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용글들

[스크랩] 천단에서 본 명나라 역대 황제 초상

영양대왕 2012. 1. 14. 10:32

Emperors of the Ming Dynasty

 

 

천단 재궁에 들어갔을 때, 이곳 천단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냈던

역대 명나라와 청나라 황제들의 초상이 전시되어 있길래

열심히 찍었다.

이게 다 블로그 때문..여행을 온건지 사진을 찍으러 온건지..ㅋ

그래도 내가 중국 역사에 관심이 좀 있는지라

명.청 역대황제들의 모습에 묘한 매력을 느낀다.

 

 

영락제(永樂帝, Yongle Emperor, 1360년 5월 2일 ~ 1424년 8월 12일)는 명 왕조의 제3대 황제(재위 1402년~1424년)이다.

명나라의 기틀을 다지고 최고 전성기를 이룬 황제이다.

묘호는 태종(太宗)이었다가, 훗날 가정제 때 성조(成祖)로 고쳤으며,

시호는 계천홍도고명조운성무신공순인지효문황제(啓天弘道高明肇運聖武神功純仁至孝文皇帝)이다.

이름은 주체(朱棣), 명 태조 홍무제의 4남이며 어머니는 효자고황후 마씨이다.

 

이곳 천단은 영락제가 북경으로 천도한 후 건설되었기 때문에,

남경에 수도를 정했던 명나라 태조 주원장과 영락제의 의해 쫒겨난 건문제의 초상은 이곳에 없었다.

 

 

홍희제(洪熙帝, Hongxi Emperor 1378년 8월 16일 ~ 1425년 5월 29일)는 중국 명나라의 제4대 황제(재위 1424년~1425년)이다.

이름은 주고치(朱高熾)이다. 묘호는 인종(仁宗), 연호는 홍희(洪熙)이다.

홍무제(명태조 주원장)의 손자이며, 영락제와 인효문황후 서씨(仁孝文皇后 徐氏)의 장남이다.

 

 

선덕제(宣德帝, Xuande Emperor, 1399년 2월 25일 ~ 1435년 1월 31일)는 중국 명나라의 제5대 황제(재위 1425년~1435년)이다.

이름은 주첨기(朱瞻基)이다. 묘호는 선종(宣宗), 연호는 선덕(宣德)이다.

영락제의 장자인 홍희제(洪熙帝)와 성효소황후 장씨(誠孝昭皇后 張氏)의 장남이다.

 

 

정통제 / 천순제(正統帝 / 天順帝, 1427년 11월 29일 ~ 1464년 2월 23일)는 중국 명나라의 제6,8대 황제(재위 1435년 ~ 1449년, 복위 1457년 ~ 1464년)이다.

이름은 주기진(朱祁鎭)이다. 명 왕조 사상 첫 복위를 한 황제로, 정통(正統)의 연호를 사용하였다가, 복위 후에 천순(天順)으로 개원하였다.

명나라는 일세일원제(一世一元制), 즉 한 황제마다 하나의 연호만을 사용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으나,

 명나라 황제 중, 유일하게 복위하여 연호를 개원하였으므로 혼란을 피하기 위해 묘호인 명 영종(明英宗)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선덕제(宣德帝)의 장남이며, 경태제(景泰帝)의 이복형이다. 어머니는 효공장황후 손씨(孝恭章皇后 孫氏)이다.

 

 

경태제(景泰帝, 1428년 9월 21일 ~ 1457년 3월 14일)는 중국 명나라의 제7대 황제(재위 1449년 ~ 1457년)이다.

이름은 주기옥(朱祁鈺)이다. 묘호는 대종(代宗), 연호는 경태(景泰)이다.

선덕제(宣德帝)의 아들이며 정통제(正統帝 / 天順帝)의 이복아우이다. 어머니는 선묘현비 오씨(宣廟賢妃 吳氏)로,

경태제가 즉위하면서 효익장황후(孝翼章皇后)로 추존되었으나, 영종이 복위하면서 선묘현비로 격하되었다.

