이런 대군이 동원된 전투는 별로 없는데~' 등등의 시각으로 말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왜!!!' 고구려가 5만이나 되는 보기군을 보냈을까? 이다. 알다시피 장수태왕이 한성을 함락하고 개로왕을 목 벤 뒤에 한반도 중부까지 쑤욱~입맛을 다셨을 때에도 3만이 동원되었다. 물론 기습전이라는 것과, 어느 정도 제한전으로 볼 수 있는 여지가 있지만 그래도 일국의 도성을 정벌하러 떠났던 원정군보다도 많은 규모의 군대가 동원되었다는 것은 의미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한다. 이는 정치적으로 보호국인 신라에 대해 상국인 고구려가 가진 힘을 보여주기 위함이며, 실질적으로는 당시 신라의 요청을 한번에 깔끔하게 처리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싶다.

 

장수태왕 시절 고구려는 신라의 수도 금성에 '신라토내당군'(요즘으로 치면 주한미군) 100여 명을 주둔시켰다.『일본서기』를 보면 신라가 이들부터 척결하면서 중흥의 기치를 들어 올렸음을 잘 알 수 있다. 암튼, 이걸 볼때마다 늘 느꼈던 의문이다. 과연 저 신라토내당군은 언제부터 금성에 주둔했을까? 그리고는 아마 광개토태왕 시절, 경자대원정에서 고구려가 낙동강 유역까지 대군을 휘몰아 간 이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왜냐하면, 광개토태왕이 5만이나 대군을 동원했다는 것은 그만큼의 병력이 동원되어야 할만큼 당시 한반도 남부의 상황이 혼란스러웠다는 의미가 될 수 있다. 왜인들이 병력이든, 폭도든, 난민이든 신라 스스로 감당이 안 될 정도였다면(아무리 신라가 당시 약소국이었다고 해도), 그 수는 수만명, 아니 십만 이상의 엄청난 규모였을지도 모른다. 당연히 고구려는 대군을 동원했을 테고 그 지역의 문제를 잘 처리한다. 그리고 이윽고 신라 수도 금성에 정말 소수의 병력만 남겨두고 철수했던 것은 아닐까 싶다. 안정된 지역에 대군을 오래도록 상주시킬 필요는 없었으니 말이다. 또한 이 정도면 신라에 대한 감시 및 간섭도 충분히 할 수 있을테고(실제 눌지마립간 즉위시 고구려는 내정간섭을 실시하지 않았는가), 인계철선의 기능을 수행하는데도 충분했을 것이다.

 

즉, 당시 고구려 수뇌부에서 후연의 침공에 대해 몰랐다, 대비를 못 했다, 그냥 땅을 홀랑 뺏겼다~는 식의 생각은 수정이 요구되는 사안이라 생각한다. 고구려 군사정책입안자들과 정보 취급 관계자들은(딱히 적절한 명칭이 생각이 안 나네요) 신라, 왜, 백제, 후연 등 주변 국가에 대해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을테고, 그에 따른 적절한 대응을 했을 것이다. 당연히 그 최고 결정권자는 광개토태왕이었고 말이다. 실제 400년 2월에 후연은 남소성, 신성 2개의 성과 주변 700여리의 땅을 빼앗고 그곳에 주민 5천여호(2만 5천명이면 엄청난 규모일 듯)를 이주시켜 놨는데, 불과 2년 뒤에는 고구려군이 연의 수비군을 공격하고, 평주자사 모용귀가 성을 버리고 도망갔다고 한다. 다시 2년 뒤에는 군대를 보내 연나라를 공격하고, 그 이듬해에는 연왕 모용희가 요동성을 공격했으나 이를 막아냈다. 즉, 고구려는 후연의 공격에 대한 충분한 대응을 했고, 오히려 후연의 영토를 차지해 갔음을 알 수 있다. 만약 고구려가 당시 5만이라는 대군을 남으로 돌리지 않고, 몇년 일찍 후연과 다퉜다면, 그로 인해 보호국 신라의 요청을 무시했다면?

 

그런 일이 일어났다면, 결과는 불 보듯 뻔했을 것이다. 고구려는 실질적으로 보호국을 잃을 것이며, 명분상으로 독자적인 천하를 유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이는 한반도 남부에서 고구려의 정치적 거점을 잃는다는 의미도 됐을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됐다면 그거야말로 큰 실패가 아니었을까?

 

당시 백제는 왜 · 후연과 연계하여 고구려와 신라에 맞서고 있었다. 400년 이후 후연과 고구려는 요동 지역의 지배권을 놓고 사투를 벌였다. 그렇지만 후연은 고구려에 시종 밀리고 있었을 뿐 아니라 대릉하 방면의 숙군성까지 빼앗겼고, 심지어는 지금의 베이징인 연군(燕郡)까지 공격을 받았을 정도로 수세에 놓였다. 다급한 후연이 고구려의 앙숙인 백제에 지원을 요청함에 따라 백제군은 요서 지역에 진출해서 고구려의 서진(西進)을 막고자 했다.

