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6년부터 미륵사지에 대한 발굴작업이 시작됐다. 그리고 미륵사에 대한 연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동양최대의 가람이었던 미륵사지. 하지만 발굴되기 전, 미륵사는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발굴이 시작되면서 미륵사의 가치가 새로워지기 시작했다. 미륵사지 발굴작업은 지금도 우리 발굴사에 한 획을 긋는 획기적인 발굴로 남아있다. |

미륵사지에서 가장 많이 출토된 것은 기와다. 기와는 사찰이름이 새겨진 것부터 고려, 조선시대의 기록이 새겨진 명문 기와까지 무려 수십만 편에 이른다. 이 유물들을 통해 미륵사가 조선시대까지도 사찰로서의 기능이 남아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발달하고 세련된 청동유물도 다량 출토됐다. 토기 그리고 유리로 만든 장식품까지 발굴기간 동안 미륵사지에선 모두 6천여 점의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미륵사가 얼마나 대가람이었는지 그 규모를 알 수 있는 증거다.

미륵사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3탑 3금당 형식이다. 사찰은 탑 하나에 금당이 하나 또는 3개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미륵사는 탑 3개에 금당 3개를 갖춘 형식으로, 어느 사찰에도 없는 독특한 형식을 하고 있다.

미륵사지가 중요한 또 다른 이유는 유일하게 남아있는 미륵사탑의 조형적 가치 때문이다. 목탑의 양식으로 쌓은 최초의 석탑. 미륵사탑은 백제인의 예술적 감각을 엿볼 수 있는 아름다운 석탑이다. 또한 1,400년 전 대가람이었던 미륵사의 규모를 말해주는 상징적인 탑이기도 하다. (5. 목축양식의 미륵사탑 참조)
현대적인 건설장비를 사용한다 해도 쉬운 작업이 아닐 만큼 석탑에 사용된 석재는 크고 다양하다. 그렇다면 가장 큰 석재의 무게는 어느 정도일까? 석재의 무게는 무려 2t이 넘었다. 1~2t이나 되는 큰 돌들을 한 두 개도 아니고 2천여 개나 균형있고 정교하게 쌓아 올린 비결이 어디에 있을까?
고대에 무거운 돌을 쌓는 가장 일반적인 방식은 흙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원하는 높이까지 흙을 쌓은 다음 그 위로 돌을 굴려 올리고 나중에 흙을 제거하는 방법이다. 그렇다면 미륵사탑도 이런 방법으로 쌓았을까?
그 단서는 탑에서 발견된 일정한 모양의 초석에 있다. 알파벳 H자형의 초석으로 동서탑 남쪽 앞에서 똑같은 모양의 초석이 발견된 것이다. 그러나 유례가 없는 일이다 보니 처음에 그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었다.
H자형 초석이 발견된 곳은 동서탑 모두 기단 남측이었다. 혹시 탑을 쌓을 때부터 있었던 초석은 아닐까? 고건축전문가인 배병선 교수(한국전통문화학교 건축학)는 이 초석의 정체가 뭔가를 설치했다 철거한 흔적이며 그게 바로 일종의 '기중기'일거라고 주장한다. 초석의 배열형태를 통해 당시 사용했을 기중기의 구체적인 모양까지 추정해 냈다. 두 개의 간대를 연결하고 맨 위에 도르래를 달아 석탑의 석재를 끌어올렸을 거란 것이다.
그렇다면 1,400여 년 전에도 '도르래'가 있었을까? 대구박물관에는 그 당시 도르래가 있었다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귀중한 유물이 있다. 경북 풍기에서 발견된 통일신라시대의 용두보당(龍頭寶幢). 이 용의 입속에 가장 초보적인 기중기 형태인 도르래가 들어 있다.
용두는 사찰 입구, 당간 끝에 올리는 것으로 도르래를 통해 사찰의 깃발을 끌어올렸던 것이다.
황해도에 있는 안악 3호분 내부에는 고구려미술의 아름다움을 엿볼 수 있는 화려한 벽화들로 가득 차 있다. 그런데 고구려의 생활상을 그린 벽화 한쪽에 눈에 띄는 그림이 있다. 우물도다. 이 우물도 그림에서 물을 끌어올리기 위한 장치인 도르래를 사용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미륵사탑에 사용된 기중기는 어떤 형태일까? 수원화성(華城)은 정조 때 축조된 성으로 성을 쌓을 때 여러 형태의 기중기가 사용된 것으로 유명하다.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에는 수원화성을 쌓는데 이용된 기중기들이 그림과 함께 자세히 실려 있다.
특히 '녹로'는 도르래를 이용해 무거운 것을 위로 간단히 들어 올리는 기중기의 일종으로 조선시대 건축에 가장 자주 사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녹로의 바닥구조가 미륵사탑에서 발견된 H자형 초석 형태와 거의 일치한다. 바로 이 기중기 형태가 미륵사탑 축조에 사용됐다는 것이 배병선 교수의 주장이다.
H자형 초석을 통해 복원한 백제시대의 기중기다.
그런데 H자 초석에서 6m가량 떨어진 곳에서, 석재를 들어 올리고 기중기의 간대를 상하로 움직이는데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4개의 목심(木心) 유구가 발견됐다.
이 기중기는 돌을 위로 끌어올리는 기능뿐 아니라, 좌우로까지 움직이는 발전적인 형태의 기중기였다. 다시 말하면, H자 초석을 통해 복원한 백제의 기중기가 조선시대의 녹로보다 한발 앞선 형태의 기중기라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