쫒겨난 황제라서 그런지 초상도 선명하지가 못하고 이렇게 구린 화질로 전시되어 있었다.

 

 

성화제(成化帝, 1447년 12월 9일 ~ 1487년 9월 9일)는 중국 명나라의 제8대 황제(재위 1464년 ~ 1487년)이다.

이름은 주견심(朱見深)이다. 초명은 견준(見濬). 묘호는 헌종(憲宗). 영종(英宗) 주기진의 아들이다.

 

성화제에 관한 자료를 찾다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는데,

그것은 바로 성화제보다 19세나 연상녀였던 그의 첫사랑 만귀비였다.

황제의 사랑이 얼마나 지극했으면, 그녀는 황후조차도 폐위시키고 다른 후궁들의 자식들을 독살시켜 죽였다.

 

 

 

만귀비(萬貴妃, 1428년 ~ 1487년)는 본명은 만정아(萬貞兒)이고, 정식 호칭은 공숙황귀비(恭肅皇貴妃)이다.

 

생애만귀비는 성화제의 후궁으로 성화제보다 19세 연상이었다.

본래 궁녀였으나 성화제의 마음에 들었으므로 후궁이 되었고 아들을 낳았으나 아들은 곧 죽었다.

이후 그녀는 성화제의 아이를 임신한 후궁들을 강제로 낙태시키고 매질하거나 독살하는 행위를 일삼았고, 황후 오씨(吳氏)를 모함하여 폐위시켰다.

성화제가 만귀비를 황후로 책봉하려 하였으나 이 때문에 성화제의 생모인 주황후(周皇后)가 원치 않았고,

 만귀비는 황후에 책봉되지 못하였다.

현비 백씨(賢妃 柏氏)가 성화제의 아들을 낳았고 이를 시기한 만귀비는 현비 백씨와 그 아들을 독살했다.

어느 날 궁녀 기씨(紀氏)는 성화제의 아이를 임신하였는데 만귀비는 기씨에게 강제로 낙태약을 먹이고 되고 별궁에 유폐했다.

그러나 이렇게 철저하게 성화제의 대를 끊으려는 만귀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기씨는 무사히 아들을 낳았고 이 아이가 명나라 성군으로 추앙받는 효종 홍치제(孝宗 洪治帝)이다.

기씨는 아들을 낳으면 아들과 함께 독살당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환관에게 갓난 아들을 건내며 없애 달라고 부탁하였으나 환관은 불쌍하고 안타까운 마음에 아직 아기였던 효종을 자신의 숙소에 계속 숨겨두고 있다가 기회를 틈타 몰래 궁 밖으로 빼돌려 효종은 민가에서 몰래 양육되었다.(폐후 오씨가 몰래 양육했다는 설도 있다)

1475년 성화제는 문득 자신을 이을 아들이 없음을 한탄했고 당시에 아기 홍치제를 빼돌렸던 측근 환관이 궁녀 기씨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몰래 양육되고 있다는 사실을 고했으며 이는 만귀비가 홍치제를 죽여버리려고 했기 때문이라는 것까지 같이 고했다.

성화제는 기뻐하여 아이를 궁궐로 불러 들였고 황태자로 책봉했다.

그러나 만귀비를 너무나 아꼈던 탓에 성화제는 모든 상황을 인지하고도 만귀비의 죄를 묵인했다.

만귀비는 이에 격분하여 여러 차례 효종을 해코지 하려 하였으나 효종은 현명하였기에 전부 모면했다.

또한 효종의 생모인 궁녀 기씨는 이 사건으로 만귀비에 의해 독살당했다고 한다.

궁녀 기씨는 아들 효종이 황제로 즉위하면서 효목순황후(孝穆純皇后)로 추존된다.