 

─ 어?! 무시할 수 없는 문구가 나왔다. 후연의 요청에 의해 백제군이 요서에 진출했다!! 앗! 이건 바로 논문이나 관련 연구성과를 뒤적거려야만 하는 중대 사안이다! 정말 이도학 선생님은 이렇게 생각하신단 말인가?? 혹시 관련 근거가 뭐가 있나? 아니면 기존의 생각과 다른 새로운 해석을 하신 것 뿐인가? 이 부분 보고 급흥분!

 

그런데 그 직후 붕괴된 후연 정권의 후신이자 고구려 왕족 출신인 고운의 북연 정권은 408년에 고구려와 우호관계를 맺었다. 돌변한 상황에 후연을 지원할 목적으로 요서 지역에 출병한 백제군의 입장이 모호해졌다. 결국 백제군은 기왕에 진출한 요서 지역에 대한 실효 지배의 과정을 밟게 되었다. 그 산물이 요서 지역의 진평군이었다. 그러고 보면 ‘고구려가 요동을 경략하자 백제는 요서를 경략했다.’는 구절은 정확한 기록인 것이다. 488년과 490년에 백제가 북위의 기병 수십만의 침공을 격퇴하고 해상전에서 승리한 전쟁은 진평군을 에워싼 전투가 분명하다고 본다.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 요서 지역의 진평군은 북중국을 통일한 북위 정권이 들어선 이후에도 존속했던 것 같다.

 

─ 북연이 들어섬으로써 이미 요서에 진출한 백제군의 입장이 모호해지자, 백제군은 실효 지배의 과정을 밟았다! 라고 한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요서 지역의 진평군이고 말이다. 기존의 대륙백제에 대해 연구한 견해들과 연대도 약간 달랐던 것 같다.

 

그런데 여기까지 읽고 가만히 생각해 봤다. 위의 견해는 아무래도 당시 국제 정세를 이도학 선생님이 새롭게 해석하신 것으로 보인다(이도학 선생님이 이전부터 이런 견해를 표명하셨거나, 다른 연구자도 이런 얘기를 했다면 필자가 못 봤던 것이니 본인의 무능함을 탓해 주시길...). 이런 주장은 뭐 얼마든지 나올 수 있는 근거 중의 하나다. 그러나 얼마나 탄탄한 근거와 논리로 무장하느냐에 따라 그 견해가 얼마나 힘을 얻을 수 있는지가 결정된다. 그렇게 봤을때 요 몇줄의 칼럼 갖고 뭐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위의 글들은 좀 더 신중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백제사의 권위자인 이도학 선생님이 이런 얘기를 했다니, 한편으로는 반갑기도 하고 좋기도 하다. ㅋ 이에 대해서 필자가 직접적으로 진지하게 고민해 본 적은 없지만, 어쨌든 필자가 생각하는 방법론은 변함이 없다. 중국 땅 안의 백제 영역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현지 발굴을 하는 것이 가장 좋지만(물론 백제인들이 현지에서 현지 물품을 사용했다면 어떻게 확인할 수가 있느냐?! 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백제가 수십년간 그 곳을 점유했고, 그 곳에서 살았다면 백제의 토기나 철기 등이 분명히 확인될 것이다. 고구려가 50여 년동안-80년이라는 사람도 있고, 100년이라는 사람도 있고 뭐 일단 여기에서는 가장 최근 학설인 50년을 언급하겠다- 한강 유역을 점유했지만, 한강 유역에서는 지금 중국 본토에서 확인된 것보다도 많은 양의 토기들이 확인되고 있다) 그게 사정이 여의치 않으니, 일단 Pass! 그 다음에 생각할 부분은 중국 동해안(요서가 됐든, 산동지방이 됐든)의 역사지리를 살펴봐야 할 것이다. 사서의 한줄 한줄을 꼼꼼히 분석하고, 기록의 공백지대는 없는지 등등을 살펴봐야 할 것 같다. 하지만 필자가 알기로 국내 학자들 중에 그렇게 세심하게 중국 사료를 분석한 사람은 없는 것 같다. 마침『자치통감』역주본이 세상에 나와 무식한 필자도 원사료를 마음껏(?) 볼 수 있기에 그런 작업을 좀 해 보려고 생각 중인데 아직 제대로 공부하지는 않았다.

 

암튼, 백제의 요서 경략에 대해서는 쉽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도학 선생님의 이런 발언이 어떤 학문적 근거가 있는 건지도 찾아봐야겠다. 완전 궁금!!!

출처 : 뿌리아름역사동아리
글쓴이 : 麗輝 원글보기
메모 : 이도학 선생님의 글을 부넉 비판한 글이라서 인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