이와 같이 잔인한 행위를 일삼던 만귀비는 1487년 60세의 나이로 숨졌고, 성화제는 슬퍼하였다고 한다.

내용출처 : 위키백과

 

근데, 정통제와 성화제의 초상은 같은 사람이 그렸나?

초상의 포즈도 똑같고, 거의 쌍동이 수준이다..ㅋ

블로그 사진올리면서 왜 같은 사진 두번찍었지? 그 생각을 잠시..

 

 

홍치제(弘治帝, 1470년 7월 30일 ~ 1505년 6월 8일)는 중국 명나라의 제9대 황제(재위 : 1487년 ~ 1505년). 이름은 주우당(朱祐樘)이다.

묘호는 효종(孝宗). 시호는 달천명도순성중정성문신무지인대덕경황제(達天明道純誠中正聖文神武至仁大德敬皇帝)이다.

 

 

정덕제(正德帝, 1491년 10월 26일 ~ 1521년 4월 20일)는 중국 명나라의 제10대 황제(재위 : 1505년 ~ 1521년).

이름은 주후조(朱厚照)이고, 묘호는 무종(武宗).

시호는 승천달도영숙예철소덕현공홍문사효의황제(承天達道英肅睿哲昭德顯功弘文思孝毅皇帝)이다.

 

 

가정제(嘉靖帝, 1507년 9월 16일 ~ 1567년 1월 23일)는 중국 명나라 제11대 황제(재위 1521년 ~ 1567년)이며 이름은 주후총(朱厚熜)이다.

묘호는 세종(世宗)이며 시호는 흠천이도영의성신선문광무홍인대효숙황제(欽天履道英毅聖神宣文廣武洪仁大孝肅皇帝)이다.

흥헌왕(興獻王)인 주우원(朱祐杬)의 장자로 태어나 후사가 없던 정덕제의 뒤를 이어 황위에 올랐다.

 

내가 볼때, 역대 명나라 황제들 중에서 가정제가 제일 똘아이 기질이 다분했다.

결국 황제를 잘못 세운 명나라는 가정제부터 멸망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임인궁변

 

즉위 이후에도 가정제는 정사를 멀리하며 오직 불로불사(不老不死)의 단약을 제조하는데만 많은 시간을 허비하였는데

 심지어 그는 단약을 제조하기 위해 12~14세의 궁녀들에게 강제로 월경액을 채취하기도 하였다.

이런 가정제의 엽기적인 행각은 결국 가정21년 (1542년) 겨울, 임인궁변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다.

사건의 전말은 가정제가 단비(端妃) 조씨(曹氏)의 궁에서 잠을 자는데 궁녀인 양금영(楊金英), 형취련(刑翠蓮)등 16명의 궁녀들이 가정제가 잠든 틈을 타서 그를 목졸라 죽이려 한 사건이었다.

다행히 가정제는 황후 방씨(方氏)가 급히 도우러 와서 목숨을 건지게 되는데 이 사건으로 양금영등 16명의 궁녀는 능지처참당하고 단비 조씨와 영비(寧妃) 왕씨(王氏) 또한 이 일에 연루되어 주살당하였다.

또한 가정제는 다분히 변덕스럽고 폭력적인 인물로 알려져 있는데

첫 번째 황후였던 진씨(陳氏)는 투기가 심하다는 이유로 가정제의 발에 걷어차여 복중에 있던 아들과 함께 절명하였고

두 번째 황후였던 장씨(張氏)는 가정제 자신이 만든 단약을 먹지 않는다는 이유로 폐출되어 냉궁에서 병사하였다.

또 가정제는 자신이 총애하던 후궁인 영비가 임인궁변으로 인해 주살되자 황후였던 방씨에 대해 앙심을 품고 있었는데

몇 년뒤 황후가 거처하던 곤녕궁에서 화재가 발생하자 가정제는 그저 그를 방관만 하면서 황후를 구출하지 않았다.

결국 가정제의 '생명의 은인'이었던 방씨는 자신이 목숨을 구해주었던 가정제에 의해 불에 타죽고 만다.

내용출처 : 위키백과

 

 

 

 

융경제(隆慶帝, 1537년 ~ 1572년)는 명나라의 제12대 황제(재위 : 1566년 ~ 1572년). 이름은 주재후(朱載垕)이다.

묘호는 목종(穆宗). 가정제의 셋째 아들이며 만력제의 아버지이다.

 

 

만력제(萬曆帝, 1563년 9월 4일 ~ 1620년 8월 18일)는 명나라의 제13대 황제이다.

휘는 익균(翊鈞), 묘호는 신종(神宗). 융경제의 3남이다. 1572년부터 1620년까지 48년간 재위하였다.

그의 치세는 역대 명나라 황제들의 통치 기간 중 가장 길며, 명나라가 건국된 지 200년쯤 지나고 왕조가 서서히 몰락해가는 시기였다.

그는 살아생전 2년치 국가예산을 들여 그의 능인 정릉을 건설하는데,

명13릉 중 유일하게 정릉의 지하궁만이 발굴되어 개방되어 있다.

그의 능에는 글자가 새겨져 있지 않은 성덕비가 있는데,

이는 그의 공덕이 너무 많아 일일히 글자로 새길 수 없다하여 비워두었다고 하는데,

내가 볼때, 나라 말아먹기 시작한 만력제는 딱히 적을만한 공덕이 없어서 비워놓은게 아닐까? ㅋ

 

 

태창제(泰昌帝, 1582년 8월 28일 ~ 1620년 9월 26일)는 중국 명나라의 14대 황제(재위 : 1620년).

이름은 주상락(朱常洛)이고, 묘호는 광종(光宗). 만력제의 장자이다.

만력제가 죽고 재위에 오른지 무려(?) 29일만에 급사한다.

헉? 명나라 역대 최단기 황제 재위 기록 수립~

 

 

천계제(天啓帝, 1605년 12월 23일 ~ 1627년 9월 30일)는 중국 명나라의 15대 황제(재위:1620년 ~ 1627년).

이름은 주유교(朱由校)이고, 묘호는 희종(熹宗). 태창제의 맏아들로 태어났으며 선시 왕씨(王氏, ? ~ 1619년) 소생이다.

 

 

마지막 숭정제 초상은 천단재궁에 없었다.

아니면 있는데 내가 몰랐던지..솔직히 태창제와 천계제 초상은 헷갈린다.

태창제의 재위 기간이 짧았기에, 내가 태창제 초상이라고 표시한 것이 천계제이고, 위 천계제 초상이 숭정제일 수도 있다.

그냥 나열된 순서대로만 찍고 미처 해당 황제 이름을 다 표시해 놓지 못해서..

 

숭정제(崇禎帝, 1611년 2월 6일 ~ 1644년 4월 25일)는 중국 명나라의 제16대 황제(재위 : 1628년 ~ 1644년).

묘호는 의종(毅宗). 시호는 순천수도경검관문양무체인치효장렬민황제(順天受道敬儉寬文襄武體仁致孝莊烈愍皇帝)이며,

이름은 주유검(朱由檢)이다. 천계제의 동생으로써 후사가 없는 천계제의 뒤를 이어 명나라 제16대 황제로 즉위하였다.

 

숭정제는 명나라 마지막 황제로서

사실, 나라를 위해 열심히 노력했지만 워낙 앞세대에서 말아먹었기 때문에,

결국 이자성의 난으로 북경이 포위되자,

처자식을 죽이고 자금성 뒤 경산에서 목매달아 자살한다.

 

 

다음은 청나라 역대황제 초상..

헉..이것도 정리하는게 장난아니네..

 

이든의 배낭기 The Garden of Eden

출처 : 이든의 배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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